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불과 몇 시간만 있으면, 감동과 논란을 동시에 선사한 WM7의 마지막편이 방송될 것입니다. 걱정과 환호의 범벅 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경건한 자세도, 찬사와 박수로 맞이하기도 뭐한, 예를 들면 꿍디꿍디한 이 감정들은 무한도전이 참 좋은데, 직접 말로 하긴 뭐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 이전까지의 무한도전과는 다르면서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겠죠.
무한도전은 젊은 인터넷 세대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시청률이 10%대로 떨어지면서, TEO PD는 부담감 없이 자기 색을 펼쳐 보인다고 만족스러워 하며 인터뷰를 했었죠. 정말 그 때문인가요. 10%대의 무한도전은 시청자를 예능인으로 만드는, 독특한 예능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특집이 여드름 브레이크가 아닐런지요. 숨겨진 메시지, 예능으로 환원된 추격과 스릴러. 그리하여 시청자들은 무한도전을 무한히 찬양하는 동시에, 무한히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터넷은 어찌 보면 개싸움의 연속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답답해하며 말합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네가 들여다봤어? 뭘 안다고 그래?
접속자들은 모두 각자의 관점을 지닌 채 모니터를 마주합니다. 우리는 직접 대화하는 동시에 간접적 공간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것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관점들이 떠드는 모습들입니다. 무한도전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가끔 과장된 이미지들을 투영하기도 하고, 또 너무 확장된 해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몇몇은 그런 사람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건 좀 오바인 듯. 그건 네 생각인 듯.
하지만 무한도전의 열광적 지지자들을 묶는 근원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그들은 감히, 예능 그 이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이미 지적하셨지만, 무한도전은 어느 시점부터 ‘컬트적’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무수히 많은 점에서 지켜보는 것, 그것은 해체의 가능성입니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이 예고했듯이, 무한히 해체 가능한 텍스트에 지지자들은 끝없는 열성을 바치는 법입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이 그러하듯, 단테와 함께 저 지옥에서 천국까지를 오가는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무한도전은 해체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즐거운 텍스트’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의 가능성은 때론 부담이 되어 돌아오곤 합니다. TEO PD가 10%대 이상을 거북하게 여겼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난 주 WM7에서 연예인 그 노래가 울려 퍼질 때, 재미있게도 많은 분들은 자기반성을 술회하시더랍니다. 고통을 참고 책임감 하나로 그 자리에 선 연예인과, 그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관중들. 잘못이 없음에도, 어쩐지 죄책감이 드는 그 장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왜? 왜일까요.
해체의 과잉이, 저들을 몰아붙이지 않았나 하는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움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때 보이는 것은 무한도전이라는 한 가족의 결속력입니다. 그 순간, 창출되는 것은 감동입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무한도전과 흔히 비교되는 프로그램은 1박2일입니다. 그 1박2일을 폄하하거나, 싫어하는 분들께서 내세우시는 가장 흔한 이유는 억지감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음, 사실은 제가 그렇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 잘 안봅니다. 그러나 제게 느껴지는 것은 느껴지는 것, 시청률이 증명하듯 감동과 재미, 여행의 버무림은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코드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아니, 우리 무한도전 님하는 더 세련되다능. 저런 거에 어떻게 눈물이 나오냐능. 저게 재미있냐능.
그러나 여기서, 그 세련되지 못함을 언급할 수는 있어도, 감동코드의 삽입이 1박2일을 얕잡아볼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1박2일 제작자들은,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알고 행했으니까요. (게다가 좋아하는 분들도 많잖아요.)
시청자들은 해석자입니다. 해석은 열어놓되, 그 과잉을 막고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는 방법이 어떤 것일까요. 이 지점이 예능에 감동의 필요성을 발생시킵니다. 감동은 곧 공감입니다.
공감은 저들처럼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1박2일은 이것을 정말 효과적으로 사용해 왔어요. 낯선 여행지, 여행의 설렘, 객지에서 벅차오르는 그 감정들은, 정말 소소하고 편안하게 시청자들에게 다가섭니다. 비슷비슷한 복불복 패턴은, “우리 무한도전과 달리 변화를 모른다능”이 아니라, 안정감 있게 감동코드를 감싸며 많은 사람들을 공감의 장 안에 끌어들이는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도전의 가족은 1박2일의 가족과는 다릅니다. 무한도전의 감동코드는 1박2일의 감동코드와 같을 수 없습니다. 또, 오랜 시간 쌓아온 1박2일의 노하우를 따라갈 수도 없지요. 그렇다면 당연, 무한도전의 감동은 그들의 강점 그대로 세련되게, 작위의 흔적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빼어난 기교로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환호합니다. 우리는 즐겁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럽습니다. 이깟 게 뭐라고, 그들은 아픔을 감내하며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섹시 맵시 디스코를 추고, 로블로를 날립니다. 보기만 해도 아픈 쵸크 슬램을 받아내고, 로프 위에서 날아오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 사실들이 최대의 감동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무한도전은 역설적이게도, 예능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연예인이자 예능인이며, 리얼 버라이어티인 자신들의 자세로 돌아갑니다. 혼신을 다해, 우리들의 연예인이 되어,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과잉 해체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쉴 새 없이 말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라고. 그것은 자신들과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이지만, 우리의 가슴 속에 파고듭니다. 우리는 외치게 됩니다. 아니, 안 괜찮다는 말은 안 배웠어요?
언제나 처음 같은 마음으로, 그 다짐으로 정 브라더스는 마지막 장면 앞에 버티고 섭니다.
거친 무대로, 환호의 세계로
거친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연극 무대 위로,
그들은 그렇게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뛰어듭니다. 아픔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환호는 그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 사이 우리는 해체를 넘어서는 하나의 감정을 깨닫게 됩니다. 무한도전의 가족은 어떻게 확장되어야 할 것인가. 김태호PD가 천재인 까닭은, 그가 놀라운 감동을 전달해냈고, 또 그 기교가 얼마나 대단한지로 판가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왜 여기서 감동이 필요한지 보여줬기 때문에 천재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제발 다시는 이런 무리수 두지 말고 몸보신 특집이나 하세요 라고 말하면서도, 저 두 사람의 어깨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 눈물의 공감은 이해입니다. 정서의 전달입니다. 지지자를 진정한 지지자로 만드는 신호탄입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시청자를 예능인으로 만든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공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한도전이 WM7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은, 3단로프 위에서 뛰어오르기 위해, 다시금 이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할 연예인의 위치로, 혹은 레슬러의 자리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정해진 각본 속에서, 그들의 아픔과 눈물은 진짜다. 당신들의 눈물 역시 진짜다. 그러니, 부디 안심하고 들어오라. 이 공감의 장 안으로. (해치지 않아요. 물지 않아요.)
다시, 그리하여, 무한도전은 예능이 됨으로써 우리에게 예능 이상을 보여줍니다. 강같이 흐르는 평범함도 미친 존재감이 되는 세계로 손을 내밉니다. 그러면 곧 우리는, 못이기는 척 외치게 되겠지요. 예이, 무한,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