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는 법적 책임보다 사회적 책임의 문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를 만들도록 애써 달라" -이명박-
그래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를 한번 긁어 봤습니다.
긴데다 표가 난무해서 어려워 보이지만 내용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큰 사건이었던 만큼 천천히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http://socio1818.egloos.com/3697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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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해석의 향연과 실증의 부재
촛불시위 2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기사들('광우병 촛불' 그 후 2년) 덕분에 청와대부터 웹 사회까지 들썩이고 있다. 사실 이미 촛불시위에 대한 검토가 상당부분 이루어진 시점에서 '아고라' 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조선일보 기사가 새삼 이슈화가 된다는 것은 한국 사회 공론장의 처참한 수준을 잘 반영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엄밀한 분석이 제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현재와 같이 진영논리에 갇힌 규범적 논의에 머무른다면, 이는 결국 조선일보의 프레임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일보가 원하는 것, 그리고 청와대가 원하는 것은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진영 전선을 확고하게 긋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진보파를 소리높여 성토함에도 불구하고 반대 세력을 포섭과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진보파의 또 다른 쌍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촛불시위에 대해 청와대 및 이글루스에서 제기된 몇 가지 논의들을 살펴보자면 아쉽게도 촛불시위 당시 나왔던 분석들과 큰 차별점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근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촛불을 실증적 검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신화화된 표상의 영역으로 보낸 후 자신들의 선험적 구미에 맞추어 활용하였다는 점을 방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반응에서 가장 걱정되는 점은, 정권에 반대한 지식인들에게 반성을 강요하며 도덕 재무장 운동을 주문하는 청와대의 반응(제 20회 국무회의 관련 브리핑)은 반대세력에 대한 승리에서 기인하는 과도한 자신감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파시즘적 사고의 냄새가 난다는 점이다. 필자는 범 진보파 일각에서 제기하는 소위 'MB 파시즘' 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명박 대통령의 이번 브리핑과 조선일보의 태도, 한나라당의 논평에 한해서는 이러한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치가가 인민을 대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인민을 책망하고 계도하려 드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령에서 어긋난 행동일뿐더러(가장 경악스러운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조선일보 김창균 정치부장은 지면을 통해 특정 인민을 데모스에서 배제하자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을 하고 있다-'아니면 말고' 선동, 3진아웃 시켜야-.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본 요건 중 하나가 데모스의 포괄성이라는 점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은 조직화된 반대의 권리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도덕적 재무장을 강요하는 것은 다원적 자유 민주주의에서 이탈한 극단적 공화주의 담론으로서 공화주의적 멘탈리티와 전위의 멘탈리티가 결합되면 나오는 것은 자코뱅주의이다. 간단히 정리를 하자면 서두에서 언급하였다시피 현재 이명박 대통령을 위시한 한국 보수파 주류의 시민에 대한 태도는 그들이 그토록 성토한 '좌익 전체주의' 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태도라는 것이다. 또한 한 국가의 정치인이 시민의 정치적 행동보다 특정 언론의 보도를 노골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정당과 대의체제를 우회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를 조장하는, 민주주의에 그리 좋지 않은 신중치 못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촛불시위에 대한 진보파의 태도 역시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한 환상으로의 도피가 아닌가 하는 혐의가 있다. 이들에게 있어 촛불시위는 시민의식의 도덕적 재가요, 욕망의 시대의 살아있는 정의요, 깨어있는 시민의 정치이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촛불은 인민의 아편이다. 진보파의 촛불에 대한 찬양은 유럽의 68운동에 대응하여 제기된 신사회운동론과 상당부분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데, 신사회운동론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관심 역시 집합행동에 대한 일반이론을 정초하는 것 보다는 운동 자체의 정체성(을 위장한 정당성)을 정초하려는 데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아쉽게도 촛불의 역사적 위대성을 사후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있을지언정, 이들의 희망과는 달리 또 다른 촛불, 그리고 성공하는 촛불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진보파 일각에서는 촛불의 중산층 중심성과 스펙터클에 대한 매혹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며 계급적 이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접근이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흐름은 상대적으로 소수인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도 실증 연구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비평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는 현재 촛불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수많은 논쟁들은 대부분 실증이 부재한 해석의 향연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실증주의자가 아니며, 통계만을 이용한 연구에 대해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실증도 없는 논쟁은 소모적인 주관의 나열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의 문제의 보도는 그야말로 로동신문과 별반 수준 차이가 없다고 일축할 수 있겠지만, 이에 대한 대응이 촛불시위의 객관적 실재를 그려내려는 노력보다는, 선험적으로 상정된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한 채색하기, 또한 조선일보의 보도에 대한 단편적 반박에 그치는 것 역시 논의의 발전과 촛불에 대한 생산적 고찰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현재까지 나와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촛불시위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고 있다. 다만 논의에 앞서 일러두어야 할 점은, 현재까지 촛불시위의 전체상에 접근할 수 있을만한 신뢰도 있는 자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이 글이 촛불시위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을 종결시키기에는 그 함량이 매우 미달된다고 할 수 있으며, 촛불시위를 추동한 이념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의 목적은 구체적 대상 없는 해석의 향연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이자, 실체적 진실에 대한 관심의 환기이다.
그렇다면 우선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촛불집회가 거의 끝난 2008년 8월 4일과 5일, 양일간 전국 19세 이상 1,000명 의 성인남녀를 무작위 추출하여 전화로 면접한 조사 결과를 이용하여 서강대학교 이갑윤 교수가 행한 연구결과를 보도록 하자.
출처: 이갑윤(2010), 103
표를 간략히 보았을 때 촛불시위 직접 참여에 대해서는 연령이 낮을수록 긍정적 반응을 보였으며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긍정적 반응을 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존 정당에 대한 지지율과 출신 지역, 그리고 정보 획득원 역시 촛불시위에 대한 태도와 높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인터넷 괴담' 에 의해 선동된 대중이라는 보수진영의 해석을 정당화해줌과 동시에, 중산층 화이트칼라 중심의 시위라는 진보진영의 해석 역시 정당화 해준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피상적 결과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변수통제를 통해 간접효과와 허위효과 등을 가려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독립변수들과 촛불시위에 대한 태도라는 종속변수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다변량(multi-variate) 분석을 행한 결과를 보도록 하자. 분석은 위의 자료를 이용한 다단계 다중회귀분석을 통해 이루어졌다.
출처: 이갑윤(2010), 105
흥미로운 점은 인구, 사회학적 변수만을 포함하고 있는 1단계 분석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변수는 출신지역, 연령, 성별의 순서라는 점이며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은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특히 출신지역과 성별 변수는 여타 변수를 모두 포함한 3단계 분석에서도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따라서 '촛불소녀' 로 대변되는, 여성의 참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던 진보진영의 해석은 상당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정향이라는 변수를 추가한 2단계 분석에서는 한나라당 지지여부, 진보정당 지지여부, 정치이념, 민주당 지지여부의 순으로 결과가 나타나는데, 3단계 분석에서는 정치이념과 진보정당 지지여부만이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기존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는 정당 자체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정당 지지로 표출되는, 일종의 선택지와 같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사회균열을 정의하지 못하는 리더십 없는 포괄정당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인데, 이런 점에서 촛불시위 당시 민주당 정치인들이 촛불로부터 외면 당한 것이 어느정도 설명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변수들을 포함시킨 3단계 모형에 대한 분석인데, 3단계 분석에서 촛불시위 참가여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변수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이며, 그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직무수행 평가이다. 이는 촛불시위를 광우병 괴담에 의해 선동된 대중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며 대선불복 세력의 반정부 운동으로 취급한 보수진영의 해석을 어느정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는 먹거리 문제라는 생활정치를 강조하며 이명박 정부의 잡음 많았던 협상절차를 질타한 민주당 계열 지식인들의 해석 역시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양자는 상이한 가치판단으로 인해 표현만 다를뿐, 실질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같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3단계 분석에서는 <표1> 에서 나타나는 인터넷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즉, 이는 인터넷을 통해 광우병 괴담-물론 보수적 해석에 의하면 이를 배포하는 주체는 대선불복 세력일 것이다- 혹은 광우병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대중에 의한 집합행동으로서의 촛불시위라는 구체적 메커니즘과는 부합하지 않는 결과이다.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출처: 이갑윤(2010), 109
위의 표는 앞서 분석과 마찬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에 미치는 변수들의 영향력을 나타낸 것이다. 인구․ 사회학적 변수로는 남성이 여성보다, 연령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가 적은 반면, 출신 지역으로는 호남인이 기타지역인보다 먹을 의사가 적게 나타나고 있다. 또 진보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이 보수적인 이념을 가진 사람보다,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당 지지자들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가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기타 정치적 정향과 태도 중에는 미국과의 정서적 거리가 먼 사람이 가까운 사람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무수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보다, 정부를 민주적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민주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가 적게 나타났고, 인터넷이나 TV로부터 정보를 습득하는 정도에 대한 변수는 영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촛불시위에 대한 참가여부와는 달리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진보정당 지지여부보다 민주당 지지여부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생활정치를 강조한 민주당 계열 지식인들의 분석이 옳았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행동보다는 개인적 거부를 선택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경향을 방증해주고 있다(물론 이는 긴스버그와 크랜슨이 Downsizing Democracy 에서 지적하였다시피 대중 민주주의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상당히 시장주의적인 행동 방식이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에 인터넷과 TV가 미친 영향은 매우 적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PD 수첩과 '아고라' 의 괴담을 공격한 보수진영의 해석이 틀렸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궁극적으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태도가 기존의 정치균열을 따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직무평가와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의사가 가장 높은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따라서 촛불시위에 대한 논쟁은 '광우병 괴담' 보다는 거버넌스의 문제를 초점으로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갑윤의 연구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진 실증적 연구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촛불시위의 대표성을 세세하게 포착하고 있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다음으로 살펴볼 연구결과는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의 연구이다. 조기숙 교수의 연구는 세 개의 설문조사자료를 분석한다. 첫 번째 자료는 이화여대 조기숙, 서강대 이현우 두 교수가 공동으로 6월 6일 하루 종일 실시한 촛불집회 참가자 설문조사결과이다. 총 표본은 1300 여개로 표본오차는 95% 신뢰구간에서 ±2.7%이다. 두 번째 자료는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와 이현우교수가 6월 6일과 동일한 설문지를 사용하여 7월 17일 청계천의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다. 표본선정과 설문조사 방법은 6월 조사와 동일하게 이루어졌으며 총 표본은 820개로 표본오차는 95% 신뢰구간에서 ±3.5%이다. 세 번째 자료는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와 내일신문이 공동으로 8월 4일과 5일 양일간 제주도를 포함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촛불집회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이 설문은 전화로 이루어졌기에 직접 설문에서 사용된 긴 설문지를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 설문은 6월 6일의 설문조사 문항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고, 일부 다른 문항이 추가되기도 했다. 총 표본은 1000명으로 표본오차는 95% 신뢰구간에서 ±3.2%이다.
출처: 조기숙(2009), 134
출처: 조기숙 · 박혜윤(2008), 254
조기숙 교수가 정리한 위의 표는 서울의 촛불시위 참여자가 일반 시민에 비해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으며 압도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만 이 표에서 강경진압으로 인한 참여자들의 이념적 변화 자체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참여자 자체가 교체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며, 집단 전체의 결과로 개개인들의 이념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전형적인 생태학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구체적인 직업별 분포 및 이념성향을 보기로 하자.
출처: 조기숙 · 박혜윤(2008), 253
출처: 조기숙(2009), 135
이 표에서는 화이트칼라의 일관된 진보성이 확인되고 있으며, 자영업자와 주부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임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학생층은 6월에 비해 7월의 조사결과에서 훨씬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이는 강경진압이 시작되며 고등학생들이 뚜렷한 이념을 지닌 대학생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무직/기타의 상당한 진보성인데, 7월 들어서는 표준편차도 적으며 가장 급진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조기숙 교수는 노무현 추종자로서의 정체성 때문인지 한국진보의 기수는 수도권 화이트칼라라는 것만을 주장하고 있지만, 무직/기타 계층에 대한 해석 역시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기숙 교수의 연구는 앞서 살펴본 이갑윤 교수의 연구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전국을 표본집단으로 하여 이루어진 조사와 서울의 촛불시위 현장을 표본집단으로 하여 이루어진 조사의 차이로 간주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인다(조사의 신뢰도 면에서는 오히려 응답률이 높은 대면 설문 방식을 사용한 조기숙 교수 쪽이 높을 것이다). 서울의 촛불시위는 전국적 분포와는 달리 전형적인 중산층 고학력 운동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시위에 참여한 저소득 계층의 진보성과 낮은 참여비율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운동에 참여할 여유가 없었다는 점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운동을 통한 정치의 중산층 편향성을 강조한 샤츠슈나이더와 최장집 교수의 지적은 설득력을 얻으며, 이와 반대로 20대의 높은 참여비율에서 20대의 '낮은 정치의식' 을 질타하며 10대를 찬양한 386을 위시한 세대론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주요 정책에 대한 촛불시위 참여자들의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출처: 조기숙(2009), 137
6월 6일 설문조사에서 이념과 가장 높은 관계를 보인 쟁점은 북한이 화해와 공존의 대상인지에 대한 인식(ρ=.2646)과‘경제성장보다는 양극화해결’(ρ=.263)이었다. 그 다음으로 이념과 관련을 맺는 쟁점은 공기업 민영화 (ρ=.187), 학교 자율화(ρ=.187), 일본의 과거사(ρ=.161), 이명박 정부의 민주화 평가(ρ=.147) 등이었다. 비교적 관련이 작게 나타난 쟁점은 4대강 유역 정비(ρ=.112)와 대운하(ρ=.121)였다. 7월 17일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념과 관련이 있는 촛불집회 참여자들의 정책적 입장은 6월 조사와 상당히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념과 가장 높은 관계를 보인 쟁점은 북한이 화해와 공존의 대상인지에 대한 태도(ρ=.371)였고 그 다음이‘경제성장보다는 양극화해결’(ρ=.255)이었다. 그 다음으로 이념과 관련을 맺는 쟁점은 이명박 정부의 민주화 평가(ρ=.173), 학교 자율화(ρ=.171), 공기업 민영화 (ρ=.159), 일본의 과거사(ρ=.157), 대운하(ρ=.133) 등이었다. 비교적 관련이 작게 나타난 쟁점은 4대강 유역 정비(ρ=.065)였다.
정책에 대한 입장이 몇 개의 이념적 차원을 구성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요인분석을 실시하을때 6월과 7월 모두 1개의 차원에서 모든 정책에 대한 태도가 감지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촛불집회 참여자들이 각 정책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견지할 정도로 이념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북한에 대한 태도의 관련성이 약간 낮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쟁점이 한 차원으로 집약된다. 이는 이념이 기존의 북한관련 차원 외에 다른 차원에서 일관성 있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은 괴담에 의해 선동되는 '우매한' 존재가 아니라 상당히 일관적인 이념을 지니고 있는 교육받은 주체들이라는 점이며, 이미 이명박 정부와는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 주체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조기숙 교수는 잉글하트의 물질적-탈물질적(post-materialist) 가치라는 축을 차용하여 촛불시위 참여자들의 심층적 멘탈리티를 분석하고 있다.
출처: 조기숙 · 박혜윤(2008), 255-256
우선, 남성과 여성의 개인주의-집단주의 지수와 탈물질주의-물질주의 지수 평균을 비교한 결과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연령별 문화적 차이를 살펴보면 10대가 현저히 낮은 개인주의 평균 지수를 보였고, 그 다음은 50대였으며, 30대와 40대가 가장 높은 개인주의 지수를 보였다. 이는 행동의 자율성이 극도로 낮으며,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10대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탈물질주의 문화의 경우, 20대에서 평균 지수가 가장 낮았고 50대 이상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그 다음으로 40대가 높은 탈물질주의 평균 점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일반국민을 대표하기보다는 특별한 표본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일반 국민의 경우, 유럽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20대를 제외하고는) 연령과 탈물질주의 문화의 정도는 반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고연령의 집회 참가자들은 같은 연령대 중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참가했기 때문에 연령이 높을수록 인권이나 자유 등의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육수준에 따른 문화적 차이도 발견되는데, 개인주의 성향의 경우, 대재 이상이 가장 높은 개인주의 지수를 보였고 고졸, 중졸 이하로 갈수록 현저히 낮은 개인주의 지수를 나타냈다. 이러한 차이는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하다. 탈물질주의 가치관의 경우는 학력별 집단 간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학력이 낮은 10대들이 높은 탈물질주의 성향을 보이는데 비해, 20대 대학생의 높은 물질주의 성향이 30, 40대 대재 이상자들의 탈물질주의 성향을 상쇄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소득의 경우, 개인주의 지수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탈물질주의 지수는 100만원대에서 200만원 사이의 월 평균 소득 가구가 가장 높은 평균 점수를 보였고 고소득층인 500만원 이상 소득 가구의 경우 가장 낮은 탈물질주의 평균 점수를 나타냈다. 탈물질주의자가 되기 위한 소득수준은 생존(survival)에 어려움이 없는 정도이지 그 이상이 된다고 해서 문화와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잉글하트의 설명이 우리나라에도 해당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갑윤 교수의 연구는 촛불시위 참여자의 이념성향에 대해 기존의 정치균열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균열의 등장을 말하는 조기숙 교수의 연구를 논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양자의 설명은 꼭 배치되는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전국적인 범진보진영의 분포는 분명 기존 정치균열에 의해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 내부의 지역적 분포는 또 다른 이념적 균열에 의해 규정된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예컨대 통계상으로는 봉건적이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역의 의식과 진보적이면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서울의 의식이 같은 민주당 지지로 카운트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노동' 이 배제되고 협애한 이념적 선택지만을 가지고 있는 한국 정치의 구조 내에서 물질적-탈물질적 균열이 꼭 기존의 정치균열과 배치될 필요는 없다. 즉, 높은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곧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대로 이어지며, 이는 이명박 정부의 반대항으로 연결되기에 결과론적으로는 양자가 충분히 겹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갑윤 교수의 연구가 탈물질주의적 가치에 대한 문항이 배제된 설문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더 단순히 양자가 배치되는 요소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다만 조기숙 교수의 연구에 정당 지지도별 상관관계 분석이 곁들여졌다면 훨씬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예컨대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극단적인 개인주의-탈물질주의로 인해 전체 값 자체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특히 이는 대부분의 진보신당 지지자가 수도권에 밀집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국적 조사결과와 서울 조사결과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요긴한 변수로 쓰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총체적 상황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기괴한 방식의 질적 연구방법(?)을 통해 전체적 그림을 왜곡하고 있는 이들에 비해 비록 불완전하지만 어느정도 전체적인 상황의 개략적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이갑윤 교수와 조기숙 교수의 연구결과는 많은 해석지점들을 지니고 있다. 이 자료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점은,
촛불은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하여 상당히 체계적인 정치적 반대의식을 지니고 있는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었으며, 보수진영의 해석과는 달리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태도에 있어 인터넷과 기존 언론을 통한 '괴담' 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진보진영의 해석과도 달리 실제 촛불시위에는 대학생이 상당수 참여하였으며, 국민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기에는 뚜렷하게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위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자료들을 통해서 촛불시위를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향후 집합행동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균열이 미국산 쇠고기 섭취 여부와 같은 미시적 문제에까지 침투하는 메커니즘과, 기존의 정치균열과 탈물질적 정치균열이 접합하는 지점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할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점은, 양적 연구방법과 질적 연구방법이 함께 갈 때만이 사회의 온전한 모습을 진실에 좀 더 가깝게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노력 부족으로 인해 양적 연구결과만을 다루었으나, 추후 좀 더 구체적이고 좋은 분석을 위해서는 기존의 질적 연구결과들 역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갑윤, "촛불집회 참여자의 인구ㆍ사회학적 특성 및 정치적 정향과 태도", 한국정당학회, 한국정당학회보 9(1), 2010.2, pp. 95~120
조기숙 · 박혜윤, "광장의 정치와 문화적 충돌", 한국정치학회, 한국정치학회보 42(4), 2008.12, pp. 243~268
조기숙, "2008 촛불집회 참여자의 이념적 정향", 한국정치학회, 한국정치학회보 43(3), 2009.9, pp. 12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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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스트를 위한 요약.
1. 촛불집회를 지지하는 이들의 성격과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인 계층의 성격은 비슷합니다.
저연령-고학력-고소득-호남-민주,진보정당지지. 거의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이지요.
2. 이 중 촛불집회에 참여하게 되는 원인으로는 출신지역, 연령, 성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교육수준과 소득은 그 영향이 적습니다. 특히 촛불집회 참가여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은 미국 쇠고기를 먹을 의사이며 두번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직무수행 평가입니다.
3. 미국 쇠고기를 먹을 의사를 결정하는데 TV,나 인터넷의 영향력은 매우 적었습니다. 이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정당지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여부였습니다. 즉 광우병 괴담에 의한 선동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정치적 균열에 따른 반대파의 의사표현, 본문의 표현을 따르자면 거버넌스의 문제였습니다.
4. 서울의 촛불 시민과 일반 국민을 비교하면 촛불 시민들은 정치적 관심도가 매우 높고 이념적으로는 진보성향이고 고소득, 고학력, 저연령인 편이고 화이트 칼라와 학생의 비율이 높습니다. 자영업자와 주부가 역시 가장 보수적이구요. 그리고 20대의 참여율은 무척 높았고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질타한 20대의 낮은 정치의식은 설득력이 적습니다.
5. 이들이 여러 정책에 보이는 태도 역시 외교, 경제, 교육 전반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고수합니다. 즉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은 선동된 존재라기 보다는 이미 현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지닌 주체들입니다.
완전요약.
"촛불은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하여 상당히 체계적인 정치적 반대의식을 지니고 있는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었으며, 보수진영의 해석과는 달리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태도에 있어 인터넷과 기존 언론을 통한 '괴담' 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진보진영의 해석과도 달리 실제 촛불시위에는 대학생이 상당수 참여하였으며, 국민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기에는 뚜렷하게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위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래에 나온 2005년의 촛불집회의 구성원들을 같은 방식으로 분석하면 정확히 본문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결국 정치의 문제고 정부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의 시위지요. 쓰고나니 너무 당연한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