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몇년 뒤,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이 할건 아무것도 없다는걸 깨달았다.
그래서 대학 1학년때 할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을땐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간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건 그저 내가 할 일을 열심히 하는거라고 생각했기에,
사촌형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을때도 역시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았다.
사촌형이 세상을 뜨고 형수가 재산을 빼돌리려고 하자 그것때문에 싸우던 큰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중환자실에서 의식없이 몸만 부들부들 떨던 큰아버지 모습이 기억난다.
슬픔도 그때뿐이었고 바로 회사로 돌아가서 새벽 3시까지 일을 해야했다.
장꿈 1기 방영 마지막 즈음이었을거다.
얼마후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형도 간암이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걸 알기에 그저 일만 했다. 아니 일밖에 할 수 없었다.
큰형 장례식장에서 약을 안움큼씩 집어먹던 파리한 얼굴의 작은형이 기억났다.
2006년 10월쯤, 여느때처럼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는데 12시쯤에 전화가 왔다.
서울대 다니던 친구가 공무원 시험 2번째 실패후 여행하다 자살한 것이다.
이제 막 30살 된 녀석의 사진에 검은줄이 쳐져있는거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슬픈 감정도 잠시, 그 다음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일하러 나가야 됐다.
몇개월후 작은형이 간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아버지, 큰엄마, 형 둘, 누나 하나... 불과 3년도 안돼서 집안이 풍지박산이 났다.
지금은 이혼한 누나와 큰엄마가 같이 살고있다.
몇년 후
일본에서 취직이 결정되어 기쁜마음으로 비자 서류를 준비하러 한국에 왔을때
고등학교에 들러 졸업증명서를 떼고 (나는 대학 중퇴라 고졸이 최고 학력이다)
교무실에서 1,2,3학년 담임선생님의 안부를 물었다.
1학년 담임선생님 노환으로 돌아가셨고 나이가 젊으셨던 2학년 담임선생님은
간암으로 얼마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일본에 취직해서 입이 찢어지도록 웃던 나는 더이상 웃을수가 없었다.
일본에 온 뒤로 묵묵히 일만했다.
다행히 인정받고 월급도 올라서 부모님께 꾸준히 돈 부쳐드릴 수 있게되었다.
한달전쯤 일본 잡지사에 어렵게 데뷔를 한 친구N이 골든위크 연휴에 놀러오겠다고 했다.
간만에 연락이 된 터라 기쁘고 설레었다. 짧은 휴가지만 여기저기 잘 안내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이틀전에 다른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N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병원에 있다고, 수술은 끝났지만 의식이 없다고 했다.
... 의사는 의식이 언제 돌아올지 장담 못한다고 했다.
전해주는 전화기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 할 말도 없었다.
남은 사람의 슬픔, 다음날 멀쩡하게 일하러 나가야 하는 현실.
그저 먹먹한 하루.
승혁아 제발 일어나라, 내가 준비 다 해놨으니까 넌 몸만 오면 돼.
그동안 바빠서 연락 안한거 정말 미안하다,
와서 니가 좋아하는 오뎅에 따듯한 정종 꼭 한잔 하는거야.
제발 가지 마, 날 남겨두고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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