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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21 22:29
이건 정말 무식한 질문인데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지구의 자전이라고 하나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건 다른 이야기 인거 맞나요?(지구가 태양계의 일부로서 태양주위를 도는것 공전이라고 하는거 맞나요?) 동양(여기서 동양이라는건 아랍을 제외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에서는 자전과 공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나요?
15/06/21 22:36
천동설이면 자전의 필요성이 덜합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없었는데 천문자료가 축적되면서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 지동설은 낮과 밤의 존재때문에 무조건 자전이 들어 갑니다. 애초 자전을 하지 않으면 낮과 밤이 하루일 수가 없죠.
15/06/21 22:52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아리스타르코스(BC 330-260)의 태양중심설에 따르면 공전, 자전 모두 인정했는데, 일반적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지구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태양이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구가 가만히 있는 것은 태양보다 열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천체의 원운동은 운동이지만 가장 덜 변하지 않는 운동이라서 신적인 거라 여겼던 건 맞는데, 지구의 위상은 [과학의 역사]라는 책을 슬쩍 읽고 급히 쓰느라 저도 낯서네요. 이건 고대 그리스 시기의 우주관이고 중세 기독교의 우주관에선 지구의 위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15/06/21 23:05
그렇군요. 기독교 신학의 존재위계상 물질에 위치하겠네요.
그리스 시대에는 별들은 신이거나 신적인 것이고, 특히 플라톤의 경우 별 안의 생명체의 경우 조물주 역할까지 합니다. 그리고 지구는 당연히 가이아라고 해서 신이죠. 또한 인간과 피조물들은 지구인 가이아나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인 바다, 강들의 작품이라 생각했죠. 그런 측면에서 보통의 그리스인들은 인간보다 지구를 더 우위에 두었을 것이고 신이나 신적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기독교 우주관과는 분명 달랐을 거라 추측이 되는데... 운동의 여부는 흠... 영혼을 가진 존재만 스스로 움직이고 다른 것(물체)을 움직이게 한다고 믿었는데, 별들이 움직이는 건 (눈에) 보이니 이건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기는 거죠. 즉 신으로.... 이걸 부정하면 무신론자가 되어 독신죄로 처벌받게 되죠.
15/06/21 22:35
새로운 걸 또 알아가네요. 코페르니쿠스가 성직자였군요;;;
근데 종교vs과학 갈등이 없었다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 없다 치더라도 지동설을 주장해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종교vs과학 갈등이 존재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15/06/21 22:56
교황이 주교이던 시절에 알고지내던 사이였고 출판허가를 받고 대화 편을 내놨는데 화자중 바보 란 이름의 인물이 평소 주교이던 시절에 하던 말을 주장하기끔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똑똑한 교수라고 귀여하던 아랫사람이 머리끝까지 기어오른거죠. 교황을 깐다고 베스트셀러까지 되었으니 더 열이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지동설과 천동설을 동등한 입장에서 주장을 나열한 것이고 허가까지 받았다고 항변했지만 등장인물의 이름과 다른 주장에서 교황을 바보취급한거라는건 이설이 없었습니다. 갈릴레오가 평소 친분과 허가를 악용해서 교황모독죄를 범한 것이 갈릴레오 신화의 이면입니다.
15/06/21 23:03
심지어 그 사건 이후 시에나 대주교 집에서 융숭하게 지냈죠. 가택연금인데 토스카나 공국에서 연금도 받아서 잘 살았구요.
솔직히 행동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은 최후였다고들 하죠.
15/06/21 22:40
말했다시피 당시 가톨리계에서 치열했던 진보와 보수의 싸움에 가깝습니다. 갈릴레이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사람에다 많은 지원을 받은
인물입니다. 반대파에서는 우르바노를 공격하기 위해 인격적으로 흠결이 많고 학계에서 적이 많은 갈릴레이를 공격하는게 좋은 것이죠. 특히 학계에는 갈릴레이 하면 이를 가는 세속 학자들이 충분하니 그들을 이용하면 갈릴레이를 실각시킬 수 있고 그럼 우르바노 8세와 그쪽 파벌을 공격할 좋은 빌미가 만들 수 있는 것이죠. 거기에 갈릴레이가 대놓고 자기 책에 자기 친구이자 지원자 우르바노8세를 핀포인트로 모욕해버리는 바람에.... 또한 지동설에 증거를 특히 왜 지구가 움직이는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못하는 바람에 학문적으로 천동설론자들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도 컸습니다. 뭐 이거야 나중에 캐플러나 뉴튼이 처리할 문제였지만요.
15/06/21 22:59
갈릴레오가 이론적으로 빈약했다는 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당시에 신학자 아닌 과학자는 극히 소수였습니다. 이론적인 설득이 가능한 인물군이 신학자들이었습니다.
15/06/21 22:42
당시는 귀족이거나 귀족처럼 생활할 수 있는 돈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일정수준 이상으로 공부하려면 성직자가 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니까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는 것을 종교와 과학의 갈등의 근거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본문에도 나와있습니다만, 갈릴레이가 교황빽을 강하게 믿다보니 적을 만들었고, 적들이 자신들의 수중에 넣은 '종교재판권'을 사용해서 갈릴레이에게 불이익을 준 거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니까요. 갈등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주체가 종교와 과학이었냐는 분명하지 않다는 거죠. 그리고... 시대 정황상 종교갈등이 극심하던 때라, 종교 내부적으로 의견을 통일시켜 과학(학계라고 봐야겠죠.)과 적대한다는 형태는 나오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말하자면, 당시 종교인들은 과학적 발견과 주장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15/06/21 23:08
갈릴레오가 피렌체의 메디치 대공의 강력한 후원을 받은 베네치아인이었다는게 정치적 암투의 발단이 됩니다.
메디치 대공은 메디치가문의 피렌체 공화국 전복에 항의하는 사람들과 메디치 가문중 정통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권위를 무너뜨리는건 종교에 둔감한 베네치아인 교수를 공격함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친구인 교황을 모독하기까지 했습니다. 종교인들은 과학적 발견과 주장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과학의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동설의 두 약점을 갈릴레오가 설명 못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갈리레오는 직선관성을 부정하고 회전관성이 맞다는 틀린 주장을 하였고 세차운동(공전시 별이 움직이는 현상)이 관찰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실험적 사실은 천동설이 맞다는 쪽이었습니다. 이런 단점은 케플러의 세가지 법칙의 발표 이후에야 이유는 모르지만 실험적 사실은 지동설이 맞는 것 같다는 쪽으로 여론이 넘어가면서 해소됩니다.
15/06/21 23:19
케플러 법칙이 없었을때는 천동설을 증명하는 결과가 이후에는 지동설을 증명하는 결과가 된다는 점은 참 흥미롭네요. 패러다임론의 좋은 예가 될려나요. 그러고보니 패러다임을 설명하는 예시가 천동설vs지동설이긴 하네요;;;;
정성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15/06/22 13:05
원을 도는 원, 주전원 개념이 타당하다는 생각 아래서 천체관측과 일치하는 공식을 만들어 내려면 지동설은 천동설보다 많은 주전원을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과학교과서에서는 화성의 운동 역전현상은 지동설로만 설명가능하다고 하지만 케플러 이전의 지동설은 주전원을 쓰지않고는 정확한 위치계산에 실패했습니다. 물론 천동설은 지동설보다 적은 주전원의 삽입만으로 계산에 성공했습니다. 화성의 역진은 도리어 천동설이 옳다는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주전원 없이 하나의 도형으로 설명가능하다는 것을 케플러가 보여준 뒤에는 지동설이 옳다는 근거로 작용했고 그게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논증입니다 교과서에는 거의 언급되지는 않지만 케플러 이전에 천동설을 배운 자들이 지동설이 옳다고 믿게 되는 계기는 금성의 운동이었습니다. 톨레미의 천동설은 지구보다 안쪽에 있는 별인 수성과 금성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태양과 수성 금성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가상의 직선 위에 중심을 둔 주전원에 수성과 금성이 위치하고 태양과 같은 속도로 돈다고 설명합니다. 수성 금성 태양이 꼬치에 꽂혔다는 설명인 셈인데 누가 봐도 이상한 모양새입니다. 이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설명하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동설을 지지하는 학자의 숫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은 갈릴레이의 제자들이 남긴 부정확한 진술과 우상화로 인해 실제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교과서에 남겨졌습니다. 후의 진화론 논쟁과 이미지가 겹치면서 기독교가 언제나 반과학적 입장이었다는 미신이 퍼졌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반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멀리 하게끔 하는 동인을 주고 있습니다.
15/06/22 01:44
마스터충달님이 나무위키 링크 거신 것 조금 읽어보고 PGR 댓글러들에 완전 쫄아가지구요 친절한 분이신 것 같아서 괜히 여기에 댓글을 크크.
애초에 과학의 부흥은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검색을 해봤어요. 중세시대의 과학은 기독교의 절친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대요. 현대의 창조론과 진화론(막연한 이론이 아니고 팩트로 인정되는)은 엄청난 마찰을 빚고 있지만 옛날의 과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고, 즉 철학이었으며 신의 전지전능함을 탐구하는 한 영역이었대요. 실제 중세시대의 교회는 아무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대요. 생소한 숫자 0을 금지하지도 않았어요. 그것이 정말이냐 아니냐 공방이 오고가지도 않았고요.(이건 제가 알고 있던거랑 많이 다르네요. 갸우뚱) 갈릴레오의 경우는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렇긴 한데요. 그건 카톨릭 교회가 가설로만 인정할 뿐인 것을 갈릴레오는 팩트라고 주장을 해서 법정에 서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건 과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로마 카톨릭계의 고압적인 자세 때문이라고 링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포스트작성자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정치적인 알력에 관한 것인 듯하네요. 중세시대 기독교가 과학의 선두에 있었음을 설명해 주는 건 뭐니뭐니해도 경제적 지원이었어요. 중세시대부터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카톨릭 교회는 과학연구를 주도적으로 지원해 왔어요. 성직자, 수도승, 수사들이 대학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교수 요목에 과학과 수학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는군요. 링크에서 조금만 옮겨보았습니다. http://blogs.nature.com/soapboxscience/2011/05/18/science-owes-much-to-both-christianity-and-the-middle-ages
15/06/21 22:43
갈릴레이도 반대에 부딪힌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회와 교황이 지지해줬었죠. 근대가 계몽적이며 이성적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고발한 도미니크 수도사들에 대해선 제 얇은 깜냥에선 긍정적으로 평가할 사건이 별로 없네요 크크. 프랑스 왕도 종교적 이유로 암살해 버린 이상한 집단이었죠.
15/06/21 22:48
그래서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도 나오죠. X통도 도미니크>>>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프란체스코 수도원
그 프란체스코 수도원 보다도 심지어 과학자들보다 더 과학적인 예수회 쪽에서는 절대 이해 못하죠.
15/06/21 22:58
마녀사냥도 그렇지만 중세시대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교적인 비이성보다 오히려 정치나 경제적인 이성을 이유로해서 벌어질 때가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더라요.
15/06/21 23:05
사실 중세라기 보다는 경제적 성장과 식량 부족이 공존했던 16~17세기에 이런 일이 많았죠.
중세 자체는 초기에는 생존 때문에 이런 헛지랄 하기에는 살기 어려운 시대였고 후기에는 나름 안정적인 경제성장과 식량생산 증가로 그렇게 살기에 나쁘진 않았거든요.
15/06/21 23:04
사실 데카르트도 갈릴레이 재판받는거 보고 쫄아서 책 내는걸 무기한 연장하기도 했죠. 그 이후에 이성에 대한 개념을 내면서 신의 완전성에 대한 얘길 하기도 했고... 크크 원체 소심하고 논쟁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5/06/21 23:07
솔직히 몸조심해야 하는 시기였죠. 과학과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왕에게 불순 분자로 찍히면 마녀로 죽는 시기니까요.
그런면에서 현명한 거죠.특히 프랑스 같이 위그노 전쟁 같은 정치적 혼란이 심한 동네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는 거 확정이죠.
15/06/21 23:16
누구나 조심해야할 시기였다만 위험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활에 간섭받는 모든걸 스트레스라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학문하기 좋은 네덜란드로 이동해서 쭉 연구했다고 합니다. 크크 데카르트를 보면 금수저가 학문을 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재밌습니다. 아침 11시나 오후 1시쯤에 일어나서 공상하다가 산책하고 밥먹고 책 읽거나 다시 공부. 그래도 학교 성적은 매우 좋아서 학교측에서 엄격한 교칙에 따르지 않아도 봐줌. 시비나 논쟁을 피해서 네덜란드로 가 꿀빨면서 책쓰기. 여러 나라의 학자, 공주와 서신교환... 죽은 이유도 여러 설이 있지만 추운나라인 스웨덴에서 일찍 기상해서 활동하는 바람에 건강악화되어 죽었다는 설이 힘을 얻고있죠.
15/06/21 23:25
글 주제와는 맞지 않습니다만, 새로운 학문이나 사실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굉장히 보수적이지요. 중세 시대는 그게 목숨까지 이어졌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모가지에 칼을 들이밀지는 못한다는 차이 정도요?
푸엥카레 추측 풀어낸 페렐만도 처음에 논문냈을 때, 파벌이 없으니 별의 별 욕 다 먹었죠. '논문에 성의가 없다', '요령으로 문제를 풀었다', '기하학을 미적분과 물리학으로 풀었으니 무효다' 등등. '확인'이라는 절차의 느낌보다는 어떻게든 까서 무효로 만들겠다는 느낌이 강하죠.
15/06/21 23:26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성경책만 들고 간게 아니라 과학책도 들고갔음을 생각한다면
기독교와 과학의 갈등은 통념보다는 그리 크지 않았죠. 마테오 리치, 아담 샬, 멘델 같은 예수회 성직자 겸 과학자는 예수회 내에서 예수회의 창립자인 이냐시오 로욜라만큼 존경받습니다. 다만 예수회가 다른 수도회보다 진보적이고 학구적이라는 면을 고려해야 해요. 공산주의가 가미된 신학인 해방신학에 앞장섰다는 혐의도 받을 정도니까요.
15/06/21 23:48
코페르니쿠스때나 갈릴레오때나 교황이나 추기경같이 종교계 최고위층의 사람들이 이런 이론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이 꽤 흥미롭네요
교황이라는 직책이 선출직인점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15/06/22 11:25
갈릴레오도 결국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더 컸던걸로 암.
역사적으로 보면 진정한 "종교" 문제가 과연 있었나 싶습니다. 그런건 있어봤자 결국 민중에게서 터지는 거지 상류층이나 권력층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종교나 학문으로 포장돼도 결국은 정치와 권력 돈의 문제더라고요. 종교란 피지배계층에겐 진리지만 권력층에겐 통제 수단일 뿐이라는게 역사적으로 보면 정말 그럴듯 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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