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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17 09:15:00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두둥!) 도란도란 이야기하기로 한 고대사편 두번째 불판
고대사편 두 번째 불판입니다.

<지난토론>
https://ppt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7&sn1=&divpage=3&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884

역시,이번 토론도 이벤트와 함께 합니다.^^
"재미를 위해서 각회마다 한 분씩 선정해서 3만원 이하의 도서상품을 전달해 드리는 이벤트"
지난번 토론에서는 열정적으로 토론에 임해주신 루크레티아 님(ID:  soondo0 )님께 이벤트 당첨의 영광을 제맘대로 드리겠습니다. 루크레티아님은 제게 혹은 timeless님을 비롯한 운영진에게 ‘성함, 전화번호, 주소, 책이름’이 적힌 쪽지를 전해주시면 됩니다.


이번 토론은 고대사편 두번째로,
1.신라왕실족보
2.고대사 미스테리(기타 토론)인데요,
발제순서는 바꿨습니다.(신라왕실족보이야기가 너무 길어서요)

아무튼 편하게 궁금한 것 묻고, 자신의 생각도 편하게 표현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오징어 씹어먹는 여행길처럼...
(발제가 허접할 수록 토론이 더 좋아질것이라 믿고,이번에도 발제는 발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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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편 토론
1.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지난번 토론에 제가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해 ‘이두에 의한 문자생활이 신라의 중앙집권화에 기여함으로써 삼국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주었다.’는 주장에 대해 몇몇 분이 의견을 주셨는데요,여기에 그 의견을 적고, 토론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Story 님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무관들은 글을 잘 몰랐죠. 그래도 전쟁하는건 지장이 없었습니다... 글로 안 통해도 결국 전쟁은 무관들이 몸으로 하는거니까요... 중국이 언어와 문화때문에 원이나 청에게 그 넓은 땅을 내줄리 없었듯이 말입니다. 결국 신라의 통일은 외교력때문이겠죠... 당이 아니라면 신라의 통일은 쉽게 일어날리 없었을거란게 제 생각입니다. ”

Clostridiumbotulinum 님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게 아니죠. 당군을 등에 업고 다 쓰러져 가던 백제를 상대로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한 것 뿐이고,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한 것입니다. '통일신라'라는 호칭도 잘 못 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발해와 함께 묶어서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구요. 신라 스스로도 '삼한을 통일했다'라고 평가했지요. 그것이 후대의 지배층과 학자들에 의해 부풀려 지면서 삼국통일로 바뀌어 버립니다. ”

노짱을 돌려됴 님은
“세계제국을 표방해 대외원정을 사실상 기조로 일삼았던 당나라의 패권주의 진출방향을 고구려에서 백제로 돌리는데 성공한 김춘추의 외교력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고 그힘덕에 삼한일통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태생적으로 이건 삼한일통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중국쪽 역사서에는 벌써 고구려와 백제를 중국점령지로 정하고 있고 현대 중국 교과서등에는 명백히 당나라시대 최대판도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당나라의 영토로 적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자주적이자 완벽한 통일은 차라리 후삼국을 일통한 고려태조 왕건이 이룩했다고 하면 모를까 적어도 신라의 삼한일통은 아니라고 봅니다. ”

라고 의견을 주셨습니다.

2.치우천왕에 대하여

메를린 님이
“ 퇴마록에 나온 치우천황이 생각나더군요. 홍수설화에 우리민족도 관련되어있고, 또 신적존재로 추앙받는 '치수'를 한 인물이 우리민족을 이끄는 사람이였다니 더 대단하게 느껴지구요. 그래서 환단고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읽고, 그러다보니 증산도까페에 가입해서 읽게 되고;;;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위서논란도 읽게되고(원래 양극단을 보길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좀 더 많이아는분들과 토론을 하고 싶게 되었네요 ”
라고 하셨습니다.

3.고조선과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당신의조각들 님이 발제를 하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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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과 낙랑국 이라는, 두 개의 낙랑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낙랑군은 아시다시피 한나라가 고조선의 왕검성을 함락시킨 후에 설치한 한사군(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의 사군) 중 하나입니다.
이후, 한나라는 진번군과 임둔군의 절반을 낙랑군과 현도군에 통합시켰고, 이 중에서 현도군이 고구려의 공격 등으로 쫓겨 감에 따라서, 옛 고조선 지역에는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고 하네요.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지배 아래에도 있었고, 중국의 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서진의 지배를 받기도 했었네요. 그러다가,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씨 사이에서 각축전을 벌이다 결국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무려 420년간이나 존속했던,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정치 집단이지요.

그런데, 낙랑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정치세력이 ‘낙랑군’ 외에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낙랑공주와 고구려 호동왕자의 로맨스, 그 낙랑공주의 나라가 바로 낙랑국입니다. 최리가 왕으로 있던, 엄연한 국가이지요. 이 낙랑국은 대무신왕 15년 서기 32년)에 멸망합니다.
갑자기 낙랑국과 낙랑군이 왜 나오지? 이게 뭐가 중요한거지? 이것과 관련된 책, 글, 그리고 문서들을 읽으면서 제가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사소해 보이는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그저 두 정치세력의 위치 확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위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우선,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몇 가지 기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낙랑군(軍)이 신라를 공격하려고 국경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감 - 혁거세 거서간 30년 (기원전 28년)
2) 낙랑군(軍)이 서라벌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자, 왕은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어 외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가” 라고 말하는 기록이 존재 - 남해차차웅 원년 (기원전 4년)
3)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략해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켰다 - 유리이사금 13년 (서기 36년)

‘낙랑’이라는 정치집단이 계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 ‘낙랑’이 낙랑국인지 낙랑군인지 알아봐야겠죠?
일제시대 이래 낙랑군의 위치는 대동강 유역이라고 보는 의견이 대다수였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통설입니다.
대동강 유역에서 중국 측 유물이 많이 발굴이 되었기 때문이죠. 물증도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후한서』동이열전 부여 조에서, 111년에 “부여왕이 보기(步騎)7,8천인을 거느리고 낙랑을 공격하고 이민(吏民)을 살상한 후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엥? 고구려보다도 북쪽에 있는 부여가 뭐 하러 대동강 근처에 있는 낙랑을 공격했을까요? 그것도 고구려 영토를 가로질러서? 이래저래 명분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었을 테고, 지정학적 위치를 봐서라도, 불가능한 출정 같아 보입니다.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요.
이것은,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부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게 아닐까요?

그럼 또 다시 드는 의문. 실제로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중국 유물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 (서기 44년) 조의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탈취해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는 기록을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광무제가 친 ‘낙랑’은 당연히 낙랑국입니다. 한나라의 군현인 낙랑군을 치는 것은, 쉽게 말하면 팀킬을 하는 것이니까요.
출토되는 유물들은 이 때의 유물들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출처 : 살아있는 한국사 - 이덕일(2003) 외 인터넷 자료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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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서기>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

루크레티아님과 귀염둥이님께서 토론을 벌였는데요, 필요하다면 다른 분도 함께했으면 해서 주제로 올렸습니다.

이상이 지난번 고대사편 제 1불판에서 나온 발제들입니다. 이걸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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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제가 신라족보에 대해 발제했습니다. 원래는 길게 할 생각이 없었는데요,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양해바랍니다.(긴글 써놓고 보니 괜히 죄송합니다.)

**신라왕실 계보

1.

신라가 경주 중심의 작은 소국이었던 사로국에서 출발하여 삼국을 통합하여 통일신라를 만들때까지의 기간은 드라마틱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구려나 백제보다 더 지독한 피의 숙청과정을 거듭하면서 왕실은 경쟁자들을 하나씩 물리쳤는데요, 이것이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어줌으로써 단일권력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중국과 북방민족과의 끝없는 전쟁으로 인해 귀족세력들의 군사력이 언제나 필요했고, 그것이 멸망당시까지도 강력한 왕권국가로 재배치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물론 고국천왕때 고구려 왕실은 귀족을 제압할 힘을 얻었는데요, 그것은 고국천왕이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그 유명한 ‘청야’작전을 통해 완벽한 승리를 보여줌으로써 귀족들을 압박할 수 있었던데 연유한다고 봅니다만 여전히 귀족들의 힘이 강했습니다.
백제는 왕실의 위기를 다른 지역의 귀족과의 계속된 연합으로 극복하려 했지만, 의자왕은 결국 그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식을 많이 두는 -다시 말하면 그들은 배다른 자식들일테니,그만큼 신흥 세력과의 결혼동맹을 꿈꿨다는 것이지만-것으로 나라를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고립을 자초하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략했을 때, 의자왕에게 달려와준 귀족은 없었지요.혈족인 계백빼고는... 귀족들은 의자왕에게 등을 돌렸을 뿐이었다는 것은 이후 백제 부흥군의 활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고구려와 백제는 끝까지 귀족들에게 왕실이 휘둘렸지만 신라는 복잡한 가계도를 단순하고 단일한 가계도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수학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통일의 대업을 이룰 기반을 마련했는데요, 그 과정을 표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표:신라왕실계보)


왕실은 박,석,김에 의해 교체되고,왕비 족은 박씨로 단일화되다가 다시 퇴출,김씨 단독권력을 이뤘으나 김춘추가 비왕족인 가야계와 결혼함으로써 박,석,김시대는 종말을 고했지요.

2.

자, 이제 이 신라왕실의 족보를 들여다보지요.

먼저 박혁거세.
박씨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성이라고 하는데요, 새해가 되면 싹이 트고 열매맺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농경민족의 순환론적 세계관에 따라 새롭게 왕이 탄생하는 퍼포먼스가 열렸는데, 알에서 태어난 것을 보여주기에는 적당한 알이 없었고,옹기로 하자니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고,그래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박을 깨뜨리는 의식을 한 것이 발단이 되지 않았을까...하는게 제 추측입니다.

어찌되었든 박혁거세의 뒤를 이은 남해차차웅은 무당이라고 하니, 이때까지만 해도 단군왕검시대처럼 제사장과 군장이 분리가 안 된 시대로 보입니다. (고구려나 백제는 부족국가단계에서 이미 ‘일자’라고 하는 신관을 대동하고 순시하는 등 뚜렷한 정교분리가 나타납니다.) 차차웅은 후에 ‘중’이라고 하는 말로 변했다고 합니다.

박혁거세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애초에 진한에는 고조선이 멸망당시 유민들이 들어와서 살면서 철기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것은 삼한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고조선은 정치상황에 의해 비파형동검단계에서 세형동검단계로 진화합니다. 첫 번째 파장이 일었던 것은 ‘진개에 의해 고조선 땅 사방 200km를 잃었던 때’로 비파형동검문화세대는 마치 물보라가 튀듯이 튕겨지면서 서해안을 따라 망명길에 올라 한강,낙동강,금강 등으로 차례차례 상륙하는데요,이에 따라 고조선문화가 서해안을 접수하게 됩니다.
이들에 의해 마한은 초기 철기시대 문화가 이식됩니다. 이것은 유물을 통해서 확인이 됩니다.이때의 유물을 요령지방의 유물과 비교분석해보면 남하한 고조선 유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후 위만이 고조선을 접수하면서 사라져버린 단군신화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는데요, 그 세력이 마한땅의 청주를 거쳐 강화도에 터를 잡았고, 이들에 의해 보존된 단군신화가 고려시대 정치적 배경에 따라 되살아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제가 전에 ‘과거로부터의 편지-by 이승휴편’ 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후 한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한 뒤 다시 한번 고조선의 물보라가 크게 튕겼는데요, 유민들은 이미 주인이 자리잡은 마한보다는 무주공산이랄 수 있었던 낙동강 양안에 자리잡아 진한과 변한을 이루는 마을들을 구성했는데요,이때의 특징은 역시 유물(특히 토기)에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조선 멸망기의 유물인 황해도 지역의 토기가 바로 이시기에 낙동강 유역과 경주인근에서 출토됩니다. (토기는 거의 완벽한 고대문명의 신분증입니다)

삼한사회(진한,변한포함) 소국의 수장들이 가장 갖고 싶은 소장품이 청동거울,옥,청동검(이걸 삼보라고 하죠.일본에선 천황가의 보물이라고까지한다는...)인데요, 이중에서도 청동거울은 그 작업의 특수성 때문에 소국의 재력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다른 것과는 달리 청동거울의 거푸집은 보통 진흙입니다. 다시말해서,1회 1개밖에 제작이 안된다는거죠. 그래서 마한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청동거울은 제작방식뿐만 아니라 제작의도를 달리하는 단한개뿐인 청동거울들로 각기 소국 수장들의 부의 상징품들이었습니다.

이거 하나 만들려면 작은 소국의 재력으로는 어림없었지요.소국은 보통 지금의 시골 읍하나,커봐야 군하나 정도이다보니 군청이나 읍사무소에서 자체적으로 기술개발하고 원료조달하고 할 수 있는게 한계가 있는거죠. 그래도 마한쪽은 비옥하고 오래된 농경지역이라 그정도의 재력을 갖춘 수장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러나 진한,변한에선 방법이 없었는데요,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모조품수입’입니다.중국제 짝퉁 청동거울이 조금 발견될때가 바로 이 삼한 소국시절의 경주어름입니다.여기에 고조선출신 유민들이 도착한 것이지요.

이곳의 지리적 특성은 이주민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주인 없는 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중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그리고 7번국도는 낙랑,고조선,부여를 비롯해 북방유목민까지 드나드는 길이었고, 고구려의 정복정책을 피해 도망나온 소국인들도 있었습니다. 동해안은 일본을 비롯해 해상국가들이 부지런히 배를 타고 드나드는 곳이었습니다. 철기시대는 전쟁의 시대이기도 하고 바다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전쟁은 유이민을 낳았고 바다는 새로운 꿈의 신천지를 찾아 나선 모험가들에겐 자유롭고 편안한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한땅엔 마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3.

이 마을들 중에서 사로국이 두각을 나타냈는데요, 박혁거세는 말을 숭배하는 부족출신이라는 점에서 북방에서 들어온 부족일 것이라는 설, 박은 바다를 건널 때 튜브구실을 했으므로 바다를 건너왔다는 설, 흥부놀부에서처럼 박은 복을 가져다주는 주머니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박속에 뭔가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설까지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고, 어찌되었든 박혁거세는 변하는 정세를 읽었던 선각자였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불안해지는 한반도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역설함으로써 초대 왕(이라기보다는 제사장겸 정치적수장으로 창고를 지켜주고 마을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줄 구세주)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런데 박혁거세가 죽은 뒤 시체를 다섯군데에 나눠 묻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순탄하지 못한 말년의 상황을 엿보게 합니다. 즉, 왕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장들의 힘이 강한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후 남해차차웅은 다시 정치권력이 제사장격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남해차차웅은 박혁거세 부족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박씨들의 부족의 힘이나 위세는 압도적이었나봅니다)

제3대 왕인 유리왕의 경우는 석탈해와의 왕권경쟁에서 이빨경쟁을 통해 왕이 되면서 ‘이사금’이 되는데요, 왜 이빨인가하는 것이 저의 늘 수수께끼였습니다. 연장자를 뽑는 것이라면 태어난 해를 잘 모르는 당시상황에서 이빨의 숫자는 인간에겐 나이테와 같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데, 가계승계가 된 상황에서도 이빨이 필요했을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지 않나 싶더군요.

그런데 뜻밖에도 인디언들에게 추장을 뽑는 의식이 있는데, 그 덕목가운데 하나가 바로 ‘말빨’이더군요. 그래서 제생각엔 ‘이빨’이란 ‘말빨’의 은유가 아니었을까,따라서 광장에 늘어놓고 유세를 벌인 뒤 국읍사람들(국인이라고 합니다,여기서 국읍은 사로국의 여러 읍락가운데 왕궁이 있는 읍락으로 국인은 이곳의 주민들인데요, 국읍은 소위 ‘창고’중심의 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제가 창고라고 표현한 것은 ‘세금을 징수하고 보관하는 곳’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이곳 사람들이 나중에 월성이 생긴 뒤의 경주사람들,즉 귀족들이 됩니다.)의 선택을 받는게 일종의 관습화 된것이 아닌가 하는거죠. 부족내 세습을 한 뒤에도 이런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로 추대받는 형식이 아니었을까,하는게 제 생각인데요,물론 아직까지 저와 같은 견해를 가진 고대사학자나 민속학자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어찌되었든 박혁거세가 강력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는 동안 한반도의 정세는 폭풍처럼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차차웅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만) 사로국으로서는 제철입국의 꿈을 꾸게 되는데요, 바로 그때 석탈해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대장장이였지만 그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알게 된 사로국에서 유리왕과 겨룰 정도로 인정을 받았고, 곧 그 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

제철기술자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곧 드러납니다. 파사이사금은(석씨가문이라고도 합니다) 마침내 정복군주로서 위용을 뽐내면서 신라최초로 기병부대를 이끌고 주변국을 병합하고, 경주에 월성을 쌓아 성읍국가, 혹은 부족국가의 진화단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탈해왕 시절에 김알지가문이 이주해왔는데요, 이 가문도 역시 이름그대로 제철가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석탈해가문보다 훨씬 앞서는 제철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가문이 힘을 키워 마침내 벌휴이사금때에 박씨를 고립시키기 위해 석씨와 김씨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4.

벌휴이사금에 대한 기록으로는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또 사람의 정직한 것과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알아맞히니 사람들이 성인이라 하였다’하였는데요, 역시나 박씨가문은 제철기술자들을 당해낼 수 없었겠지요. 농업기술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 것은 점이 아니라, 아마 제철기술,즉 철제 농기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벌휴이사금(즉 석씨와 김씨의 연립정권)은 민심을 얻었습니다.-반대로 박씨족이 민심을 잃은 것일 수도 있고요.

석씨가계와 손을 잡은 김씨가계는 지속적으로 힘을 키웠는데요, 마침내 내물마립간 시대에 이르러 왕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그 배경에는 이때에 날씨가 급변, 흉년이 지속되는데다가 이 때문에 당연한 결과겠지만 식량난이 한반도 부근을 엄습한 것이 원인이었거나, 아니면 각각의 부족들이 큰 전쟁도 없고, 또한 큰 기술적 발전도 없다보니 인구팽창에 의한 식량난에 처했거나....하여간 모든 부족은갑자기 호전적이 되어 습격을 시작했고, 왜인들까지 약탈에 가담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정복전쟁의 시대에 살아남는 것, 그것은 신기술과 정예군대의 힘외엔 없었으니까요.김씨족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달천에서부터 시작된 제철산업단지는 김씨가문을 최고의 부와 권력을 신라의 새로운 지배자로 올려놓았습니다.(이때까지 제철기술은 철을 수입하여 가공하거나 자체 철광을 개발하여 가공해서 팔던 김해의 가야의 독점무역이었지만 바로 이때에 이르러 울산의 달천 쇠부리터는 김해를 능가하는 제철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 철기기술독립이야말로 신라사회를 김씨왕가가 독점할 수 있게 했던 힘이라고 생각됩니다. 현대에 제철산업단지가 포항-울산을 잇는 벨트라인에 세워진 것은 어찌보면 오싹한 일이기도 합니다.땅의 궁합이란게 있는것이 아닐까하는...)

지속적으로 철기를 개발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용병을 키워온 김씨는 석씨를 무너뜨리고 왕권을 쥐게 되는데요, 이후 김씨는 전통 가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박씨를 왕비족으로 삼는 정치적 제휴를 통해 위기를 돌파하기도 합니다. 바로 지증왕때부터인데요, 이것이 김씨왕족에게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박씨는 이미 힘을 잃었으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왕비족으로 만족할 수 있었고, 김씨는 위험한 석씨가문보다는 덜 위험한 박씨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고였던거죠.(이후 석씨가문은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삼국공통이기도 합니다. 고구려의 연나부가 그랬고, 백제의 해씨가 왕비족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니까요.
(왕족들 교체가 심한 것도 고대국가에서 삼국이 겪은 일입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대왕 때 왕성이 해씨에서 고씨로, 백제는 제8대 고이왕 때 해씨에서 부여씨로 바뀝니다. 초고왕때부터라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김씨 왕계는 자신의 가문으로 귀족들을 편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는데요, 이에 따라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중대한 ‘혈족’정당화를 단행할 수 있게 됩니다.

율령은 그 유명한 ‘골품제’의 법적 표현입니다. 귀족들은 이제 더 이상 이합집산을 통해 왕실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의 사상적 표현을 불교에서 얻어옵니다.

불교는 첫 출발은 왕자였던 신분인 싯다르타가 천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평등’의 원리를 설파했을지 모르나 어찌되었든 통과하는 시점은 고대사회였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불교나 유교,혹은 기독교는 힘과 힘이 부딪히는 정복자들에게 진정한 권위와 권력은 칼이 아니라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회적 합의라는 표현양식을 띄고 있으므로 훨씬 지배하기 쉽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만, 무엇보다 완벽한 종교세계를 속세에서 펼칠 수 있는 근거를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신과 천사와 사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급사회를 정당화했듯이 그리고 유교가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관계로서 계급을 표현함으로써 혈연적 숙명급으로 격상시켰듯이 불교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륜성왕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법흥왕 이후, 불교를 정치이데올로기에서 끌어내린 태종무열왕전까지의 왕가의 이름은 전부 불교식 이름이고, 왕호도 ‘진’짜가 들어감으로써 불교가 통과해온 인도 카스트제도를 그대로 답습해내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합니다.

이에 따라 진흥왕계 이후부터는 골품제도가 제도로서가 아니라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인도카스트제도의 모방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아마 혈통을 이때보다 더 지독하게 고집했던 경우는 없습니다)

5.

김씨 왕족은 이렇게 해서 자신의 혈통이 신라왕실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완성하였습니다만 전통 귀족들은 다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에 반란은 이전시기처럼 경주밖의 호전적인 부족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에서 벌어지는데요, 진평왕때에는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꾀했고, 선덕여왕때는 비담,염종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의 정치지형을 보면 김씨왕족은 분열, 진지왕계와 진평왕계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로는 구 귀족세력(알천),그리고 칠숙이나 비담처럼 (전통신앙을 추종하는) 전통세력이 아직도 힘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이 격해지면서 전쟁에서 세운 공을 바탕으로 무섭게 성장하는 신귀족세력인 가야계(김유신 등)이이 있었습니다. 진지왕계는 아직도 전통적 귀족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진평왕계는 정치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구 귀족세력일부와 가야계와의 제휴를 단행합니다.그 결과가 선덕여왕의 등극이었습니다.

이에 소외된 귀족들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이것은 신라로서는 중대한 고비였습니다. 귀족에게 힘을 빼앗겨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균형상태를 유지,가야가 그랬듯이 허무한 종말을 맞을 것인가,아니면 귀족들을 힘으로 제압,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적 왕실국가로 변신할 것인가.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기에 박,석,김으로 이어져 내려온 혈통주의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그때 진평왕계의 이데올로기인 혈통주의가 가진 한계를 직감한 진지왕계(김춘추)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김유신과 연합을 모색(결혼)하였고, 김유신은 역시 혈통주의를 고집하는 진평왕계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출세의 한계를 느꼈는지 김춘추와 손을 잡고,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잡게 됩니다.

이후 혈통주의는 자연히 소멸하는데요,김춘추가 당나라에 갔을 때는 그 유명한 ‘정관의 치’시대. 당나라는 수나라의 유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까닭에 오로지 현명한 신하들의 맹목적 복종만 얻어내면 치세를 이어갈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수나라가 시작한 과거제도는 당나라를 번성케 했고, 귀족을 압도해가는 이 힘을 본 김춘추는 당장 그것을 신라에 도입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첨성대편에서도 썼듯이 법흥왕이후 진덕여왕까지 신라는 자신의 왕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연호’를 썼습니다만, 김춘추시대가 되면서 모든 제도를 한화(중국화)정책에 힘입어,연호가 사라지게 됩니다.

6.

신라의 사로 6촌에 대해서는 한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후대에 위조했다는 혐의를 짙게 풍겼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일부에서는 신라왕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귀족에 편입시켰고, 그 귀족들에게 특권적 권위를 부여해서 시조설화까지 만들어줬다, 그러니까 박혁거세가 사로6촌의 추장이었던 소벌공(소벌도리)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설화자체가 위조라는거죠. 귀족들과 왕족들간의 타협의 산물.

박혁거세와 결혼한 왕비 알영도 닭을 숭배하는 부족사람인데요, 그것은 이후 김씨왕가가 시조묘에 참배를 들일 때,니들은 어디서 떨어진 나부랭이냐?라고 누가 묻는다면 이미 자신들의 핏줄은 신라와 함께 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위작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닭을 숭배하는 부족이라, 이들이 살던 곳을 탁부 또는 사탁부라고 했는데,이후 한자가 들어와서 계림이라고 했으니,국호를 계림으로 고쳤던 석탈해 이야기도,석씨가문은 어디다 팔아먹었냐?하고 누가 묻는다면 우리속에 이미 계림국이라는 것이 예비되었습니다...하고 말하려는 수작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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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主SUNNY
09/09/17 10:25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최근에 10년전의 다큐인 역사스페셜에서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는가... 라는 다큐를 봤었는데요. 반란을 일으킨 비담이 왕위승계서열에서 높은 순서였는데, 선덕여왕의 후계로 진덕여왕이 지목되자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왕족이지만 조금 멀찍이 떨어진 김춘추와 가야계의 인물이었던 김유신은 서로 연합, 전통 귀족들에게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왕을 지지했고, 비담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서 권력을 쥐게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7월인가요?)에 방영된 한국의 신화였나? 하는 다큐에서 박혁거세 신화를 언급하더군요. 동북족 민족들의 신화에 공통적인 요소가 박혁거세신화에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국모로서 대대로 국가제사를 지내는데, 모계가 강했다는 평도 있구요.

다른 북방유목민족들에게는 신화로 있는 선녀와 나뭇꾼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는 민화로 있는 것이, 여성이 천상의 존재고 남성이 지상의 존재인 신화를 의도적으로 배척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의 유화나 백제에서의 소서노, 신라에서의 알영등이 국모로서 신성시되었었는데, 남성우위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그리고 제사장의 입지를 좁히기 위해) 불교를 들였다는 이야기도 본 것 같구요...

아... 아는게 없으니 뭔가 두서 없네요...
Callisto
09/09/17 11:07
수정 아이콘
네 저도 잘봤습니다.

강의시간에 배운것과 약간 다른것도 있어서 봤던 책을 다시 좀 펼쳐 봐야겠네요. 아무쪼록 다시한 번 생각해 봄으로써 전공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데자뷰
09/09/17 11:08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역시.
잘 봤습니다~
Siriuslee
09/09/17 12:29
수정 아이콘
신라왕계를 보니까 하나 생각나는 주장이 있군요.(어디에서본건지 정확하진 않는데 주장은 대강 기억이 나네요.)

박, 석, 김 계에서 왕이 나오던 초기와 다르게

중기에는 박, 김계에서 왕이 나오다 삼국통일(뭐 그냥 달리 표현할 말은 못찾았네요) 전후로 하여 거의 김씨가 왕을 하지요.

특히 박씨는 그래도 귀족으로 남아있지만, 석씨는 거의 보이지 않고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는데,


불교의 석가모니의 이야기와 연관지어서, 이 불교의 석가모니가 석씨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의견입니다.

석가모니는 출가하기전 왕족이었지요, 그러면 당시 그지역의 왕국을 다스리던 것은 석씨.

또 석가모니를 풀어서 보면 석가 의 모니. 모니는 '어머니' 에남아있는 수장의 의미이다.. (뭐 이건 좀 비약같긴 하지만;) 라는 의견이었습니다.


대강 상상력을 붙여보면, 박석김계 중심이던 초기 신라에서, 박씨와 김씨가 힘을 합해 석씨를 추출해 내었고 석씨는 신라를 떠나서 인도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라는것이죠
(그리고 이런 상상력을 뒷받침하는것이 어느때 왕비인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인도쪽에서 온 공주가 왕비라는 것도 본거 같기도하고;;)


짧은 지식이라 그냥 그 주장만 기억이 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혼자 생각해보았습니다.


위 첨부를 보니 또 한번 생각이 나네요.

<a href=http://www.coo2.net/
target=_blank>http://www.coo2.net/
</a>

위 사이트 돌아다니다 들어갔던 블로그에서 본것입니다.

아 지금생각해보니 그 반대였던가; 뭐 암튼 다시 찾으려니 모르겠군요 크크
信主SUNNY
09/09/17 12:31
수정 아이콘
Siriuslee님// 시기상 석가모니가 더 빠르지 않나요?
happyend
09/09/17 12:47
수정 아이콘
Siriuslee님// 우하하.빵 터졌습니다.
이러다가 마씨는 마호메트, 예씨는 예수의 조상이란 말이 나올지도^^

信主SUNNY님// 재밌네요.모계신앙이라기 보다는, 그리스 신화도 그렇지만 지하세계, 땅의 신,곡식의 신 등으로 표현되는 신들은 '여신'입니다.원래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출발이 처음엔 부업에 불과했던 여자들의 식물채집(과일,풀잎사귀,열매)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농업의 초창기에는 여신이 농사를 돌봐준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신(태양에 의해 식물을 기르고), 땅의 신(흙속에 씨앗을 잉태했다 싹을 나게 하는)이 남신과 여신으로 분화되었습니다.
(물론,예전에 제가 고인돌이 사실은 주산업체계가 수렵에서 농업으로 변한 뒤 부업으로 전락하고 그나마도 허탕치기 일쑤가 되어버린 남자들의 과거 좋았던 시절,달을 숭배하던 의식을 답습하던 것이고, 이후 보습의 발견은 농업을 남성의 일로 만들며 여성을 부엌으로 내몰았고,이것이 소위 '신데렐라 이야기'로 반복되어졌고, 이후 남성들이 자신들의 숭배자를 달에서 여성들의 숭배자였던 해로 갈아타게 된다,그래서 해와달의 된 오누이에서 왜, 남자가 달이 되고 여자가 해가 되었는지를 풀 수 있는 수수께끼다...뭐,그런 글을 올린적이 있는데요,이것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信主SUNNY
09/09/17 13:12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네. '한국의 신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중 3부가 여신에 대해서 였습니다. 대부분의 신화가 여성이 토지의 신으로 나오는 편인데 한국에는 여신이 없다는 것이죠.

이 다큐에서는 우선 웅녀로 시작하는데요. 그 후에도 유화가 갖는 농경사회와의 동질성(물의 신 하백의 딸이라는 점과 버드나무꽃이라는 이름에서)이 언급됩니다. 그외에도 소서노나 알영에 대한 언급도 있고, 삼신할매나 제주도의... 이름기억안나는.... 제주도 창세신화의 여인등등이 나오더군요. 할매는 '할'이 크다는 뜻이어서 노파를 뜻하는게 아니라 큰 여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는 말도 있었구요.

어쨌든 3부의 내용은 한국의 여신들이 고의적으로 배척당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09/09/17 16:01
수정 아이콘
상당히 긴 글인데 정말 재미있게 봤네요.

근데 과연 철제 농기구가 있었을까요?
철제 농기구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철의 양의 문제일 거 같은데..
당시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귀한 철로 농기구까지 만들었을 거 같진 않네요.
happyend
09/09/17 16:29
수정 아이콘
信主SUNNY님// 아, 그렇네요. 우리나라 신화가 분서갱유급으로 사라진 것이 합리적인 '유학자'들이 권력을 잡은 조선초기때부터인데요,그래서 당시 신화를 간직한 무속인들은 탄압을 피해 대거 제주도로 이주,제주도가 아직까지도 신화의 땅으로 남게 됩니다.
말씀대로 제주도는 여신관련(여장부라고 해야할 듯 하지만)신화가 많이 있죠.설문대할망 신화라거나...(저도 어렸을적에 듣도보도 못한 묘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잔뜩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아마,그런 것이 여신들이 고의적 배척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sungsik님// 아! 청동기문명과 철기문명의 근본적 차이가,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청동기는 '청동검'으로 시작했고, 철기는 '쇠도끼'로 시작한 것이다라고 단순화할 수 있을정도로요.청동기는 합금자체가 어렵고,그래봐야 약해서 쓸모가 별로 없었지요.게다가 무겁고.그래서 대부분은 '상징물'로만 존재합니다. 제의도구라거나.
그런데 철기는 그 탄생부터 농기구였거든요.처음엔 약해서(주조철기시절)검이 되긴 어렵지만 도끼가 될 수는 있었거든요.
그래서철제농기구는 비교적 쉽게(철이 구리에 비해 훨씬 구하기 쉬운 광물이고,주조과정도 숯가루만 잘 활용하면 합금보다는 쉬운 산화-환원과정일 뿐이거든요)만들었습니다.
후에, 정복전쟁의 시대가 되면서 살상목적으로 철의 기술적 발전을 이뤘는데요(단조철기)이것은 비교적 복잡한 과정을 가진면서 '검'의 신화로 발전했습니다.그래서 서양신화(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만)에서 대장장이 신화는 '도끼'신화이고, 정복군주의 신화는 '검의 신화'-엑스칼리버라거나,주몽이라거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말이 많은 백제의 '칠지도'는 단조기술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에 특별한 유물인데요, 이것은 현재 일본의 '검'제조과정을 보여주는 다큐에 그대로 투영되어서 꽤 재밌더군요.그러니까 검은 강하면 부러지는데요,이것을 무른 쇠(무쇠)와 강한쇠(강철)의 혼합을 100번해주면 무쇠가 탄성이 있어서 검을 강하지만 부러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는 뭐,그런 얘기입니다.칠지도가 그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데요,정교하게 이 혼합물의 결을 만들어내는 그 능력이 '좋은 검'이 되게 한다는거죠.
저는 무기관련해서는 잘 모르고,아는 것은 이정도입니다만....
결론적으로 철의 양은 걱정이 없었습니다.(일본은 화산국가라 철이 넘치고,우리나라도 생각보다 철광석이 많거든요.아니,철광석자체가 흔한 광석입니다. )
몽키.D.루피
09/09/17 18:04
수정 아이콘
김씨들의 시조인 김알지가 한무제 때 멸망한 흉노족 국가의 왕자인 김일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두 번 다루었고 저도 김씨라서 자세히 본 기억이 납니다. 김씨라는 성도 금을 숭상하는 흉노족 풍습에 따라 한무제가 하사한 성이라고 합니다. 그가 한무제 때 공을 세워 투후라는 벼슬과 영지를 하사 받았지만 그 후손이 왕망의 난 때 관여를 하여 도망쳐 온 곳이 바로 한반도의 신라라고 하더군요.
경주 김씨 종가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당황해 하시던 어르신들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오랑캐의 후손이라니....라며 얼굴에 써 있었습니다.
몽키.D.루피
09/09/17 18:05
수정 아이콘
물론 방송에서는 거의 확신을 하듯이 소개했지만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반대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信主SUNNY
09/09/17 19:04
수정 아이콘
아, 그리고 낙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당신의조각들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어릴적에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낙랑이 고구려 아래에 있었다면, 사실 상 한반도까지가 모두 한의 영토였다고 봐야하는 것인데, 부여나 고구려등의 국가를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백제를 너무나도 쉽게 건국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구요.

대동강 유역이 낙랑이었다고 가정하고 고구려가 후에 힘이 커져서 밀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더라도, 낙랑이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해당 지역의 원주민이 강했다고 판단되지도 않고, 한강유역과 호남지방은 굳이 차지할 이유가 없는 땅이지도 않으니까요.
happyend
09/09/17 19:45
수정 아이콘
결국,낙랑에 대해서는 제가 총대를 매어야 하는가보군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만,저는 '유물이 가르쳐 준 진실'을 외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문헌사적으로는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거든요.특히 고대국가의 특징이 그렇기도 하지만, 낙랑은 고조선이 멸망자체가 외부의 적의 힘보다 내부의 배반자들에 의한 자멸성격이 강했고,그러다보니 위만조선시대이래로 잘먹고 잘살았던 사람들에 의한 '자치지구'적 성격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유물은 너무도 극명하게 대동강유역이 낙랑의 중심지이고,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지란 것을 보여준다는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갈등을 빚어보죠,뭐)
루크레티아
09/09/18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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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뭐 별거 없는 저에게 이런 영광을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우선 오늘의 발제하신 주제는 저의 무식으로 인해 그냥 배우는 입장에서 지켜보기만 해야할 듯 싶습니다. 신라 왕실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영 관심이 없다보니 그냥 보면 볼수록 새로운 내용 뿐이군요. 글 잘 읽었고, 다른 분들께서 다시금 신라 왕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셨으면 합니다.

일본서기 이야기는 제가 그냥 무식을 대놓고 자랑한 내용인지라...귀염둥이님께서 제대로 지적해주신듯 합니다. 사실 토론이 있은 후에 학교 도서관에서 일본서기에 관한 논문이나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영 괜찮은 내용들이 없더군요. 언제 한번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 도서관에 가서 다시 찾아볼 생각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역시 아쉬워 하시는군요. 모두 말씀하시고, 아시는 대로 사실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은 당나라입니다. 거의 당나라의 힘이 8할을 차지할 정도였죠. 고구려는 몰라도 백제는 거의 당나라의 힘으로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도 있기에 마련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비록 부정적인 면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를 '당나라에 빌붙은 간사한 행위'로만 생각하기에는 그 후의 신라의 나,당 전쟁이 너무 헛된 일이 됩니다. 비록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웅진과 금성에 도독부가 설치되는 것을 막고 자주적인 국가를 다시금 설립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 받을만한 일입니다. 만약 신라가 적어도 원래 당과의 밀약대로 대동강 이남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청천강까지만이라도 진출해서 평양을 손에 넣었다면 이렇게까지 까이진 않았겠죠? 하지만 당시 신라의 지배층은 그럴 의지도 없었고, 계속되는 전쟁에 지칠대로 지쳐있었으니(화랑이니 뭐니 하면서 신라의 무력을 높이려고 역사학계에서 기를 쓰지만, 역시 무력이나 정복은 고구려에 비하면 발바닥 수준입니다.) 후세에서 보기엔 아쉬울 따름입니다.

한 4군의 위치는 역시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도 마찬가지로 낙랑이 대동강 유역에 자리했다는 학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듭니다. 우선 낙랑군의 위치를 보기 이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바로 현도군의 위치입니다. 현도군은 사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나라가 만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 설치한 군입니다. 또한 4군 중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지배했으며 그 힘도 막강했습니다. 낙랑이 우리에게 더 유명한 이유는 가장 오래 살아남아서이지 가장 강력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후세에는 계속되는 고구려와의 충돌로 인해 낙랑보다 먼저 축출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넓은 지역을 다스려야 했기에 한나라는 현도군에 가장 공을 들였습니다. 그리하여 현도군은 부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만주를 지배할 수 있었죠. 문제는 이런 만주를 지배하던 현도군의 위치입니다. 낙랑의 대동강유역설을 뒷받침하는 한 4군설에서 현도군은 압록강 유역에 있으며 졸본과 국내성 일대를 모두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로라면 북만주에 위치한 부여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고구려가 건국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멀쩡한 한나라 영토 내부에서 약해빠진 신흥국가가 일어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현도군의 위치 역시 지금의 이론대로 암록강 유역이 아닌 요하의 상류 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현도군이 요하 상류로 가게 된다면 낙랑군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벌어집니다. 진번과 임둔이 있긴 하지만 이 두 군은 사실 곁다리에 지나지 않죠. 이는 곧 낙랑군이 한반도 내부에 고립된 형태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이건 영 설득력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낙랑군의 대동강 유역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뭐죠? 굼금하네요.
happyend
09/09/1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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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긴 글을 다 날렸더니, 쓸맘이 다 없어졌습니다.
루크레티아님// 원래는 논리정연한 글이었지만,다시 쓰려니....요점만 간단히
1.현도군의 위치는 변했습니다.고구려족의 저항으로 만주쪽(동가강인가요?암튼 그 유역으로)에 다시 재배치,말씀대로 부여를 비롯한 북방민족을 견제할 완충지로 썼습니다.그러므로 현도군의 위치로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모순이 있습니다.
2.대동강을 중심으로 낙랑군 유물이 상당히 퍼져있습니다.가령,신도시 건설로 발굴하게 된 화성의 경우,기안리 유적에서 낙랑계토기가 발굴된 것을 비롯하여 한강유역의 신도시 건설은 오히려 낙랑군의 영향력을 실감케 해주었습니다.
3.낙랑군의 위치논쟁보다 더 핵심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뒤 생긴 한사군의 설치가 무슨 조선총독부인양 했던 일제의 이데올로기를 격파하는 것이라고 봅니다.그런데 그게 위치로 격파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먼저,위만조선은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정도의 성격밖에 없었습니다. 한반도내에서....그걸 반증하듯,설치된 임번,진둔,현도는 곧 고구려군에게 파괴되었습니다.(어떤 곳은 부임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제주도 하나가 망했다고 나라망한것처럼 설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저,제주도 사람이니 지역감정은 없습니다)
4.이덕일씨를 비롯해 낙랑,고조선의 대륙설을 '일제식민사학의 유산청산'과 맞물려 설파하는 것은 ....유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되고,아시다시피 유물은 북한과 만주에 있으니 우리가 손대기 어렵습니다(만일에,관련 유물과 논문이 북한이나 중국에서 나왔다면 저는 제 의견을 기꺼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겠습니다.)
5.낙랑군이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곳은 무력,직접통치를 기획하다 쫓겨난 것인데 반해 낙랑만은 간접통치였기 때문입니다.즉,위만조선(의 지배계급의 상당수는 위만과 함께 온 중국계)은 한나라의 무력에 무릎을 꿇었고,그래서 한나라가 이지역을 직접,무력통치를 했던 것이 아니라,한나라와 손잡은 위만조선내의 일부세력에 위임통치했다는 것이 가장 컸고요,두번째는 지리적 특성상 바다만 건너면 중국이라 선진문물이 끊임없이 유입되었습니다.
6.이미 평양에서는 낙랑계 고분을 비롯한 일군의 유적들이 발굴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루크레티아
09/09/18 11:53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아 그런 유적들이군요...역시 절대적인 자료의 부족과 동북공정이라는 일련의 왜곡들 때문에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안드로행 열차를 탈 가능성이 높아보이네요. 유물과 유적은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 낙랑군의 반도설을 부정할 근거가 더는 없지만...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한반도에 박혀있던 고조선을 아무리 정복욕이 출중한 한무제라도 일부러 와서 정벌할 만큼 한나라의 사정이 널널하진 않았을 듯 싶은데 말이죠.(게다가 그렇게까지 일부러 와서 고조선을 정벌했다면, 한반도 남부의 국가같지도 않았던 부족들도 모두 정복하거나 복속시키고 갔을텐데...)역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이 상황이 가장 답답한 상황이군요.
귀염둥이
09/09/18 12:20
수정 아이콘
저도 당연히 한사군은 대동강을 비롯, 한반도 내라고 봅니다.

유적과 유물이 이를 증명하고, 당시 삼한은 한사군과의 무역과 교류를 통해서 번성했습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면 한반도 남부의 삼한과 쉽게 교류를 하기도 어렵죠.
happyend
09/09/1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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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님//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한 이유는 땅에 욕심이 있어서는 아니었어요.남정을 끝내고 북벌을 해야 하는데,당시 북방은 흉노족이 강성한 때였지요. 고조선은 한나라에 형식적으로 조공관계를 맺으면서 우수한 씨앗과 가축의 종자를 받아오거나 철제무기(제조법은 비밀이었습니다.한무제가 소금과 철기는 국유화시켰거든요)를 얻어오면서 나름대로 힘을 길렀습니다.그래서 주변의 소국들을 복속시켜 힘을 길렀죠.
그런데 고조선은 무역국가였어요. 중국과의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진국(예전에 말씀드렸듯이 마한)을 비롯한 주변국가의 무역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이후 중개무역에 적극적인 낙랑군이 설치되었을 때 모든 주변국가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으니,마찰이 없었던거죠.낙랑군은 일종의 중개무역기지이자, 첨단산업의 출입구였던 것이죠.
문제는 고조선(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의 독점무역에 반대하여 인구 28만의 예군의 수장 남려가 한나라에 투항하는 등 정세가 불안해지고 있었죠.북벌을 위해 흉노랑 한판 붙을 준비를 한 한무제로서는 이런 고립을 피하기 위해 흉노와 사신을 주고받는 고조선이 눈에 가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흉노정벌전에 고조선을 제압해놔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고,그것이 고조선 멸망의 원인입니다.우거왕으로서는 독점무역권을 뺏기기 싫었겠지만, 낙랑처럼 중개무역으로 전환했다면, 주변 소국의 발전을 통해 언젠가 멸망하였을지는 모르나,조금은 오래버텼을겁니다.
어찌되었든 낙랑군이 설치되자 가장 먼저 이 유물이 퍼진곳이 바다를 통해,남해안과 제주도....가야를 비롯해 진한과 변한이 힘을 기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물론 일본(왜) 또한 이 무역의 수혜자였고요.
그래서 고조선만 멸망시키고,다른 부족은 관심도 없었던 겁니다.(현재,낙랑유적분포지는 전국을 다 포괄한다고 볼 수 있을만큼 광범위합니다)
대륙에 있었던 낙랑군의 유적은,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게 제 추측입니다. 낙랑군은 무역독점권을 폐지함으로써 고조선보다 쉽게 사방으로 영향을 미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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