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쿠고와 판소리
<타이거 앤 드래곤>(= 타이도라)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쿠도 칸쿠로의 천재성과 일본 쟈니스 내 두 명의 재간꾼 나가세 토모야와 오카다 준이치의 매력을 볼 수 있는데다 무엇보다 일본문화인 ‘라쿠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드라마입니다. 라쿠고는 일인 만담극이라고 해야 하나요? 한명의 화자가 무릎꿇고 앉아 단하나의 소품인 부채만을 이용하여 재치있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일본 전통문화입니다.
조선시대 후기,그러니까 영조시대부터 정조시대까지의 한양의 거리도 이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서울 명문인 노론 가문들의 자제들은 청나라 문화에 노출이 많이 되었는데요, 그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만큼 청나라 사신단으로 다녀올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격인 인물이 김창업, 그는 김수항의 아들로 안동김씨 가문의 핵심인물입니다. 조선 숙종때 청나라를 다녀온 뒤 쓴 여행기인 <노가재 연행일기>는 이후 노론 중심의 연행기의 시작격인 책입니다. 역시나 자신이 사신단의 중심이 아니라 형인 김창집의 자제군관으로 다녀온 것인데, 이것은 긴 여행을 돌볼 가족을 일종의 비서신분으로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 만든 직책입니다. 이 직책은 김창업 이후로는 북행을 꿈꾸던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견문을 넓히는 기회로 각광을 받아 북학파의 대부분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베이징을 비롯한 청나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명나라에 다녀온 여행기는 천자의 나라를 다녀온 기록이라 하여 '조천록'이라 부르고, 반면에 청나라 여행기는 '연행록 또는 연행일기',혹은 '열하일기'처럼 도시를 중심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도 중국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시문화를 주도한 북학파를 중심으로 중국풍이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문학적으로는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중국 통속소설들이 들어와 이것을 팔고 사는 서점이 증가했으며, 길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고 돈을 버는 직업도 생겼습니다. 문체에서도 사대부풍의 늘어지는 미사여구가 가득 들어가기 보다는 저잣거리 사람들의 말투를 빼닮은 빠르고 간결한 언어로 구사된 박지원의 글들이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인간 내면의 본능을 중시하는 당나라 문화와 본능을 초월한 인간영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송나라 문화의 갈등은 단순히 호기심의 문제를 넘어 송나라 유학인 신유학(주자학 혹은 성리학)과 이전의 유학(훈고학, 한학)등의 복고풍 열풍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송나라 이래 성리학의 허례허식화 되어가는 ‘가례’와 탁상공론적 우주론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실용성과 현실적용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학의 도입으로 고증을 철저히 하여 증명되지 않은 주장들을 폐기하려는 고증학적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주나라 시절의 제도인 ‘주례’의 도입을 모색합니다.(주례는 성문법적이고 중앙집권적이어서 가례와 대비됩니다. 가례는 관습법적이고 지방자치적입니다. 굳이 도식화하자면...)
이런 분위기는 서울의 서민들을 자극하기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짓눌려왔던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였는데요, 돈깨나 있는 중인층을 중심으로는 ‘벽’이라고 불리는 ‘수집열풍’이 불었고, 그렇지 못한 서민들은 저잣거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책읽어주는 남자’를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성리학적 품격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이 새로운 문화는 당연히 양반사대부들에게 위협이었습니다. 안빈낙도를 설파함으로써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수공업과 상업을 천대시하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유지해온 그들로서는 이것을 무너뜨릴 이 불온한 사상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 것입니다.
중국의 서적들은 이적표현물이 되었고 그것을 소지한 죄로 박지원의 친구 이희천은 저잣거리에 목이 걸렸습니다. 박지원의 책은 금서가 되었으며, 박제가는 '당나라병에 걸린 괴물'이라는 의미로 '당괴'로 지탄받고 정치적으로 낙마하는 문체반정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시중에 성업중이던 책방에도 불온서적들은 음지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책읽어주는 남자도 그 이야기를 듣기위해 옹기종기 모여앉았던 도시사람들도 새로운 컨텐츠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창작품들이 탄생하였고, 전문 이야기꾼도 등장하고 이러다보니 이것이 차츰 판소리 형태의 공연으로 변모하지 않았을까...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역시나, 이 부분은 제 연구가 미진하다보니....)
그런점에서 라쿠고의 탄생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정치에는 서민들의 참여를 애초부터 차단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할말이 많았던 사람들은 라쿠고 대본을 쓰고, 서민들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라쿠고와 판소리의 닮은 점이라면, 둘다 부채와 이야기꾼(그리고 딸린 북잡이)외에는 소품도 무대도 그 어떤 것에도 대규모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참여가 허락되지 않은 사회에 대해 이보다 날카로운 풍자가 있을까요?
2. 만쥬가 무서워
<타이도라>는 라쿠고의 이야기를 라쿠고가(라쿠고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야쿠자의 입을 통해 에도시대 이야기를 현실의 이야기로 절묘하게 바꿔 서술합니다. 말그대로 ‘절묘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까닭에 쿠도칸은 천재다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기술을 보여주는데 이 드라마의 매력이 있습니다. 송대관의 ‘유행가’가사처럼 저잣거리 서민들의 애환을 캐릭터로 풀어내는 쿠도칸 세계의 매력도 잘 볼 수 있습니다만.
타이도라에 나온 라쿠고 중에는 ‘만쥬가 무서워’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 귀신이라거나 호랑이라거나 등등을 말할 때 혼자 그런게 뭐가 무섭냐고 비웃는 사람이 있었죠. 그러자 은근히 배알이 꼴린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그럼 귀신이나 사나운 짐승, 혹은 힘센 관리 따위가 아니면 뭐가 무섭냐고 묻자 그 사람은 대답합니다.
"만쥬가 무서워"
“만쥬?”
“응, 만쥬, 아아악, 말만들어도 무서워.”
만쥬가 무섭다는 사람은 두 귀를 감싸쥐고 펄쩍 펄쩍 뜁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흐릅니다. 평소 잘난체 해대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그를 놀려먹을 기회가 온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골탕 먹일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고, 만쥬를 잔뜩 넣어놓은 방안으로 그 사람을 유인해 집어넣습니다. 예상대로 방안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습니다.
“으아악, 만쥬가 무서워, 악 따라오지 마. 으아악!”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발을 구르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습을 도무지 보지 않을 수가 없어서 빠꼼하게 문을 열고 안들 들여다 봤습니다. 과연, 방안을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그 사람은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로는 무섭다 하고, 눈으로는 눈물까지 펑펑 흘리고 있었지만, 손은 무섭게 만쥬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방안에 있던 만쥬를 다 먹어 치운 그 사람은 트림을 꺼억하고 나서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들릴만큼의 목소리로 점잖게 말합니다.
“커억....이젠 오차가 무섭네.”
3. 우파의 효용
미국의 정치에 대해 말하기를 가난한 자수성가형, 혹은 의지력으로 극복한 인물들은 공화당을, 반대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랑과 관용을 배워온 사람들은 민주당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뭐,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공감이 갑니다.
미국 드라마 <굿 와이프>에는 3대째 민주당집안 출신으로서 잘나가는 로펌 대표인 어느 여성 변호사가 나옵니다. 물론 애완견과 살고 있는 독신녀이므로 그녀가 <굿 와이프>의 주인공은 아닙니다만, 저는 오로지 크리스틴 바란스키가 연기하는 다이앤 록하드를 보기 위해 이 드라마를 봅니다. 현재 미국의 정치를 민선 검사장의 권력과 암투, 그리고 정치성향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이 되는 변호사와 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이앤 록하드는 재정위기에 처한 로펌과 민주당으로서의 정치적 자부심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좋은 집안, 넘치는 재능, 그리고 사회적 성공을 손아귀에 쥔 관용넘치는 민주당 지지자인 다이앤 록하드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변호사로서 가능할까요? (변호사는 정의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의뢰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로 이미 그 답을 내려놓고 시작하는 드라마라서 더욱 흥미롭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입니다. 게다가 기업가출신. 이 두가지가 합치면 배타성과 효율성을 공집합으로 하는 인물이 나올 수도 있고, 반대로 효율성과 배타성을 합집합으로 하는 인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임기의 반을 넘어가고 있는 지금까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난 10년간 우리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최대의 화두는 ‘집값’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의 부모님은 목동에 집을 샀고, 순식간에 몇 배의 시세차익을 거두던 지난 참여정부시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집값을 못 잡으면 이 정부는 망해.”
그 분은 대통령 선거시절, 문국현 열혈지지자였던 자신의 자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양도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분은 원희룡 의원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귀티나게 생겼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 거지.”
최근 매우 인상적인 기사가 나왔습니다.
‘노무현이 못잡은 집값, 이명박이 잡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노무현 정부시절 올랐던 집값은 최근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전문가들의 진단에 따르면, 2013년까지는 소득 감소로 인해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하향 안정세, 그 이후는 공급과잉과 인구변화에 의해 장기 하락세로 접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과 미국의 예를 생각해보면, 현재의 하향 안정세(?)는 폭락을 막는 완충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서서히 서서히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것이지요.한계기업과 한계가계부터 조금씩 부동산을 던질 것입니다. 이유는 바로 ‘이명박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반대로 지금이 ‘노무현 정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적어도 투매가 벌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전세제도란 것이 있어서, 전세값에다가 은행빚을 얹으면 집을 살 수 있는 구조거든요. 월세를 집주인에게 바치는 것과 은행에 바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소유권이 다르니까요. 집을 버리고 전세로 가는 것은 어찌보면 경제적으로는 그리 아쉬울 것이 없는 결정이기도 하니까요. 미국처럼 집을 차압당하고, 길거리로 내쫓길 일은 없지요.
그런 점에서 지금이 ‘이명박 정부’인 것은 다행입니다. 설령 투매가 벌어지고,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한들 그 누가 정부 탓을 할까요? ‘이명박 정부’인데요.
어쩌면 영리한 국민들이라면 지금쯤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크억....이젠 오차가 필요해.”
새는 두 날개로 날아가야 하듯이 좌파와 우파는 필요합니다. 우파의 효용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기 등장한 드라마에 대해서는 기억에 의존해서 썼기 때문에, 내용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