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뱃사람이었다. 몇 년 전, 다락방의 옆방에 살던 친구가 ‘내 고향 친구다. 인사해라’라고 그를 소개시켜주었을 때 나는 대학원생이었고 그는 화학 약품을 운반하는 배의 항해사로 일하고 있었다. 제법 특이한 직업이라는 생각을 하며 같이 포커를 치고 술을 마셨다. 아마 그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누가 누구랑 왜 섹스를 하는 지 연구하는 사회학과 대학원생이란 화학선의 항해사만큼이나 특이한 직업일 테니까. 그렇게 그는 가끔씩 항해 스케줄이 없는 날에 다락방에 놀러왔고, 그와 나와 옆방의 친구와 그 옆방의 친구는 포커를 치고 술을 마셨다. 몇 년이 지나 나는 공부를 때려치우고 바텐더가 되었고 그는 항해를 정리하고 항해 기술과 관련된 육상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끔씩 가게에 놀러오던 그를 보다가 언젠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 원래 피부가 하얀 편이었구나.
그가 배를 타던 시절, 우리와 함께 다락방에서 족발에 소주를 마시던 그 친구는 까무잡잡하고 강건한 느낌이었는데.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바에 앉아 향이 약한 맥주와 향이 강한 위스키를 추천해달라는 그 친구는 일상의 피로에 지친 얼굴이 하얀 회사원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저런 술을 마시고는 했다. 며칠 전, 꽤 늦은 시간에 그가 혼자 가게에 놀러왔다. 항상 친구들이랑 오더니 이제 혼자도 놀러오네. 그래, 이제 서울의 차가운 도시 회사원답게 혼자 바에 가서 술도 먹고 그래 봐야지. 하는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물었다. 너는 왜 이걸 하고 있냐. 술집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대학 나와서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왜? 항상 하던 이야기를 했다. 딱히 취직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딱히 취직하고 싶은 직장도 없었고, 공부를 더 하자니 상황이 좀 나빴고, 대학원 졸업할 때 학자금 대출도 몇 천 있는 지경이라 빚 몇 천 더 내봐야 이래 망하나 저래 망하나 이왕 망할 거라면 젊어서 망해보려고. 그냥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는 네 과거를 모른다. 너는 왜 배를 탔냐. 배 타기 전에는 뭐 하고 살았냐?
우리는, 그러니까 전직 뱃사람인 회사원과, 그의 고향 친구와, 그의 고향 친구의 친구인 내 친구는 옛 일들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름 서울 부도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월세가 십칠만 원인 다락방에 사는 학생들이 과거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할 게 뭐가 있겠는가. 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시한 이야기들을 주로 나누었다. 떠들다 지겨우면 포커를 치고, 매 판 돈을 딴 놈의 돈을 반 뜯어서 공용 저금통에 쑤셔 박고, 돈이 좀 모이면 족발이니 보쌈이니 시켜먹고. 틸트가 된 친구들은 술을 들이키고(내 바의 이름인 '틸트'는 포커 은어로 <멘붕>을 의미한다. 그 시절, 우리가 입에 달고 살았던 단어다). 빨리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이사를 가서 네놈들을 안 보지. 다행히 다들 취직을 했고 다들 그 집에서 나오기는 했는데. 그래도 딱히 변한 건 없는데. 그래서 너는 배 타기 전에 뭐 하고 살았냐? 배는 왜 탔냐? 이런 이야기 옛날에 했어야 했는데 왜 지금 와서 하고 있지 우리.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어서. 대학 갈 돈도 없고 먹고 살 것도 없어 막막했는데 항해 쪽으로 대학 가면 학비도 싸고 취직도 될 테니까 아무 생각 없이 갔지 뭐. 죽는 줄 알았다. 내가 원래 좀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인데, 뱃사람들 분위기는 또 그렇지가 않잖아. 수백 번 때려치울라 그랬어. 근데 어떻게 하냐. 먹고 살아야지. 막상 배 타보니까 그래도 탈만 하더라고. 끌려 다니는 인생이지 뭐. 요즘은 내가 너무 끌려 다니는 거 같아서 새로 일도 좀 배워보려고. 항해 기술 업무 말고 해운 영업 쪽 일을 배워 보고 싶어. 새로 배우는 거 없이 바다에서 배워둔 거 땅에서도 계속 써먹고 있으니까 기분이 안 좋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끌려가면서 살다가 그냥 죽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고 내가 전혀 모르는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해운 영업 쪽 일을 배워 보고 싶고 해 보고 싶어. 나는 네가 부러워. 너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찾으면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거 같으니까. 맥주나 한 병 더 주라. 같은 걸로.
맥주를 꺼내오며 대답했다. 딱히 나도 그렇게 열심히, 자유롭게 사는 건 아니야. 4년 넘게 장사했는데 아직도 세금 계산할 때마다 울화통이 터져. 장사 안 되는 날은 하루 종일 손님 두 명도 받고 그런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익숙해지질 않아.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점에서 좋기는 하지. 그런 주제에 또 아프면 드러누워. 치열함하고는 거리가 멀지. 애초에 공부 때려 친 것도 도망친 건데. 속 편하게 살고 있다는 점에서야 남들이 부러워할지 모르겠다만. 오히려 너야말로 지금 정말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 따위랑 다르게. 봐. 내가 네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냥 ‘내가 어릴 때 고생 좀 했으니 편하게 살아야겠다.’라는 생각 밖에 안 할 거야. 귀찮아 죽겠는데 새로운 일을 왜 배워. 내가 네 상황에서 새로운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건 ‘끌려가는 삶이 싫어서’같은 인간적인 이유가 아니라 ‘힘들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딴 일 해야지 씨발’이라는 이유였을 거야. 네가 잘 살고 있어.
그런가. 모르겠다. 잘 되겠지 뭐. 아무튼 고맙다. 그는 그렇게 맥주 두어 병과 위스키 두어 잔을 마시고 그의 삶 속으로 떠나갔다. 전직 뱃사람과, 바를 떠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치열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무운을 빈다. 내가 빌지 않아도 알아서 잘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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