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역사 속 로마에 대해 굉장히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가죽 샌들이라든지, 양날 검이라든지, 커다란 사각방패나 웅장한 콜로세움 같은 거 말이죠. 심지어 멋들어지게 토가를 걸친 정치인들까지 좋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만 판타지의 끝을 보여준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는 제겐 정말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센츄리온>도 기대를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사라진 로마 9군단의 미스터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다니, 관람 전부터 가슴이 떨려오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처음 20여분은 매우 즐겁게 봤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로마 군인들이 잔뜩 나와서 흉폭한 야만인들과 전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 그 전설적인 9군단이 픽트 족에게 전멸하는 순간부터 무언가 틀어져가는 느낌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허무하게) 그나마 9군단의 군단장은 살아서 포로로 잡혀갔기에, 이 군단장을 구출하면 뭔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군단장은 구출되지 못하고 결국 죽어버립니다. 군단장조차 죽은 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러닝타임이 어정쩡했어요. 뭔가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장군의 복수(!)를 하기엔 남은 시간이 짧은 듯싶고, 그렇다면 아직은 꽤나 남은 상영시간을 감독은 무엇으로 메우려 하는 것인가? <센츄리온>은 남은 러닝타임 내내 9군단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달리게 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나 봅니다. 픽트 족의 추격에 남은 생존자들은 정신없이 쫓기지요. 추격이 어찌나 맹렬한지 관객들에게조차 도무지 쉴 틈을 안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윽고 탈출에 성공해 안식처로 돌아온 생존자들까지 결국 다 죽여 버리지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러셀 크로우가 마지막에 죽는 것처럼 애틋한 느낌은 없습니다. 캐릭터들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갖기에는 너무나 도망쳐 달리기만 했지 깊이 있게 공유할 여유가 부족하거든요. 어쨌든 영화는 사라진 로마 9군단에 대한 미스터리는 풀었지만,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그냥 멋진 전설로 남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아! 나의 로마 병사들이여! 어딜 가면 볼 수 있나요!
+ 영화 중후반부는 상단 스틸 샷과 비슷한 장면들로 대부분 메꿔진다고 보시면 되요. 남정네들이 심지어 로마 병사 복장조차도 아닌 이상한 털가죽 옷을 뒤집어쓰고 비슷한 배경을 수십 번씩 앵글만 바꿔 달리기만 하는 장면들을 보게 될 거에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덜컥 봤습니다. 개봉이 오늘이니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간만에 정말 시원한 영화 보고 왔네요. 의외로 이렇게 심플하게 딱 자기 할 일만 하는 영화는 막상 찾아보면 없다고요. 영화 보면서 내내 답답함과 안쓰러움을 느끼면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는데, 그런 기분들을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기 전까지 영화가 스스로 해결해버리네요. 지금은 왠지 후련한 기분입니다. 학대당하는 주인공이 화끈하게 복수해버리는 이야기라고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만,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품고 있다가 폭발시키는 에너지는 상당합니다. 실제 장면은 잔인해 죽겠는데 보는 사람이 드는 느낌은 통쾌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죠. 요새 개봉하는 한국 영화들처럼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도 조금은 폼 나는 영화로 보이게끔 치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우직하고 깔끔한 영화는 오랜만이군요. 장면이나 표현이 스타일리쉬하다거나, 영상이나 이야기가 탄탄하거나 혹은 아름답다거나,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 단순해요. 하긴 뭐, 제목부터 정직하지 않습니까.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라뇨. 제목이 다 설명하는군요. 영화 보시면 알겠지만, 참 꾸밈없이 솔직해요. 그래서 다른 똥폼 잡는 영화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분명 '대작'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충분히 볼만한 매력은 있는 영화입니다. 적어도 다른 영화들처럼 스스로 과대포장하거나 관객들을 배신하지 않고, 그저 성실한 영화니까요.
------(추가한 부분)------
이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평론가 평이 상당히 좋네요.
저는 "에이~ 괜찮은 영화지만 그래도 그정도까진 아닌데?"하는 느낌이고요.
개봉전까지 이 영화의 홍보물이나 소개같은걸 접해보지 못해서, 또 어떤 듣보잡 영화일까 했는데,
여유가 되시면 이 영화 한 번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 배우 서영희씨는 계속해서 작품이 나올수록 앞으로 더 많은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