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웬 피규어냐고 할지 모르지만 질문게시판에 올린 글이나 지난 잡담 등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보다 상당히 늦은 시기와 늦은 나이에 피규어에 상당히 맛들려 있습니다. 몇 달 되지 않았는데 피규어 구매금액은 이미 백만원 단위를 훌쩍 넘어선 상태라 지난 잡담에도 위험하다고 썼지요. 집이 좁아 전시공간이 별로 없으니 리얼리티 높은 피규어보다는 넨도로이드 계열의 피규어를 주로 사고, 그런 피규어를 사는 데에 여유 자금을 많이 쏟아붓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사겠다고 작정하거나, 나중엔 몰라도 지금 당장은 사지 않으려고 하는 피규어들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 취향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현재 시점에서 제가 '안 사겠다'는 생각을 가진 피규어 유형을 몇 개 적어봅니다. 단, 유형 운운했지만 이 기준들은 순전히 제가 인지하기 편한 대로 만들어진 기준이니 이 분야에서 넓은 식견을 가진 분들이 채택하는 객관적인 유형 구분과 많이 다르거나 그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내가 경험하지 않은 콘텐츠의 피규어는 원칙적으로 안 산다.
물론 제가 하지 않았던 게임이나 보지 않았던 애니메이션의 피규어 중에도 멋있는 것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1500개 한정 스타크래프트 II 마린스태츄를 제작한 사이드쇼의 정밀한 스태츄들 같은 경우는 정말 멋있고 그 외에도 정말 멋있는 물건들이 많지요.
하지만 모양에 끌려서 사게 될 경우 더 좋은 물건이 나오면 애착심이 없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박스에 쌓아놓고 소장할 생각으로 무언가를 사는 게 아니라, 일단 사용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삽니다. 피규어는 뜯어서 전시를 하고, CD는 뜯어서 한 번이라도 듣고, 게임도 뜯어서 한 번이라도 깔아서 해 봅니다. (단, 두개 이상 살 때에는 소장용을 따로 둘 때도 있죠.) 그래서 저는 미개봉 상품도 거의 없고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이유로 박스도 대부분 버려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모양에 혹했을 뿐 애착심이 별로 없는 녀석들이 늘어나서 공간만 차지하게 되면 저에게는 좋을 게 없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다 사면 제 여유자금은 1000만원이 있어도 부족할 겁니다.(농담이 아니라 각 매장과 일본 대행사이트를 순례하며 지금 이 순간 조금이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피규어를 꼽아서 가격을 계산해 보니 정말로 1000만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거기에 설령 그만한 돈이 있어서 제가 사고 싶은 것을 다 산다 해도 집에 둘 데도 없지요.
● 19세 이상용 / 노출도 높은 피규어는 구입을 피한다.
저는 피규어를 제 회사 책상에도 몇개 갖다놓고 나머지는 집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뭐 집에서야 노출도 높은 피규어를 갖다놓는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마는 회사에서는 상당히 곤란하죠. 무엇보다, 저는 의상 탈착을 통해 누드로 변하는 피규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규어 노출도의 상한선 예시를 굳이 든다면 '블랙록슈터 캐논 버전 이상은 곤란하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제가 블랙록슈터 블레이드 버전에 주문을 넣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죠.
● 레진 킷은 구입하지 않는다.
돼지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값진 물건이기는 하나 누구에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그 물건은 무용지물도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피규어에 있어서는 레진 킷 같은 것들이 저에게 그런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때 건프라를 조금 구입해서 했었는데(지금은 다 없어지고 미완성 건프라만 두 개 침대 밑에서 썩고 있는 정도밖에 안 되지만) 한때 건프라를 조금 구입해서 조립했을 때에도 저는 채색은 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더구나 엄연히 본업이 있고 본업 외에 글쟁이로서도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인데 레진 킷을 조립해서 채색을 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지요.
물론 가능성을 닫아두는 것은 아닙니다. 하려고 헤딩하다 보면 못 할 것이야 없을 테고, 제가 피규어에 늦게 발을 들인 것처럼 나중엔 레진 킷 같은 데에도 손을 뻗칠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여건도 안 됩니다.
● 케이온!/럭키스타 계열 구입 금지
원칙은 두 개지만 취지가 같으니 묶어서 말하자면, 저는 케이온! 이나 럭키스타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재미있게 보았고 지금도 가끔 머리 식힐 겸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특정 애니메이션 및 게임의 제품들은 하나씩 사기 시작하면 다른 파생상품까지 같이 사야 할 것 같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거죠. 실제로 지금, 저는 보컬로이드 계열 피규어에 상당한 돈을 쏟아부은데다가 넨도로이드가 다른 친구들을 부르는 통에 재정 상태가 거의 파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케이온!과 럭키스타까지 들어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나중엔 몰라도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야 합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원칙은 이렇습니다. 요 몇 달 동안 제가 사려고 눈독을 들인 피규어들 중 눈에 띄는 것들을 일본 구매대행 사이트까지 뒤져서 구입한 상황이라(어떤 건 가격 오버되어서 관세까지 냈지요 아마) 당장에 살 것은 아직 발매시기 미정인 블랙록슈터의 애니메이션 버전이나 넨도로이드의 러브플러스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지요. 다만 예약상품이 많아 6, 7, 8월에 무더기로 택배가 날아올 것 같고, 재정상태는 악화되었고, 집에 마련된 전시 공간은 지금 앞으로 날아올 예정인 피규어를 수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책을 사고, 음반을 사고, 게임을 사고, 즐기고, 글을 쓰는 재미에 새로운 재미 요소로 피규어가 추가된 지금의 상황. 관심도 돈도 쓸 만큼 써 봤으니 이제는 피규어라는 취미를 다른 취미들과 조화시키며 제 생활 속에 녹여내는 일이 남은 것 같네요.
- The xian -
P.S. 요즘 어머님이 수술을 받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통에 대부분의 가사일을 제가 다 하는데, 어제는 아침에 흰빨래 세탁기 돌려놓고 출근 / 퇴근 후 헹굼 및 탈수하고 넌 다음 색깔빨래 돌리기 / 세탁기 도는 동안 설거지 및 집안정리 / 색깔빨래 널기 까지 하니까 새벽 한 시가 되더군요. 게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피폐해지고 있는 반면 그간 머리로만 느꼈던 가사일의 위대함을 새삼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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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홍대 볼크스 코리아에서 시안님을 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군요.
아는 분이 국내에서 손 꼽는 음반컬렉터+피규어 중수 정도의 컬렉터이신데 열심히 모으다보니 꿈에서 음반, 피규어들이 출연해서 교감을 나눈다고 합니다. 수집량이 어느정도 늘어가면 거기에 깔려죽는 꿈도 꾼다고 하더군요.
시안님도 이런 단계이신가요? ^^;
피규어도 피규어지만 프라모델도 하나하나 사기 시작하면 끝도 없지요.
제가 코토부키야의 슈퍼로봇대전 오리지날 시리즈를 모으는 걸 시작한게 아마 R-1을 처음 샀을때였으니까..
지금 방안을 둘러보니
페어리온S, 페어리온G, 빌트랩터, R-1, R-2, 알트아이젠, 알트아이젠 리제, 라인 바이스리터, 카이 전용 게슈펜스트... 등등이 제 책꽂이를 차지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