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5월24일 새벽, 병원에서 집으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의 상황으로 봤을때, 그 전화는 좋은 소식일리가 없었다.
다만 그 전화에 응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냉정했고,
전화를 끊고 우리에게 말하시는 표정 또한 담담했다.
"지금 당장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부랴부랴 정신만은 뒤로한채 모든것을 챙긴 우리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고 계신가요?"
"네, 지금 급히 가는 중입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최대한 빨리 오세요."
당시 고3, 어른들의 대화를 잘 이해하는 나이는 아직 아니였지만,
이게 내가 예상하는 "그 뜻" 이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미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나오기 직전이였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울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병원에 도착해 아버지를 내 눈으로 확인한 뒤,
그동안 억눌렸던 힘든 감정들을 모두 눈물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그날, 나와 3명의 동반자들이 함께 걷던 길은, 단 2명의 동반자만이 남게 되었다.
힘든 순간은, 힘든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을 납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힘든건, 그 과정을 거치는게 내 자신이 아닌 타인일 경우이며,
내가 해줄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을 때이다.
약 한달간 입원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동안 울수 없던 내 자신도 결코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던것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것을 납득할 시간이 필요했었고,
난 내 눈으로 결말을 확인하고서야 서서히 납득할수 있었다.
더이상 함께할수 없고, 내가 혼자 가야만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그날을 기점으로, 아버지라는 그늘 아래 접하지 못했던 세상의 뜨거운 햇빛을 보았다.
때로는 따스하기도, 때로는 너무 뜨거워 살갗을 태우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있어야만 하는지 원망스럽기도 하고,
당장은 대학 진로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대충 해도 될것같았던, 부모님의 기대 충족을 위했던 대학 진학이,
어느새 내가 짊어져야할 인생의 무게로 바뀌어 내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 결과 태어나서 한번도 해보지 못한 페이스로 악착같이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페이스가 아니였다면 내 성적이 위태로울지도 몰랐겠다.
대학을 가서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필요없는 학비걱정, 생활비걱정을 업고 있었지만,
친구들이 함께하자는 모임들도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내 잠을 줄이면서, 내 성적을 조금이라도 깎아 먹으면서 내어놓은 시간이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들이 가장 소중한, 내가 가고있는 길의 동반자였다.
함께 가던 길도, 때가 되면 누군가는 방향을 바꾸고,
누군가는 멈춰서게 된다. 조금 더 같이 갈수는 없겠냐고 되물어 보지만,
결국 멈춰설 사람들은 멈춰서야 하고, 나아갈 사람들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어째서 한명을 뒤로한채 갈 수 밖에 없는지 잠시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이 멈춰선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그리고 어느새, 내 주변에는 다른 동반자들이 생겨났다.
분명 이들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가고 제각기 다른 길들을 가겠지만,
지금 이순간 만큼은 내 인생의 동반자들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애초에 자립하는 것, 홀로서기라는 것은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였다.
특정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특정인을 제외한 타인과도 멋지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였다.
그때 그 이별 뒤 어느새 7년이 지났다.
한명의 신생아가 태어나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만큼의 시간.
그 날을 기점으로 타시 태어났던 내가 충분히 홀로서기를 해낼만큼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그때의 기억도 점차 무뎌져 간다.
물론 깨끗히 다 잊은건 아니지만, 내가 계속 나아가는데는 지장이 없다.
다만 그래도 일년에 이 하루만큼은 잠도 잘 안오고, 마냥 울고 싶기도 하다.
1년 364일을 열심히 살았으니, 오늘 하루만큼은 아버지를 위해 잠깐 묵도하고 싶다.
딱 오늘만.
내일부터는 다시 같이 길가는 이들과 함께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