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녀를 만나고 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으며 하소연을 했다.
직장 이야기, 남자친구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등...
나는 푸념을 늘어놓는 그녀를 보다가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처음 반했던 그 순간을.
내 기억 속 그녀의 첫 모습은 매우 너저분한, 아니 좋게 말해 자유로운 복장이었다.
치마 밖으로 비집고 나온 교복 와이셔츠와 비뚤게 맨 넥타이, 그리고 치마 아래 받쳐 입은 체육복 바지까지.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반했고 그렇게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물론 그녀의 몸매가 좋았던 것도, 밝게 웃으며 메인 반찬을 듬뿍 담아주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렇게 그녀와 친구가 된 지, 그녀의 곁에 맴돈 지가 벌써 13년이 흘렀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었을 때도,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옆에 그녀는 나의 옆에 있었다.
나는 술김에 그녀에게 고백을 했던 적도 있고,
그녀는 자기는 나쁜 X라며 울면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던 적도 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둘 다 이불킥할 오글거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전 여자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그녀에 대한 마음을 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긴 시간을 돌아 작년이 되어서야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가 있었다.
사실 정리했다고 믿고 싶다는 게 맞을 거다.
그 후로 나는 그녀에게 내가 예전에 너를 좋아했다며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툭툭 뱉곤 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나 자신을 속이려 했던 거라고 대답하겠지...
18살, 한창 꽃다운 나이에 만나 많은 것을 공유한 우리가 30살이 되어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 졸업도 못한 내 처지를 안주 삼아 떠들고
서로의 연애를 상담하듯이 같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실 자주, 그녀에게 반했던 순간을 떠올리곤 한다.
그때마다 완전히 지웠다고 생각한 감정이 다시 나를 휘감는다.
가끔 농담처럼 나중에 결혼할 사람이 없으면 나에게 오라는 말을 하면
그럴까 하며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또 설렌다.
그리고 잠시 뒤엔 쓴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지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오늘처럼 그녀와 술을 같이 마신 게 거의 5년만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오랜만에 그녀와 술을 마시고 기분이 말랑말랑해져서
그래서 그런 것 같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꺼내지 못했던 이 이야기를 여기에 남기는 건,
pgr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속마음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나의 감정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의 13년을 되돌아보며 글을 써 본다.
고마웠다, 나의 행복이 되어 주어서.
내 10대의 끝자락과 20대를 함께 해준 너.
이젠 정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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