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5/05/29 18:41:54
Name 마티치
Subject [일반] 부산에 내려가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마티치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자게에 글을 남겨보네요.
필력은 허접하지만 그래도 그냥 한 번 글을 남겨보고 싶어서 남겨봅니다.


저는 30여년간 서울에서만 살고 있는 서울 촌놈입니다.
낯선 곳에 혼자 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20대 후반이 되서야 처음 홀로 여행을 떠났고 그 첫 여행을 부산으로 갔습니다.


겨우 하루 머무른게 전부였지만 부산은 참으로 멋진 곳이었습니다.
남포동 자갈치 시장과 태종대와 해운대만 갔음에도 서울과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저를 반하게 했습니다.
2012년 대선 전날이라 서울로 올라가려던 찰나에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유세를 부산역에서 본 것은 부산에 대한 좋은 기억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3년만에 부산에 내려가고 있습니다.
베프 어머님을 만나려구요.


제 베프 중엔 부산이 고향이지만 어설프게 부산 사투리를 쓰는 친구가 있습니다.
베프의 집안 사정으로 꽤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고등학교가 되서야 부산에 자리잡았고 대학교부턴 서울에서 있었기에 제대로 된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진 못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으로 좀 집요하게 놀려대곤 합니다.
그래도 그 녀석 마음엔 부산이 고향이란 생각이 늘 있나 봅니다.
본가도 부산이니까요.


한 달 반 전쯤 오랜만에 베프 녀석과 대학로에서 밥을 먹는데 뭐든 잘 먹는 녀석이 배가 아프다며 토하고 길거리에서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으나 진통제도 말을 잘 안 들었고 자세한 증세를 알기 위해 CT 촬영을 권유받는 상황이 되자 보호자인 저는 그 녀석 어머님의 연락처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뒹굴던 그 녀석이 있는 힘을 짜내어 개미만한 소리로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내 니한테 말 안 했나? 울 어무니 마이 아프시다."


하지만 그 녀석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님보다는 어머님께 연락을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프 고모님이 의정부에서 급히 올라오셔서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저는 근무하러 떠났고 아프시다던 어머님은 맹장+복막염 수술을 시작할 때쯤 아버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수술 다음 날.
저는 학원을 마치고 다른 약속에 가기 전에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을 안지 5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베프 어머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픈 구석 하나 보이지 않으셨고, 우리 아들이 좋은 친구를 둬서 다행이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죠.
칭찬에 익숙치 않은 저는 멋쩍은 미소로 답했고 어머님은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약속 장소로 가려하는데 뭐라도 주고 싶으셨는지 당신들 드시려고 사둔 주전부리를 건내시더라구요.
한사코 거절하다 사과 주스 한 캔을 받아들고 인사를 드리고 나왔고 그 때가 친구 어머님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어제 페이스북에서 부고 소식을 보고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베프인데도 어머님께서 오랜 기간 투병하셨다는 것도 몰랐다는 미안함과 어머님께 연락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짜내어 말하던 베프 녀석을 눕혀두고 연락한  것 때문에 더욱 악화되셨나 하는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마음을 주체못하다 냉수라도 마시려 냉장고를 여는데 그 때 받고나서 아직도 마시지 못한 그 사과 주스를 보는데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말씀하시던 베프 어머님의 모습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근무 일정을 조정하고 오늘 근무를 마치자마자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밀양이라니까 조금만 가면 도착하겠네요.
센 척 하는 베프 녀석은 분명 괜찮은척 할거고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울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안 울어야죠. 아마 지칠대로 울고도 남을 녀석일텐데 제가 울면 또 울까봐요.


감정을 못 이기고 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프지만 맙시다.
피지알에서도 아프신 분들 있는걸로 아는데 그 분들의 쾌유를 위해서 잠깐이나마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로또 1등
15/05/29 18:52
수정 아이콘
친구분께 많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15/05/29 18:57
수정 아이콘
아.. 힘내시고 친구분도 잘 위로해 드리고 오시기를바랍니다. 힘들 때 같이 울 수 있는 친구, 그 친구분도 마티치님을 친구로 둬서 행운이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리버리
15/05/29 19:05
수정 아이콘
장례식장에서 밤 지내시면서 친구분이랑 어머니 얘기 많이 해주세요. 좋은 기억 남았던 것도 다 얘기 해주시고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스터충달
15/05/29 19:07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 친구시네요.
선물세트
15/05/29 19:12
수정 아이콘
간만에 일찍 퇴근해서 혼자 술 한잔 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이 글을 보고 울컥하네요.
고향에서 병환 중이신 어머니 생각이 겹쳐서 더더욱 이 글의 내용과 그 친구분의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나봅니다.
모쪼록 마티치님의 친구분 많이 위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5/05/29 20:01
수정 아이콘
장례식에 온 사람은 잊을수가 없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와이어트
15/05/29 20:18
수정 아이콘
좋은 친구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냐옹냐옹
15/05/29 20:35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곧미남
15/05/29 20:51
수정 아이콘
아고.. 저도 올해초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신 이후 딱 한달전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정말 4개월내내 고생한 우리 가족을 위해 다음주 야구도 볼겸 부산여행 계획하고 있는데
진짜 이런일 함 치루고 나니 경사는 모르더라고 조사는 꼭 가야겠더군요 좋은 친구 두셨네요
아이고 의미없다
15/05/29 21:20
수정 아이콘
아마 어머님은 연락해준 마티치 님이 고마웠을 겁니다.
내려가서 잘 배웅해드리고 오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티치
15/05/29 23:35
수정 아이콘
인사 드리고 올라가는 길입니다.
피곤하긴 하지만 오길 잘 했단 생각이 드네요.
저 또한 앞으로 조사는 놓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별 볼 일 없는 글 읽어주시고 리플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
라이즈
15/05/30 00:10
수정 아이콘
조사에 멀리서 와준 친구보면 참 고맙고 큰 힘이 되더라구요.
딱히 뭐 더 신경써줄 겨를은 없었겠지만 정말 고마워할겁니다.
15/05/30 01:38
수정 아이콘
저도 오늘 정말 친한 회사 동기형 자살 소식을 듣고 심란합니다. 분명 수요일까지 웃으면 퇴근했는데, 목요일, 금요일 잠수 타더니, 결국...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8586 [일반] 아줌마들 혹은 아재들이 즐겨본 만화영화 [42] 드라고나5722 15/05/30 5722 0
58585 [일반] 차 밑을 떠나지 못하는 고양이 [13] 루비아이4765 15/05/30 4765 11
58583 [일반] 전 세계에서 스위스 시계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 Top10 [5] 김치찌개4258 15/05/29 4258 0
58582 [일반] 투모로우랜드 관상평 [20] 카슈로드5175 15/05/29 5175 0
58581 [일반] 한화가 위기의 5월 그 절정에 도착했습니다(맛폰) [90] 카롱카롱8529 15/05/29 8529 2
58580 [일반] 세계는 꿈꾸는 자의 것 - 어느 구직자에게 전하지 못한 말 [4] redder2373 15/05/29 2373 1
58579 [일반] [역사]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이야기 [22] 삭제됨3863 15/05/29 3863 6
58578 [일반] 길가던 70대 노인 무차별로 폭행한 10대 [84] Tad8232 15/05/29 8232 0
58577 [일반] 중동호흡기증후군 공중보건위기에 대응 하는 우리의 자세 [137] 여왕의심복89552 15/05/29 89552 58
58576 [일반] [복싱] 반칙!! 혼돈!! 파괴!!! - 리딕 보우 vs 앤드류 골로타 [34] 사장18022 15/05/29 18022 22
58574 [일반] 부산에 내려가고 있습니다 [13] 마티치5445 15/05/29 5445 15
58573 [일반] (나의) 영화 비평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48] 마스터충달6535 15/05/29 6535 8
58572 [일반] 로봇이 내 직업을 대체할 확률은? [78] Dj KOZE7333 15/05/29 7333 0
58571 [일반]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강정호 시즌 3호 3점 홈런,시즌 17타점) [17] 김치찌개4523 15/05/29 4523 0
58570 [일반] 전 세계에서 재산이 가장 많은 유대인 Top10 [10] 김치찌개5112 15/05/29 5112 0
58569 [일반] 글쟁이가 글을 쓰는 이유 [24] 스타슈터4349 15/05/29 4349 25
58568 [일반] 음력 달력 이야기 [16] swordfish-72만세8348 15/05/29 8348 11
58567 [일반] Pitch Perfect 2를 보고 왔습니다. [11] 60초후에5985 15/05/29 5985 0
58566 [일반] 육군 병장출신 공군하사전역 해군소위가 임관하였습니다. [17] Secundo8400 15/05/29 8400 0
58565 [일반] 해봐, 실수해도 좋아. [38] SaiNT8635 15/05/29 8635 8
58564 [일반] 아니? 화성 표면에 웬 인공 구조물이...?? [16] Neandertal8928 15/05/29 8928 15
58563 [일반] 행사의 관점에서 보는 걸그룹 이야기 [44] 좋아요17402 15/05/29 17402 13
58562 [일반] [해외축구] 이런저런 루머+팩트 [42] V.serum5997 15/05/29 599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