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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17 10:25
잘봤습니다.
최근에 10년전의 다큐인 역사스페셜에서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는가... 라는 다큐를 봤었는데요. 반란을 일으킨 비담이 왕위승계서열에서 높은 순서였는데, 선덕여왕의 후계로 진덕여왕이 지목되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왕족이지만 조금 멀찍이 떨어진 김춘추와 가야계의 인물이었던 김유신은 서로 연합, 전통 귀족들에게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왕을 지지했고, 비담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서 권력을 쥐게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7월인가요?)에 방영된 한국의 신화였나? 하는 다큐에서 박혁거세 신화를 언급하더군요. 동북족 민족들의 신화에 공통적인 요소가 박혁거세신화에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국모로서 대대로 국가제사를 지내는데, 모계가 강했다는 평도 있구요. 다른 북방유목민족들에게는 신화로 있는 선녀와 나뭇꾼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는 민화로 있는 것이, 여성이 천상의 존재고 남성이 지상의 존재인 신화를 의도적으로 배척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의 유화나 백제에서의 소서노, 신라에서의 알영등이 국모로서 신성시되었었는데, 남성우위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그리고 제사장의 입지를 좁히기 위해) 불교를 들였다는 이야기도 본 것 같구요... 아... 아는게 없으니 뭔가 두서 없네요...
09/09/17 11:07
네 저도 잘봤습니다.
강의시간에 배운것과 약간 다른것도 있어서 봤던 책을 다시 좀 펼쳐 봐야겠네요. 아무쪼록 다시한 번 생각해 봄으로써 전공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09/09/17 12:29
신라왕계를 보니까 하나 생각나는 주장이 있군요.(어디에서본건지 정확하진 않는데 주장은 대강 기억이 나네요.)
박, 석, 김 계에서 왕이 나오던 초기와 다르게 중기에는 박, 김계에서 왕이 나오다 삼국통일(뭐 그냥 달리 표현할 말은 못찾았네요) 전후로 하여 거의 김씨가 왕을 하지요. 특히 박씨는 그래도 귀족으로 남아있지만, 석씨는 거의 보이지 않고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는데, 불교의 석가모니의 이야기와 연관지어서, 이 불교의 석가모니가 석씨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의견입니다. 석가모니는 출가하기전 왕족이었지요, 그러면 당시 그지역의 왕국을 다스리던 것은 석씨. 또 석가모니를 풀어서 보면 석가 의 모니. 모니는 '어머니' 에남아있는 수장의 의미이다.. (뭐 이건 좀 비약같긴 하지만;) 라는 의견이었습니다. 대강 상상력을 붙여보면, 박석김계 중심이던 초기 신라에서, 박씨와 김씨가 힘을 합해 석씨를 추출해 내었고 석씨는 신라를 떠나서 인도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라는것이죠 (그리고 이런 상상력을 뒷받침하는것이 어느때 왕비인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인도쪽에서 온 공주가 왕비라는 것도 본거 같기도하고;;) 짧은 지식이라 그냥 그 주장만 기억이 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혼자 생각해보았습니다. 위 첨부를 보니 또 한번 생각이 나네요. <a href=http://www.coo2.net/ target=_blank>http://www.coo2.net/ </a> 위 사이트 돌아다니다 들어갔던 블로그에서 본것입니다. 아 지금생각해보니 그 반대였던가; 뭐 암튼 다시 찾으려니 모르겠군요 크크
09/09/17 12:47
Siriuslee님// 우하하.빵 터졌습니다.
이러다가 마씨는 마호메트, 예씨는 예수의 조상이란 말이 나올지도^^ 信主SUNNY님// 재밌네요.모계신앙이라기 보다는, 그리스 신화도 그렇지만 지하세계, 땅의 신,곡식의 신 등으로 표현되는 신들은 '여신'입니다.원래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출발이 처음엔 부업에 불과했던 여자들의 식물채집(과일,풀잎사귀,열매)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농업의 초창기에는 여신이 농사를 돌봐준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신(태양에 의해 식물을 기르고), 땅의 신(흙속에 씨앗을 잉태했다 싹을 나게 하는)이 남신과 여신으로 분화되었습니다. (물론,예전에 제가 고인돌이 사실은 주산업체계가 수렵에서 농업으로 변한 뒤 부업으로 전락하고 그나마도 허탕치기 일쑤가 되어버린 남자들의 과거 좋았던 시절,달을 숭배하던 의식을 답습하던 것이고, 이후 보습의 발견은 농업을 남성의 일로 만들며 여성을 부엌으로 내몰았고,이것이 소위 '신데렐라 이야기'로 반복되어졌고, 이후 남성들이 자신들의 숭배자를 달에서 여성들의 숭배자였던 해로 갈아타게 된다,그래서 해와달의 된 오누이에서 왜, 남자가 달이 되고 여자가 해가 되었는지를 풀 수 있는 수수께끼다...뭐,그런 글을 올린적이 있는데요,이것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09/09/17 13:12
happyend님// 네. '한국의 신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중 3부가 여신에 대해서 였습니다. 대부분의 신화가 여성이 토지의 신으로 나오는 편인데 한국에는 여신이 없다는 것이죠.
이 다큐에서는 우선 웅녀로 시작하는데요. 그 후에도 유화가 갖는 농경사회와의 동질성(물의 신 하백의 딸이라는 점과 버드나무꽃이라는 이름에서)이 언급됩니다. 그외에도 소서노나 알영에 대한 언급도 있고, 삼신할매나 제주도의... 이름기억안나는.... 제주도 창세신화의 여인등등이 나오더군요. 할매는 '할'이 크다는 뜻이어서 노파를 뜻하는게 아니라 큰 여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는 말도 있었구요. 어쨌든 3부의 내용은 한국의 여신들이 고의적으로 배척당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09/09/17 16:01
상당히 긴 글인데 정말 재미있게 봤네요.
근데 과연 철제 농기구가 있었을까요? 철제 농기구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철의 양의 문제일 거 같은데.. 당시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귀한 철로 농기구까지 만들었을 거 같진 않네요.
09/09/17 16:29
信主SUNNY님// 아, 그렇네요. 우리나라 신화가 분서갱유급으로 사라진 것이 합리적인 '유학자'들이 권력을 잡은 조선초기때부터인데요,그래서 당시 신화를 간직한 무속인들은 탄압을 피해 대거 제주도로 이주,제주도가 아직까지도 신화의 땅으로 남게 됩니다.
말씀대로 제주도는 여신관련(여장부라고 해야할 듯 하지만)신화가 많이 있죠.설문대할망 신화라거나...(저도 어렸을적에 듣도보도 못한 묘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잔뜩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아마,그런 것이 여신들이 고의적 배척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sungsik님// 아! 청동기문명과 철기문명의 근본적 차이가,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청동기는 '청동검'으로 시작했고, 철기는 '쇠도끼'로 시작한 것이다라고 단순화할 수 있을정도로요.청동기는 합금자체가 어렵고,그래봐야 약해서 쓸모가 별로 없었지요.게다가 무겁고.그래서 대부분은 '상징물'로만 존재합니다. 제의도구라거나. 그런데 철기는 그 탄생부터 농기구였거든요.처음엔 약해서(주조철기시절)검이 되긴 어렵지만 도끼가 될 수는 있었거든요. 그래서철제농기구는 비교적 쉽게(철이 구리에 비해 훨씬 구하기 쉬운 광물이고,주조과정도 숯가루만 잘 활용하면 합금보다는 쉬운 산화-환원과정일 뿐이거든요)만들었습니다. 후에, 정복전쟁의 시대가 되면서 살상목적으로 철의 기술적 발전을 이뤘는데요(단조철기)이것은 비교적 복잡한 과정을 가진면서 '검'의 신화로 발전했습니다.그래서 서양신화(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만)에서 대장장이 신화는 '도끼'신화이고, 정복군주의 신화는 '검의 신화'-엑스칼리버라거나,주몽이라거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말이 많은 백제의 '칠지도'는 단조기술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에 특별한 유물인데요, 이것은 현재 일본의 '검'제조과정을 보여주는 다큐에 그대로 투영되어서 꽤 재밌더군요.그러니까 검은 강하면 부러지는데요,이것을 무른 쇠(무쇠)와 강한쇠(강철)의 혼합을 100번해주면 무쇠가 탄성이 있어서 검을 강하지만 부러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는 뭐,그런 얘기입니다.칠지도가 그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데요,정교하게 이 혼합물의 결을 만들어내는 그 능력이 '좋은 검'이 되게 한다는거죠. 저는 무기관련해서는 잘 모르고,아는 것은 이정도입니다만.... 결론적으로 철의 양은 걱정이 없었습니다.(일본은 화산국가라 철이 넘치고,우리나라도 생각보다 철광석이 많거든요.아니,철광석자체가 흔한 광석입니다. )
09/09/17 18:04
김씨들의 시조인 김알지가 한무제 때 멸망한 흉노족 국가의 왕자인 김일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두 번 다루었고 저도 김씨라서 자세히 본 기억이 납니다. 김씨라는 성도 금을 숭상하는 흉노족 풍습에 따라 한무제가 하사한 성이라고 합니다. 그가 한무제 때 공을 세워 투후라는 벼슬과 영지를 하사 받았지만 그 후손이 왕망의 난 때 관여를 하여 도망쳐 온 곳이 바로 한반도의 신라라고 하더군요.
경주 김씨 종가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당황해 하시던 어르신들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오랑캐의 후손이라니....라며 얼굴에 써 있었습니다.
09/09/17 19:04
아, 그리고 낙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당신의조각들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어릴적에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낙랑이 고구려 아래에 있었다면, 사실 상 한반도까지가 모두 한의 영토였다고 봐야하는 것인데, 부여나 고구려등의 국가를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백제를 너무나도 쉽게 건국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구요.
대동강 유역이 낙랑이었다고 가정하고 고구려가 후에 힘이 커져서 밀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더라도, 낙랑이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해당 지역의 원주민이 강했다고 판단되지도 않고, 한강유역과 호남지방은 굳이 차지할 이유가 없는 땅이지도 않으니까요.
09/09/17 19:45
결국,낙랑에 대해서는 제가 총대를 매어야 하는가보군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만,저는 '유물이 가르쳐 준 진실'을 외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문헌사적으로는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거든요.특히 고대국가의 특징이 그렇기도 하지만, 낙랑은 고조선이 멸망자체가 외부의 적의 힘보다 내부의 배반자들에 의한 자멸성격이 강했고,그러다보니 위만조선시대이래로 잘먹고 잘살았던 사람들에 의한 '자치지구'적 성격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유물은 너무도 극명하게 대동강유역이 낙랑의 중심지이고,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지란 것을 보여준다는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갈등을 빚어보죠,뭐)
09/09/18 01:28
어이쿠...뭐 별거 없는 저에게 이런 영광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우선 오늘의 발제하신 주제는 저의 무식으로 인해 그냥 배우는 입장에서 지켜보기만 해야할 듯 싶습니다. 신라 왕실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영 관심이 없다보니 그냥 보면 볼수록 새로운 내용 뿐이군요. 글 잘 읽었고, 다른 분들께서 다시금 신라 왕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셨으면 합니다. 일본서기 이야기는 제가 그냥 무식을 대놓고 자랑한 내용인지라...귀염둥이님께서 제대로 지적해주신듯 합니다. 사실 토론이 있은 후에 학교 도서관에서 일본서기에 관한 논문이나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영 괜찮은 내용들이 없더군요. 언제 한번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 도서관에 가서 다시 찾아볼 생각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역시 아쉬워 하시는군요. 모두 말씀하시고, 아시는 대로 사실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은 당나라입니다. 거의 당나라의 힘이 8할을 차지할 정도였죠. 고구려는 몰라도 백제는 거의 당나라의 힘으로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도 있기에 마련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비록 부정적인 면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를 '당나라에 빌붙은 간사한 행위'로만 생각하기에는 그 후의 신라의 나,당 전쟁이 너무 헛된 일이 됩니다. 비록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웅진과 금성에 도독부가 설치되는 것을 막고 자주적인 국가를 다시금 설립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 받을만한 일입니다. 만약 신라가 적어도 원래 당과의 밀약대로 대동강 이남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청천강까지만이라도 진출해서 평양을 손에 넣었다면 이렇게까지 까이진 않았겠죠? 하지만 당시 신라의 지배층은 그럴 의지도 없었고, 계속되는 전쟁에 지칠대로 지쳐있었으니(화랑이니 뭐니 하면서 신라의 무력을 높이려고 역사학계에서 기를 쓰지만, 역시 무력이나 정복은 고구려에 비하면 발바닥 수준입니다.) 후세에서 보기엔 아쉬울 따름입니다. 한 4군의 위치는 역시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도 마찬가지로 낙랑이 대동강 유역에 자리했다는 학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듭니다. 우선 낙랑군의 위치를 보기 이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바로 현도군의 위치입니다. 현도군은 사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나라가 만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 설치한 군입니다. 또한 4군 중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지배했으며 그 힘도 막강했습니다. 낙랑이 우리에게 더 유명한 이유는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이지 가장 강력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후세에는 계속되는 고구려와의 충돌로 인해 낙랑보다 먼저 축출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넓은 지역을 다스려야 했기에 한나라는 현도군에 가장 공을 들였습니다. 그리하여 현도군은 부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만주를 지배할 수 있었죠. 문제는 이런 만주를 지배하던 현도군의 위치입니다. 낙랑의 대동강유역설을 뒷받침하는 한 4군설에서 현도군은 압록강 유역에 있으며 졸본과 국내성 일대를 모두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로라면 북만주에 위치한 부여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고구려가 건국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멀쩡한 한나라 영토 내부에서 약해빠진 신흥국가가 일어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현도군의 위치 역시 지금의 이론대로 암록강 유역이 아닌 요하의 상류 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현도군이 요하 상류로 가게 된다면 낙랑군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벌어집니다. 진번과 임둔이 있긴 하지만 이 두 군은 사실 곁다리에 지나지 않죠. 이는 곧 낙랑군이 한반도 내부에 고립된 형태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이건 영 설득력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낙랑군의 대동강 유역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뭐죠? 굼금하네요.
09/09/18 10:06
후아.....
긴 글을 다 날렸더니, 쓸맘이 다 없어졌습니다. 루크레티아님// 원래는 논리정연한 글이었지만,다시 쓰려니....요점만 간단히 1.현도군의 위치는 변했습니다.고구려족의 저항으로 만주쪽(동가강인가요?암튼 그 유역으로)에 다시 재배치,말씀대로 부여를 비롯한 북방민족을 견제할 완충지로 썼습니다.그러므로 현도군의 위치로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모순이 있습니다. 2.대동강을 중심으로 낙랑군 유물이 상당히 퍼져있습니다.가령,신도시 건설로 발굴하게 된 화성의 경우,기안리 유적에서 낙랑계토기가 발굴된 것을 비롯하여 한강유역의 신도시 건설은 오히려 낙랑군의 영향력을 실감케 해주었습니다. 3.낙랑군의 위치논쟁보다 더 핵심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뒤 생긴 한사군의 설치가 무슨 조선총독부인양 했던 일제의 이데올로기를 격파하는 것이라고 봅니다.그런데 그게 위치로 격파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먼저,위만조선은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정도의 성격밖에 없었습니다. 한반도내에서....그걸 반증하듯,설치된 임번,진둔,현도는 곧 고구려군에게 파괴되었습니다.(어떤 곳은 부임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제주도 하나가 망했다고 나라망한것처럼 설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저,제주도 사람이니 지역감정은 없습니다) 4.이덕일씨를 비롯해 낙랑,고조선의 대륙설을 '일제식민사학의 유산청산'과 맞물려 설파하는 것은 ....유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되고,아시다시피 유물은 북한과 만주에 있으니 우리가 손대기 어렵습니다(만일에,관련 유물과 논문이 북한이나 중국에서 나왔다면 저는 제 의견을 기꺼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겠습니다.) 5.낙랑군이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곳은 무력,직접통치를 기획하다 쫓겨난 것인데 반해 낙랑만은 간접통치였기 때문입니다.즉,위만조선(의 지배계급의 상당수는 위만과 함께 온 중국계)은 한나라의 무력에 무릎을 꿇었고,그래서 한나라가 이지역을 직접,무력통치를 했던 것이 아니라,한나라와 손잡은 위만조선내의 일부세력에 위임통치했다는 것이 가장 컸고요,두번째는 지리적 특성상 바다만 건너면 중국이라 선진문물이 끊임없이 유입되었습니다. 6.이미 평양에서는 낙랑계 고분을 비롯한 일군의 유적들이 발굴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09/09/18 11:53
happyend님// 아 그런 유적들이군요...역시 절대적인 자료의 부족과 동북공정이라는 일련의 왜곡들 때문에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안드로행 열차를 탈 가능성이 높아보이네요. 유물과 유적은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 낙랑군의 반도설을 부정할 근거가 더는 없지만...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한반도에 박혀있던 고조선을 아무리 정복욕이 출중한 한무제라도 일부러 와서 정벌할 만큼 한나라의 사정이 널널하진 않았을 듯 싶은데 말이죠.(게다가 그렇게까지 일부러 와서 고조선을 정벌했다면, 한반도 남부의 국가같지도 않았던 부족들도 모두 정복하거나 복속시키고 갔을텐데...)역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이 상황이 가장 답답한 상황이군요.
09/09/18 12:20
저도 당연히 한사군은 대동강을 비롯, 한반도 내라고 봅니다.
유적과 유물이 이를 증명하고, 당시 삼한은 한사군과의 무역과 교류를 통해서 번성했습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면 한반도 남부의 삼한과 쉽게 교류를 하기도 어렵죠.
09/09/18 13:08
루크레티아님//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한 이유는 땅에 욕심이 있어서는 아니었어요.남정을 끝내고 북벌을 해야 하는데,당시 북방은 흉노족이 강성한 때였지요. 고조선은 한나라에 형식적으로 조공관계를 맺으면서 우수한 씨앗과 가축의 종자를 받아오거나 철제무기(제조법은 비밀이었습니다.한무제가 소금과 철기는 국유화시켰거든요)를 얻어오면서 나름대로 힘을 길렀습니다.그래서 주변의 소국들을 복속시켜 힘을 길렀죠.
그런데 고조선은 무역국가였어요. 중국과의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진국(예전에 말씀드렸듯이 마한)을 비롯한 주변국가의 무역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이후 중개무역에 적극적인 낙랑군이 설치되었을 때 모든 주변국가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으니,마찰이 없었던거죠.낙랑군은 일종의 중개무역기지이자, 첨단산업의 출입구였던 것이죠. 문제는 고조선(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의 독점무역에 반대하여 인구 28만의 예군의 수장 남려가 한나라에 투항하는 등 정세가 불안해지고 있었죠.북벌을 위해 흉노랑 한판 붙을 준비를 한 한무제로서는 이런 고립을 피하기 위해 흉노와 사신을 주고받는 고조선이 눈에 가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흉노정벌전에 고조선을 제압해놔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고,그것이 고조선 멸망의 원인입니다.우거왕으로서는 독점무역권을 뺏기기 싫었겠지만, 낙랑처럼 중개무역으로 전환했다면, 주변 소국의 발전을 통해 언젠가 멸망하였을지는 모르나,조금은 오래버텼을겁니다. 어찌되었든 낙랑군이 설치되자 가장 먼저 이 유물이 퍼진곳이 바다를 통해,남해안과 제주도....가야를 비롯해 진한과 변한이 힘을 기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물론 일본(왜) 또한 이 무역의 수혜자였고요. 그래서 고조선만 멸망시키고,다른 부족은 관심도 없었던 겁니다.(현재,낙랑유적분포지는 전국을 다 포괄한다고 볼 수 있을만큼 광범위합니다) 대륙에 있었던 낙랑군의 유적은,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게 제 추측입니다. 낙랑군은 무역독점권을 폐지함으로써 고조선보다 쉽게 사방으로 영향을 미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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