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번째일지도 모를 한숨을 토해냈다. 분명 실내인데 입김이 났다. 이런 날씨라면 서울엔 진눈깨비가 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손을 대충 털어내고 시계를 보니 꽤 오래 일을 했다 싶었다. 야, 담배나 한대 피고 하자. 같이 일을 하던 친구가 멋쩍게 날 따라 나온다.
아이고 허리야. 이래 가지고 얼마 번다고 이러고 있냐. 아무렇게나 털썩 앉는 친구에게 담배를 건네며 돈 없어서 담배도 못 사온 놈이 뭘 그리 찡찡대냐며 핀잔을 준다. 근데 넌 일할 때 이렇게 아무렇게나 나와도 되냐? 친구는 담배를 입에 물며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했고,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휴대폰을 열어 전적검색사이트에서 주말을 수놓았던 나의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소소한 버프가 있었던 챔프로 캐리했던 경기를 살펴보며 cs도 돈도 레벨도 1등인 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게임 속에선 대한민국 1%인데.. 0.0001%인 페이커는 얼마나 벌까? 연봉 검색하면 나오려나? 나도 게임이나 열심히 했으면 돈 좀 벌었을텐데. 시덥잖은 생각이 손에 손 잡고 이어졌다. 에휴 코리아나냐 손은 왜 잡고 지랄이야.
날씨가 오늘따라 매서웠다. 군대에 있을적만 해도 체감온도가 위로나 아래로나 내 허리 사이즈보다 과할 때가 많았고, 불침번을 서면서 밖에 나가면 반팔티만 입고 살아도 여름겨울 할 것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게 얼핏 기억이 나 우스운 기분이 되었다. 그 시절 나의 많고 많은 생각들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종종은 궁금하기도 했는데 몇년이나 지나버린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이제는 정말 잘 모르겠다. 아 허리 아프다. 돈 벌어서 파스값으로 다 쓰겠네 시방 뭐하러 불렀어. 출근할때부터 끊임없이 투덜대는 친구의 주둥이를 보고 있자니 이쯤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다보면 알아서 일당을 챙겨주는 알바로 착각하고 온 건 아닌가 싶었다. 야 이노무 시키야 일자리 물어다줬으면 고맙다하지는 못할 망정 왜 이렇게 투덜거려 너 이럴거면 꺼져 임마. 이렇게 힘들줄 알았으면 안왔다 이시끼야. 별 같지도 않은 소리들을 내뱉으며 우리는 낄낄거렸다. 하긴 내가 하는 일 아무 것도 없으니까 잠깐 와서 얼굴이나 비추고 돈이나 받아가라고 뻥을 어마어마하게 치고서 이 놈을 데리고 오긴 했지. 별로 미안하진 않았다. 얘나 나나 돈 급한건 똑같을거니까..
난 지금 이도 저도 아닌 나이에 있는 게 아닐까? 담뱃불을 지져끄며 대충 본 휴대폰이 굉장히 어정쩡한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쓰잘데기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나가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손에 꼽고, 그런 사람들조차 나를 동년배 취급하며 무관심한 후배들의 눈길들 사이로 서로 어르신 대접해주기 바쁘다. 늘 하던 취업 얘기 연봉 얘기 지겹지도 않은 돈 얘기들 누군 어딜 붙었다더라 그때 면접보러 가는 애를 내가 만났는데 역시 날 만나고가면 잘 되는 것 같으니까 너희 면접 전에 고기나 사달라는 말같잖은 소리들을 주고 받는다. 학교에서만큼은 내가 가장 어른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인데, 정작 사나흘에 한번씩 ATM에서 마주하게 되는 통장잔액은 고스란히 빠져나가는 수수료만큼이나 구구절절하게 가슴을 파고 들어 갑갑한 기분이 들게 한다. 거기다가 그딴 몇자리 되지도 않는 숫자들은 머릿 속에 한참이나 낙인 찍혀 잊혀지질 않는다.
그래서 돈을 벌러 나오면 이런 식이다. 아르바이트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이 있을런지도 궁금하지만, 암튼 변변찮은 자격증도 없고 그저 그렇게 살아왔더니 내 가치 또한 그저 그런 정도라 내가 하는 일도 그저 그렇고 버는 돈도 그저 그럴 뿐이다. 신체 건강하니 몸으로라도 떼우며 한두푼씩 벌어서 하루가 멀다하고 써제꼈는데 한살 두살씩 나이가 먹으니 몸으로 하는 일도 녹록치가 않게 느껴진다. 경찰시험을 공부한다는 친구놈이 돈이 급해서 행보관 눈치 보듯 나랑 같이 수백여개의 박스를 각 잡고 옮기는 게 조금은 우습고 슬프게 느껴지는 것도 덤이다. 빨리 졸업을 해버렸어야 하는데, 병원에 가면 돈을 많이 벌려나? 구글에다가 대학병원 월급을 검색해보려다가 일이나 마저 하자 싶어 대충 쑤셔넣었다. 운 좋게 했던 꿀알바들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다. 꿀인지 히말라야 석청인지 목구녕에 쑤셔넣어봐야 알음직한데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꿀알바의 벌꿀통에는 이미 일벌들이 가득하다는 소식을 몇 차례나 거듭 확인한 뒤에 구한 알바였으니 그럴법도 했다. 하루라도 일찍 연락했으면 내 자리가 있지 않았을까? 아니야. 일이나 마저 하자. 이것만 하면 좀 쉬겠지? 저 멀리 사장님이 걸어오셨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촉이 바짝 고개를 들었다. 안됩니다 사장님. 일좀 그만 시키십쇼. 지금도 존나 힘듭니다. 데꿀멍한 나를 스윽 쳐다보던 사장님은 들고 온 믹스 커피 두잔을 건네주며 말을 꺼냈다.
"오늘 일 그만하고 퇴근해요. 박스가 너무 많아서 퍼질까 더 못시키겠다. 일당은 똑같이 줄께.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요. 내일 봐요"
"아 예."
꿀알바를 그리워하며 사장님을 미워했던 어리석은 나를 꾸짖었다. 아직 퇴근 두시간이나 남았는데 하.. 이득이여. 개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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