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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07 14:10:49
Name 그 해 철쭉
Subject [일반]  오디션의 두 얼굴 - '나는 가수다', '신입사원'
경쟁

나는 경쟁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경쟁만큼 개개인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해주고 효율을 촉진하는 장치는 아직까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회의 경쟁에 대해서는 몇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첫째, '경쟁'이라는 가치에 비해 '협력'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이 너무나 간과되고 있다. 둘째, 경쟁의 공정성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셋째, 너무 어린 나이부터 아이를 경쟁으로 몰아 넣는다. 넷째,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그 중에서도 네번째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취약한 사회 안전망과, 'Winner Takes All'이 일반화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경쟁에서 지면 죽는다.'는 공포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폭넓게 심어주고 있다. 해고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자살(이라고 쓰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읽는다)한 13명의 쌍용차 조합원들과, 꿈을 쫒다가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친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모습을 보라. 이 같은 공포 속에 부모는 자식이 말을 떼자 무섭게 '영어유치원'과 같은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고, 아이들은 협력이나 우정보다는 경쟁을 배우며 자라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그 경쟁의 승자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 패자가 무엇을 잃을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그 경쟁의 정당성을 따지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경쟁이 많은 경우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

'생존경쟁'이 사회의 화두라 그런지 요즘 TV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세다.' British got talent나 American Idol 같은 프로그램을 카피한 '슈퍼스타K'로 시작된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는 김재철 사장의 한 마디로 급조된 '위대한 탄생'으로 인기몰이를 하더니, 위대한 탄생의 시청율 상승에 자극받은 MBC가 마침내 자사의 간판 버라이어티인 일밤 전체를 두 편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채우며 절정에 이르고 있는 형세다.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슈퍼스타K', 현재 시즌3를 준비중이다

그런데 이 두 프로그램은 '오디션' 형태를 Base로 한다는 점 말고는 여러모로 다르다. (그러니까 같은 일밤에서 운영할 수 있었겠지.) '나는 가수다'는 '노래'라는 현재 히트치고 있는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의 기본 소재를 차용하긴 했지만, '숨어 있는 고수를 찾아서 승자를 뽑는다'는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의 공식과는 반대로 '널리 알려진 고수를 경쟁시켜 탈락자를 선발한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신입사원'은 '아나운서'라는 독특한 소재를 차용한 반면 '승자를 뽑는다'는 공식에는 충실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경쟁의 결과가 참가자 - 특히,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사람 - 에게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패배했을지라도 타격이 적고 어떤 의미에서 참가만으로 이득인 측면도 있지만, 후자는 다른 기회를 봉쇄당할 수도 있고 참가만으로 원치 않는 부작용에 시달릴 수도 있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기획, '나는 가수다'
'승자를 선발한다'와 '탈락자를 선발한다'는 차이를 얼핏 들여다보면 탈락자를 선발하는 방식이 더 잔혹해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가수다'에 나오는 가수들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최고'로 인정받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이들 중 하나가 탈락한다고 하더라도 그 실력 자체를 의심받거나 가수생명을 위협받는 일 따위는 당연히 없다. (어제 무대를 보았다면, 7등을 한 정엽씨의 실력의 의심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경쟁에서의 패배는 탈락자에게 상처가 되겠지만, 누가 되었든 그 가수는 프로 중의 프로이며 따라서 충분히 이를 감수하고 더 좋은 무대를 준비해가는 채찍질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모인 멤버가 이런 정도의 가수들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 뽑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실력에 대한 인증일 수 있다.)


'나는 가수다' 첫 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환상적인 무대를 선사하고도
7위에 머물렀던 가수 정엽. 하지만 누구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진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아이돌들이 가요 관련 프로그램을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주말 황금시간대 공중파에서 공연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그 뿐이랴, 시청자는 시청자대로 질 높은 공연을 즐길 수 있고 (평가단으로 뽑힌 관객들은 말할 것도 없다.) 방송국은 방송국대로 시쳥률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쟁의 승자와 패자, 그리고 경쟁의 무대를 만든 이와 이를 지켜보는 이 모두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기획이다. 물론 이들보다 더 무대를 찾기 힘든 실력파 인디밴드나, 아이돌이 아닌 신인 가수 등을 대상으로 비슷한 기획을 했다면 좀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시청률을 생각해야 하는 공중파 버라이어티 프로의 한계를 고려할 때 (넓은 의미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 이 정도면 최선의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강자의 횡포, '신입사원'
'나는 가수다'와 함께 새로운 일밤을 양분하고 있는 신입사원은 여러 의미에서 '나는 가수다'와는 다르다. 가수냐 아나운서냐, 채용이냐 탈락이냐와 같은 표면적인 차이 뿐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가수와는 좀 다르다. 물론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노출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런 까닭에 최근엔 '아나테이너'라는 말도 나왔지만), 아나운서는 기본적으로 '스타'이기 보다는 '언론인'이다. 언론인의 선발을 방송에 비춰지는 이미지만으로 한다는 것은 MBC가 언론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지는 부분이다. 혹시 방송을 통해 '인기 있는' 아나운서를 뽑아서 언론인 보다는 대중문화 스타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시청율을 챙기면서 장기적으로 이들을 연예/오락 프로그램 MC 등으로 활용함으로써 출연료도 좀 아껴 보겠다는 얄팍한 수단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MBC 아나운서 공개채용 신입사원. 나이, 연령, 학력을 파괴하고 '국민을 닮은' 아나운서
뽑겠다는 그럴싸한 타이틀과는 달리 실제로는 강자의 횡포가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강자의 횡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수를 뽑는 오디션과 달리 아나운서를 뽑는 오디션은 참가자(중 탈락자)의 '다른 기회'를 봉쇄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MBC 아나운서 오디션의 16강쯤에서 탈락하고 그 탈락 사실이 공중에게 알려진 이는, 그런 일이 없었을 때보다 KBS나 SBS의 아나운서로 채용될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KBS나 SBS 입장에서 'MBC의 탈락자를 채용했다.'는 이야기가 달가울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MBC는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 특성상 발생할 것이 틀림 없는 부작용인 속칭 '신상이 털리는' 일을 예견한 듯 참가자에게 초상권, 명예훼손,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할 것을 서약하도록 만들었다. 따져보면 따져볼 수록 지원자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방송사'라는 '아나운서 지망생'에 대해 절대적으로 '갑'인 존재가 아니라면 유지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물론 MBC 입장에서는 항변할 수도 있다. '그게 마음에 안들면 지원하지 않으면 될 거 아닌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견강부회일 따름이다. 기자, PD, 아나운서가 되는 일은 속칭 '언론고시'라고 불리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를 위해 몇 년씩 준비를 한다. 그리고 공중파 방송인 MBC의 아나운서는 이들에게는 수년간 꿈꿔왔던 '꿈의 직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MBC가 강자의 횡포를 부린다고 해서 그 기회를 포기할 수 있을까? 포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울며 겨자먹기로 참가하게되지 않을까?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들에게 진정으로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MBC가 '공영방송'임을 자임한다면, (물론 최근 재선된 사장의 모습을 보면 '공영방송'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시청률과 수익성을 따지기 이전에 자신의 직원이 될 지도 모르는 이들의 입장을 좀 더 고려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다른 '강자'들이 그렇듯, MBC도 자신의 '힘'을 휘두르는 것만 생각했지 그 '힘'으로 인해 눈물을 쏟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나는 가수다'가 끝나고 나면 채널을 돌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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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가루인형형
11/03/07 14:14
수정 아이콘
지난번에 책파는 것 같다고 한게 매우 죄송할 정도로 이번 글은 공감가고 재미있네요 ^^;
슬렁슬렁
11/03/07 14:25
수정 아이콘
신입사원은 다른 문제도 있죠. 다른 지방 방송사 아나운서라던가. 아나운서가 아닌 리포터 기상캐스터 등등이라던가. 일반 직장인이라던가... 그런 사람들중에서도 mbc kbs sbs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서 몇년째 노력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분들은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나오던가, 아니면 나올수가 없죠.
11/03/07 14:26
수정 아이콘
저도 공감을 느낍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금시조131267M
11/03/07 14:31
수정 아이콘
굉장히 공감가는 글이네요.

우리나라 교육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승자만 있고 패자는, 존재해서는 안 될 것처럼 몰아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경쟁의 결과를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철저히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패자도 나름대로 경험이라는 산물을 얻고, 사회가 언제든 승자가 될수 있는 사다리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준다면 충분히 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신입사원'은 안봐서 잘 모르겠지만 갑의 횡포가 굉장히 심한 프로그램 같네요. 전 그런 이유로 채널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아이유를 보기위해 SBS로 채널을 돌리긴 하지만 한번쯤 챙겨봐야겠네요.
블루마린
11/03/07 14:3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감도 많이 가고요.
큐리스
11/03/07 14:35
수정 아이콘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더 길게 댓글을 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신입사원'에 대한 의견에는 동감합니다.
하지만, 오디션이라는 것 자체가 '인재를 뽑아서 채용하는 것이 목적인 프로그램(또는 대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가수다'를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포포탄
11/03/07 14:44
수정 아이콘
사실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경쟁도 나는가수다처럼 실패가 부담스럽지 않은 자들에게 일어나야하는데 지금 사회는 경쟁이라는 틀만을 채용하고 경쟁에 필요한 기본조건은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가수다에 열광할수록 경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음 좋겠네요. [m]
11/03/07 14:53
수정 아이콘
위에서 언급하신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문제는 원래 영화판이 너무 가난한데서 비롯된게 아닐까합니다.
우리나라는 슬프게도 디자인이나 음악을 제외한 대부분의 예술분야는 최고가 되어 꿈을 이루어도 밥걱정을 하더라고요.
그 해 철쭉
11/03/07 14:56
수정 아이콘
큐리스 님// 네, 정통 오디션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래서 글 중에는 "(넓은 의미의) 오디션...."이라는 표현이 있기도 합니다. 다만 '경쟁'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나는 가수다'도 분명히 경쟁하는 프로그램이니까) 이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karlla 님//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상황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네요.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는, 그래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직접적으로는 '사회안전망'의 보강이 그런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겠죠...) '경쟁'이란 것이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11/03/07 15:03
수정 아이콘
강자의 횡포 라는 부분을 읽으니

며칠전 인상깊게 봤던 한 애니의

'우리는 언제나 너희와의 합의를 전제로 계약해. 그것만으로 충분히 양심적인데...'

라는 대사가 떠오르네요.
11/03/07 15:05
수정 아이콘
'나는 가수다' 는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올스타전이겠죠. 치열한 경쟁이라기 보다는 축제나 이벤트 같은.
빌게이츠와 잡스가 카드게임을 해서 지는 쪽이 십만달러를 기부하는 식의 내기를 일반적인 경쟁의 이상적인 형태라고 보긴 힘드네요.
영원한초보
11/03/07 15:39
수정 아이콘
글의 요지는 경쟁사회에서 패자에대한 배려가 없다는걸 문제삼는거라고 보는데요.
그런면에서 신입사원이라는 프로가 강자의 횡포라는 말이고요.
글 제목이 오디션의 두 얼굴이라서 어느 한쪽이 좋고 그게 바람직한 방향이다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게 글쓴이의 의도는 아닌거 같습니다.
체념토스
11/03/07 17:22
수정 아이콘
사실 아주 오래전 부터 봐왔던 가요탑텐이든 어떤 지금 현 가요프로그램들을 봐도 다 경쟁이죠

나는 가수다는 그 중에서 특별한 감동을 주는 가수들 몇명을 뽑아서 하는거라 특별히 포멧자체가 별반 다르다고 보진 않습니다.
고로 가수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출현하는 것자체를 급이 낮거나 또 괜히 기분 나빠할 필요 없다고 봐요
몽키.D.루피
11/03/07 21:01
수정 아이콘
슈스케가 우리나라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초는 아닙니다만 최근의 오디션 프로그램 붐을 일으킨 장본인인 건 맞습니다.
하나린
11/03/07 21:31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글 잘 보고 갑니다. 공감되네요. 왠지 신입사원에는 흥미자체가 가질 않더라구요..
사소한 것 하나 이야기하고 가자면 시청율/시청률을 같이 쓰고 계셔서, 시청률이 맞는 표현이지요.
천재테란윤열
11/03/07 23:08
수정 아이콘
글 중에
"물론 이들보다 더 무대를 찾기 힘든 실력파 인디밴드나, 아이돌이 아닌 신인 가수 등을 대상으로 비슷한 기획을 했다면 좀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라는 부분이 있는데, 신인 가수를 대상으로 비슷한 기획은 이미 나왔었죠. 그것도 MBC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쇼바이벌 이었나요? 8ight와 베이지라는 가수가 최대 수혜자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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