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밑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인터넷으로 조사한 내용들이라 실제와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몽학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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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농민들은 임진왜란 등으로 몹시 가난해져 있었다. 이때 본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이몽학은 전주 이씨로서 서얼이긴 서얼이었지만 조선 왕족의 피가 그 몸에 흐르고 있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1596년(선조 29) 한현은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 부여) 무량사에서 이몽학과 만나 역모를 모의하고 도천사(道泉寺)의 승려들과 인근 가난한 농민 6~7백 명을 규합했다.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김경창, 임억명, 이구, 장준재, 사노, 김팽종, 승려 능운을 거느리고 자신이 선봉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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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몽학의 난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사이 시기에 일어났는데 영화에서는 선조가 피난 가는 상황으로 설정했으니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모속관 한현과 이몽학이 같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모속관은 각 지방으로 파견되서 왜군과 싸울 병사들을 징병하던 직책이었던 듯 합니다. 처음에는 이몽학이 관직을 가지고 있던 한현의 부하였지만 영화처럼 칼을 잘 썼는지 유비처럼 왕족출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내 반란을 주동하게 됩니다. 힘이 엄청난 장사였다는 말도 있더군요. 승려를 포함해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 걸 보면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의병을 모은다는 핑계를 대었기 때문에 무사히 D-day까지 들키지 않고 반란을 준비할 수 있었죠. 물론 반란군들도 자신들이 의병인 줄 알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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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을 끈 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데다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악해진 때이므로 “왜적의 침입을 바로 잡겠다”는 반도들의 선동이 크게 호응을 얻었다.
1596년 음력 7월 6일 이몽학군은 홍산현에 쳐들어가 현감 윤영현을 홍산동헌에서 생포하였다. 임천군으로 쳐들어가서는 군수 박진국을 포박했다. 이어 7일에 정산현을 함락시켰다. 전산현감 정천경은 도주했다. 8일에 청양을, 9일에 대흥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농민들까지 합세해 반란군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이몽학군은 10일에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관속 이희수를 시켜 거짓 항복을 함으로써 이몽학을 속이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이 틈을 이용해 홍가신은 인근 수령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任得義)와 더불어 성을 지켰으며, 인근의 순찰사 신경행, 최호, 박동선, 황응선 등이 와서 홍주성에서 이몽학군과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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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이없는 건 한현인데 이몽학에겐 목숨 건 반란을 일으키라고 해놓고 자기는 부친상을 핑계로 고향인 면천으로 떠납니다. 병력을 더 모으러 갔다는 말도 있고 반란이 성공하나 실패하나 관망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리고 홍주목사 홍가신은 앞에 나왔던 정여립의 난에 휘말려서 좌천되었던 사람인데 참 역사가 아이러니 합니다.
농민들은 이몽학의 뜻을 따랐다기 보다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몽학이란 사람이 수백의 병력을 이끌고 짠하고 나타나 평소 자신들을 괴롭히던 수령들을 혼내주니 신나서 따라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삽시간에 반란군은 수천으로 불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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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도원수 권율, 충청병사 이시언, 장군 이간 등이 홍주 주위로 향했다. 이때 홍가신은 민병을 동원하여 반격하였고, 판관아병 윤계가 총포를 쏘면 이몽학군 모두 살아남지 못하고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오면 큰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또한 홍주에 살던 무장 임득의, 박명현, 전 병사 신경행 등은 홍주성에 들어가 홍가신을 도왔다. 남포현감 박동선도 충청수사 최호와 상의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였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반란군은 밤에 청양까지 도망하였고,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 임억명(林億明), 태척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고 머리를 베었고, 이몽학이 죽자 이몽학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고 움직이지 않던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하다 잡혔다. 한현을 비롯한 이 난에 가담한 자들 중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중에 따라 처벌되니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 신경행과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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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이 고향으로 떠나며 이몽학에게 상책은 불타는 기세로 달려가 한양을 치는 것이며, 중책은 방비가 허술한 군현들을 점령하는 것이며, 하책은 가까운 홍주성을 치는 것이다라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거 참… 그냥 옆에 있어주지 그랬어.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이몽학의 반란군은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던 홍가신과 때마침 성에 합류한 지원군에게 떡실신 되어 이몽학의 난은 끝나게 됩니다. 당연히 홍가신은 자면서도 항상 꿈꾸었을 만한 1등공신이 되어 이몽학의 난 이후로 출세가도를 달렸구요.
이몽학은 항상 약속한 의병들이 곧 호응해서 자신들과 합류할 거라고 뻥을 쳤는데 그러지 않자 급속하게 반란군의 사기가 떨어졌고 농민들이 부대를 이탈했다고 합니다.
근데 고향에 숨어 있다 잡힌 한현이 무슨 심보인지 반란을 같이 모의 했다고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의병장들을 동조자라고 불어서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게 되었습니다.
<의병장들의 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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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의 친국 과정에서 의병장 김덕령과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고언백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이 잡혀갔다. 이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ㆍ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선전했고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므로 난이 평정되어 선조가 친국을 할 때에 이들의 죄를 물었다. 그 뒤 홍계남과 곽재우는 풀려났으나 김덕령은 선조의 친국 과정에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사망하였고 최담령은 결국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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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는 권율 장군을 말합니다. 항상 붉은비단갑옷을 입어서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의병장 곽재우는 절친 김덕령이 고문 중에 죽자 좌절해서 선조가 벼슬을 준다는 걸 버리고 낙향했다고 합니다. 근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할 수 없이 다시 와서 왜군과 싸우고 끝나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고 계속 이런 식이었다죠.
<선조의 정권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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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선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이 때문에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이 덕에 본의 아니게 원균이 선조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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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명나라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왜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어 2차 임진왜란인 정유재란이 일어납니다. 의병과 백성들의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막았지만 그 피해는 복구하기 힘들만큼 컸죠. 의심쟁이 선조는 역대 최악의 조선임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몽학이 했듯이 의병들과 지방군벌들이 칼을 자신에게 돌릴 걸로 의심했으니 말이죠.
결론을 내보자면 이몽학에 대한 평가는 딱 영화에 나온 그 캐릭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해서 주변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으니까요.
이건 임진왜란 소설인데 이몽학에 관련된 내용이 있더군요. 심심하신 분들은 읽어보세요.
http://blog.daum.net/kilmer/15137849?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kilmer%2F15137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