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축구계는 무척이나 유럽을 동경하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가 한 시즌 동안 전세계를 상대로 끌어 모으는 돈이라든지, 분데스리가 경기장의 만원사례, 시즌 막판 불꽃 튀는 승강제 전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현실의 잔인함은 점점 유럽의 유혹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누적되는 적자, 월드컵 열풍에도 끼지 못하는 경기장의 열기,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승강제 도입은 EPL 열풍으로 높아진 대중의 눈을 국내 축구계로 잡아두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국내 축구계가 눈에 보이는 유럽의 축구열기를 동경하면서도, 유럽이 던진 경고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 선수의 죽음으로 이어진 심각한 경고임에도 말이다.
2007년 8월 26일. 할 일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던 나는 친구들과 새벽까지 당구를 치며 KBSN에서 중계해주는 세비야와 헤타페의 라리가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후루꾸로 라스트 쓰리 쿠션을 성공시키고, 차분하게 캔커피를 마시며 축구를 보던 나는 충격적인 상황을 보게 되었다.
불과 1분 전까지 팔팔하게 그라운드를 누비던 푸에르타가 쓰러진 것이다. 그는 쓰러진 이후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보는 이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다행히도 그는 얼마 후에 의식을 회복하여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교체되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푸에르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푸에르타의 죽음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를 보호하라는 경고장을 날렸다. 유럽,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어느 대륙도 이 경고장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비비안 푀의 죽음 이후,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경고장이 다시금 축구계에 전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축구계는 이 경고장을 어떻게 접수했을까. K리그처럼 최상위 리그가 아닌 시선을 아래로 내릴수록 현실은 처참하다. 애초에 경고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 멍청한 집단은 그저 대회를 열고, 우승 팀을 시상하고, 회식 자리에서 국내 선수들의 수준을 운운하며 유럽과 남미 선수들의 그것과 비교하기를 즐길 뿐이다.
내셔널리그의 부산교통공사 축구단은 지난 7월 25일에 우승팀 상금으로 500만원이 주어지는 내셔널 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대회가 열리는 동해로 이동해 모텔 방을 숙소로 잡고, 대회 기간 내내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부산교통공사는 결국, 결승전에서 울산미포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승 상금 500만원을 받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대회가 열린 1주일 동안 부산교통공사 선수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경기에 임했다. 7월 26일 수원시청과의 경기를 시작으로 8월 6일 울산미포와의 결승전까지, 부산교통공사가 11일 동안 치른 경기는 무려 6경기였다. 모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식당 밥을 먹으며 사람 죽이는 대낮 무더위 속에서 이틀에 한 번 꼴로 경기를 치른 셈이다.
대회가 열렸던 동해는 열흘 내내 찜통더위가 선수들의 체력을 시험하고 있었다. 26~30도의 온도와 폭발하는 습도는 90분 동안 경기장을 누벼야 하는 선수들에게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대회의 시작과 끝의 정점에 내셔널리그 연맹이 있었다.
내셔널리그 연맹은 결승전을 지상파 방송 생중계로 잡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다. 이로 말미암아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22명의 선수들은 시청자 앞에서 자신들의 건강이 위협당하는 모습을 90분 동안 보여주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애초에 전략과 전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래 버티는 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결승전의 해설을 맡았던 한준희 해설위원은 경기 내내 이렇게 얘기했다.
“이런 무더위와 습도에서 선수들이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이런 걱정을 축구계는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푸에르타의 경고장 따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상금 500만원의 대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우승 상금 500만원은 건장한 성인 선수들이 식당에서 고기를 먹으면 얼마 남지도 않는 돈이다.
하부리그 선수들의 건강은 한 시즌 내내 위협받고 있다. 예컨대 올해 창단된 용인시청은 경기도 도민체전과 리그 경기 일정이 겹치며 하루에 2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30명의 선수로 운영되는 축구단이 성인 레벨에서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경기를 치른 것이다.
황당한 경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을에는 전국체육대회가 열린다. 시 체육회의 명예를 이유로 선수들은 또 한 번 이틀에 한 번 꼴로 경기를 치른다. 이번 년도 우승팀인 천안시청은 3일 동안 3경기를 치러 우승컵을 손에 넣었다. 안타까운 점은 이 대회에 참가하는 고등부, 대학부 선수들의 상황도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녀의 경기모습을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는 학부모만 애가 탈 뿐이다.
국내 축구계의 대회 운영 방식은 상식적인 선을 벗어나 있다. 선수들은 피로와 부상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제대로 된 의료진이 없어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한다. 한정된 예산으로 운영되는 하부리그 축구단에 의료진은 사치이다. 경기 중 부상을 당한 선수에 벤치에 있던 후보 선수가 스프레이를 뿌린다. 고통스러워하는 선수에게 돌아오는 한 마디는 고작
“뛸 수 있지?”
경기장에 엠블런스는 있지만, 돌발적인 상황이 닥쳐도 적절하게 대처할 만한 의사는 없다. 내셔널 선수권대회가 열렸던 지난 여름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만약 한 선수가 푸에르타처럼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2002년 월드컵의 놀라운 성공 이후 8년이 지났다. 국내 축구계는 멋진 경기장, 아시아 최고 수준의 리그, 해외파 선수들의 맹활약, 유럽에 내놔도 부럽지 않은 저변시설을 얻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22년 월드컵을 유치하겠다며 난리를 떠는 그들에게 8년이 지난 오늘,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당신들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을 보호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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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kurupt.egloos.com/4861842
내셔널리그 홈페이지에 글을 기고하고 계시는 배정훈 기자님의 글입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글인듯 싶어 퍼왔습니다. 개인적으론 프로 게임계가 겹쳐보이네요.
ps)이글루 가보시면 축구에 대한 더욱 많은 글을 읽으실수 있습니다. 특히 내셔널리그에 대한 정보가 많고, 배정훈기자님이 아스날 팬이셔서 아스날에 대한 분석도 보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