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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6/05 01:44:05
Name 파우스트
Subject [일반] 문제로부터의 도망.
문제와 멀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세상에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것 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었다. 자기는 어렸을 때 방황을 그렇게 했단다.
자신이 학창시절 때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악마가 쓴 책을 읽고는 머릿속에 혼란이 들어찼고, 장자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에 점점 학업을 멀리하고 자연을 가까이하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멋있어 보였다.

그 때부터 내가 머릿속에 혼란이 들어차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다행히도 여자친구라는 정의의 힘으로 철학을 물리쳤고, 내가 성인이 되어서 마이클 샌델을 읽을 때까지 봉인 해둘 수 있었다. 책은 아주 쉽고 재밌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강력했으며 꽤나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다가왔다. 가장 현실적인 일부터.

내가 처음으로 세상일에 관심을 두게 만드신 분은 17대 대통령이었다. 그 분은 이상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항상 논란에 휩싸였고 나는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시사 문제들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시사를 신경쓰게 되니 그 다음에는 바로 직면한 군대 문제, 군대 문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젠더 문제, 또 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을 무렵에는 동성애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일에 관심을 안두는 사람들을 보면 참 무책임하게 여겨졌다.
왜 시민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할까? 왜 자신이 사는 사회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 걸까? 왜 사회가 마주한 문제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지 않을까? 눈팅하던 피지알에서 열심히 논쟁하는 내 모습을 보고, 참 웃기게도 나는 나를 이정도면 깨어있는 시민이 아닐까 셀프평가했다. 그렇다. 나는 깨시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 이불이 어딨을까..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내 나름대로의 해결을 찾아냈던 문제들에 누수가 생겼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알고 있던 지식들은 얕은 지식이었고, 세상에는 생각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많고, 그리고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들도 많았고,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그 때부터 나는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꼭 내가 사는 사회만 왠지 모르게 막장으로 치닫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이슈에 매번 신경을 쓰는 일은 고역이었다. 몇몇 댓글을 보다보면 혈액순환이 안 되는게 꼭 인생의 콜레스테롤같았다. 어떤 글을 보면 나는 절대 키배를 멈출 수 없을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얼마 안가서 키배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키배에도 펀치드링크 증세가 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후유증으로 요양하는 시간은 나는 나를 다시 되돌아 보게 만들었다. 내가 이때까지 주장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주장에 정말 문제가 없었을까?
나는 나를 너무 고평가 하는게 아닌가? 내가 있는 위치가 정말 정의로운 위치인가?

사실 생각해보면 답이 너무 당연한 물음이다. 누구도 자신의 위치가 정의롭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이 싸울 떄 정말 어느쪽으로든 쉽게 해결할 수 없을 것같은 문제들이 보인다. 나는 그제서야 예전에 내가 까댔던 '현실적인' 어른들이 이해가 갔다.
과연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요구하는게 당연한 일일까? 그게 무리라면, 그렇다면 적어도 답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은 해야겠지만, 그 노력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로, 가족들과 종교 이야기하다 머리싸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젠틀한 논쟁을 기대하기란 쉽지않다. 익명성에 힘입은 나는 내 입장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상대는 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해버린다. 나는 피지알에서 영화글을 쓰고싶고 또 사람들과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만, 내 사회적인 의견 때문에 내 글들을 제대로 봐주지 않을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와서 왜 적을 만들어야할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내뱉게 되는 가치관 발언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래서 나는 나에게 도망치라고 말해준다. 현실속의 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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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05 01:53
수정 아이콘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논쟁을 하는 틈에, 노인들은 현실에서 논쟁하고 참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가 사는 곳에 위안부 소녀상이 있습니다. 그 소녀상은 노인들의 청원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노인들이 편지를 주미 한국대사에게 보내고 하였습니다. 워싱턴 디시에 있었던 아베 규탄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아베노믹스와 아베를 논하는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같이 가자 했지만 말로만 관심 있어하고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규탄 집회 현장에서는 노인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 규탄집회를 위해 포항에서 온 노인 단체도 있었죠. 그 노인 분들은 아는 것은 젊은 사람보다 없을지 몰라도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또 네트워킹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연대하고 자기네들이 이익을 보존하고 쟁취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인터넷으로 부터 나와 현실에서 논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입장이 달라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노인들은 우리보다 각박할 때도 총 맞고 돌 들어가며 자기 생존을 위해 싸웠는데.. 우리는 연대하는 방법도 잃어버리고, 싸우는 법도 잃어버리고.. 정말 아쉽습니다. 진보, 보수를 떠나 우리 세대의 생존이 걱정되는 이 때, 도망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15/06/05 02:02
수정 아이콘
+1 좋은 글 감사합니다.
Arya Stark
15/06/05 02:03
수정 아이콘
그게 쉽지 않다며 현실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게 너무 부끄러워 지네요.
파우스트
15/06/05 02:39
수정 아이콘
댓글의 취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하지만 이전세대와 지금 세대의 정치참여 형태를 완전히 동치해서 볼 수 있는가 역시 물음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같은 문제의 경우 통탄할 현실이지만, 구세대 교육계층은은 이미 한국사를 오랜기간 학교에서 실효성없는 과목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띠라서 제대로 배우지못했기에 이 문제에 대한 중요성조차 겉핥기로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고 또 이를 이용해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대결로 이어보려는 언론과 집권세력의 영향도 무시못하겠구요.
그에 반해 비교적 최근의 일인 태안기름유출, 촛불집회나 세월호같은 사건에서 (촛불집회의 경우 그 정당성은 배제해두고서라도) 젊은세대의 참여율은 다른 세대에 비해 뒤지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피로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젊은 세대 중 인터넷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참여하는 계층도 분명 존재하는데 나머지 부동층 때문에 참여층이 체감하는 책임감은 배가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참여층의 일시적인 이탈에 옹호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의 이해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무책임함은 스스로의 자각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직자들이 제지해줘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제지는 커녕 방관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맥락들을 고려해도, 도망자는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Shandris
15/06/05 03:28
수정 아이콘
예전에는 키배 한 번 하면 서로 이런것도 가져오고 저런것도 가져오고 그랬는데,
요즘은 키배하면 일단 사람의 감정을 끌어내려는 시도가 너무 많더라요.
다들 쇼펜하우어의 그 책을 너무 많이 읽은건지...
파우스트
15/06/05 07:30
수정 아이콘
논쟁에서 중요한 건 이기는 게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현실이 너무 이기는 걸 강요하고 있긴합니다.
귀가작은아이
15/06/05 18:26
수정 아이콘
영화글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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