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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요약
"아직도 통상의 능력을 의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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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일기는 두 개입니다. 옥에서 나온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쓴 것과 8월 4일부터 다시 쓴 것이죠. 통제사에 재임명돼서 한창 바쁠 때부터를 다시 정리한 겁니다. 이 때 날짜도 헷갈린 상태라서 다시 정리했다고 합니다.
+) 이래저래 혼동해서 알고보니 명량해전은 9월 15일 아니었나 하는 떡밥도 있습니다.
그 중 첫번째 일기의 뒤에는 독후감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독송사, 송사(宋史)를 읽고 생각한 걸 쓴 것이죠. 여기에 우리가 끝없이 했을 질문, 어쩌면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계속 했을 질문에 대한 답이 있죠.
왜 그런 상황까지 처했는데도 나라를 위해 싸웠냐는 거요.
"아, 슬프도다. 그 때가 어느 때인데 이강은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했던가.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균(3만근)을 매단 것과 같아서, 한창 신하가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에 떠난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싹트게 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이를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이강은 송나라 사람입니다. 송에서 남송으로 가는동안 금나라와 싸울 때 주전파로 공을 세웠고, 정승(좌상)까지 오르죠. 하지만 계속 전쟁을 주장했고, 주화파의 반대가 계속되자 사직을 청했고, 그가 세운 정책들도 다 폐기됐죠.
뭔가 아쉬운 상황이고 때를 잘못 만났다 할 만합니다. 그래도 능력도 괜찮고 의기도 있었다 뭐 이런 정도의 평가가 가능하겠죠. 하지만 이순신의 평가는 위와 같이 매서웠습니다.
"(이강은 어떻게 해야 했는가?) 체면을 깎고 피눈물을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 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화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말한 것을 따라주지 않을지라도 죽음으로써 그것을 이어 가야 할 것이다. 이 역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을 따르고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미봉책으로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강은 그러지 않았으니, 어찌 신하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버렸느냐... 뭐 이런 것이죠.
참... 유교에서 말하는 '신하'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왕을 버린다, 그런 선택지는 아예 없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까지 처했는데도 말이죠. 왕에 대한 불만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명량해전 며칠 전에도 조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립니다. 만호에나 어울릴 김억추가 왔을 때 말이죠. 때를 못 만났다며 한탄하죠.
+) 근데 장군님의 엄격한 기준에 '무려' 만호씩이나 쳐 줬으니 능력은 있는 거 아니냐는 김억추 재평가설도 있습니다 (...)
말이야 조정으로 돌려말하고 신하들로 돌려 말하지만 그 끝에 선조가 있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 불만을 그저 삭이는 성격도 아니었구요. 허구헌날 장계를 올려서 주장하고 요구하고 따진 게 이순신인데요. 하지만 그것도 신하로서의 도리일 뿐, 왕에게 덤빈다거나 왕을 무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죠. 군군신신입니다. 신하는 신하답게 해야 했습니다. 왕이 왕답지 못한 상황에서도 말이죠.
이런 태도가 그를 무武의 길로 가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은 자기 뜻을 받아주지 않으면 사직하는 게 조선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유행이었죠. 재야에서도 계속 상소를 올려 무언가를 주장하면서도요. 아예 재야에 있는 게 깨끗함으로 인식되구요. 이순신은 이런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이럴려면 차라리 무신이 나았겠죠. 조정에서 무슨 일이 있든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거요.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히 쓰러져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갔다.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엇다. 그들은 울부짖고 곡하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하였다." - 난중일기 8월 6일
"점심식사 후에 길에 올라 십리쯤 되는 곳에 이르니 길가에 노인들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 8월 9일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나라를 구하는 것, 그보다 중요한 건 없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걸 버리고 은둔하는 것도, 멋대로 죽는 것도 안 됐습니다.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고,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나라 구할 도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온갖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상황, 적을 무찌를 방법을 찾는 게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을 겁니다. 이 적은 최소한 마음껏 분노하고 때려죽일 수 있었으니까요. 저 한양에 있을 적들보다 훨씬 낫죠.
통제사에 재임명되고 경상도를 떠나 전라도를 누비면서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병력과 물자를 모으려 했습니다. 또한 적을 이기기 가장 좋은 곳을 찾았습니다. 모은 병력은 겨우 13척이었지만, 최적의 장소는 찾을 수 있었죠.
명량,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를요.
적고 피난민들은 13척밖에 안 되는 조선 수군을 계속 따라왔습니다. 다 믿기는 힘들었지만 적들이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후 한양으로 올라가려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더 이상 물러나면 안 됐습니다. 여기서 적들을 상대해야 했고, 깨뜨려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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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해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뭐 장수들이 잘 싸워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배설이 딱히 특이한 건 아니었죠. 그가 대놓고 튀었을 뿐 다른 장수들도 겁 먹고 튀려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이유든간에 천 척이나 되는 적과 싸우라는 건 도망가기에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판옥선의 이점은 여전했고 화포의 힘 역시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양이 너무 적었죠. 그래도 명량이라는 장소의 이점 역시 좋았습니다. 여기서라면 해볼만 했습니다. 죽을 각오로 싸울 수만 있다면요. 우수하지만 너무 적은 아군, 겁 먹은 부하들, 이순신은 여기에 그 자신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끼워넣습니다.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요소로 말이죠.
9월 16일 아침,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조선 수군을 덮쳐옵니다. 수군 역시 출전했죠. 목표는 명량해협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배들은 무서워서 물러났고, 김억추는 저 멀리 가 버렸습니다. 상선(대장선)에 탄 장수와 병사들이라고 마음이 달랐겠습니까. 한 사람만 생각이 달랐다면 상선 역시 뒤로 물러났을 겁니다. 그 뒤가 어떻게 됐을진 몰라도 말이죠.
오자병법에는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고 했습니다. 위의 말은 이 말을 조금 바꿔서 한 것이죠.
네, 단 한 사람이요.
"나는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의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대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뢰처럼 맹렬하였다.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상선은 홀로 1백 30여척이나 되는 적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적들은 계속 다가왔고, 상선을 계속 포위했죠. 뒤의 배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가서 부르려니 적들에게 이미 포위돼 있고 갈 수 있더라도 물러간 틈을 타서 적들이 더 들어올 수 있었죠. 그저 싸워야 했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렇게 달랬죠.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스스로 부드럽게 달랬다고 적고 있습니다만 정말 부드러웠을지는 모르겠군요.
한편 피난민들은 도망가라는 설득에도 멀리 가지 않고 근처 육지에서 싸움을 지켜보았습니다. 행록에는 이들이 적의 배를 세었는데 삼백까지 세고 그 이상을 세지 못 했다고 하죠. 이어 홀로 포위돼서 싸우는 상선을 보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며 통곡했다고 하죠.
"우리들이 여기 온 것은 다만 통제사 대감만 미독 온 것인데 이렇게 되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하지만 곧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얼마 있다가 다시 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나는데 공이 탄 배는 아무 탈 없이 우뚝 서 있었다." - 행록
네, 단 한 사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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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참전한 조선 수군은
애초에 수가 적기도 하거니와 난중일기, 실록 등을 통해 규모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 이순신
조방장 배흥립
전라좌수영 소속 - 회령포만호 민정붕. 발포만호 소계남. 녹도만호 송여종
경상우수영 소속 - 미조항첨사 중군장 김응함. 영등포만호 척후장 조계종. 안골포만호 우수. 거제현령 안위. 평산포대장 정응두
전라우수영 소속 - 전라우수사 김억추. 가리포첨사 이응표. 해남현감 류형
경상우수영 소속 배들만 탈출했다는 생각과 다르게 의외로 3개 수영이 적절히 들어가 있습니다. 배설이 이끌고 탈출한 게 7척이라는 보고 (같이 탈출했다는 옥포만호는 없죠) 와 거제현령, 해남현감 같은 짬찌끄레기들 (...) 은 자기 배 타고 참전했는데 순천부사 우치적은 없고 강진현감 이극신은 상선에 타고 싸운 점 등을 보면 자기 배 타고 도망친 자들은 자기 배 타고 싸웠고, 아닌 자들은 상선에 타고 싸웠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외에도 배 타고 탈출한 자들이 더 있을거라는 추측도 가능하고 말이죠.
안위, 김응함 - 송여종, 정응두 - 김억추를 제외한 다른 배들 순으로 합류했는데 이 순서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김응함은 중군장으로 대장의 명령을 받아 모든 함대를 지휘하는 역할+상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런 그가 도망쳤으니 가장 먼저 올 만 하죠. 그런데 의외로 먼저 온 건 안위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짬이 딸렸다는 것 (정응두의 품계가 더 높았는진 알 수 없지만 정응두도 3~4번째로 오죠) , 부산왜영방화사건으로 이순신 파직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책감,
이순신을 짝사랑한 것 그냥 개인적으로 이순신과 친하고 능력을 인정받은 편이었다 뭐 이런 쪽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의외인 점은 배흥립과 류형입니다. 배흥립은 임진년부터 수군의 네임드였고, 칠천량해전 때도 배설과 함께 주장 원균을 버린 두 대표로 지목됩니다. 그런데 그가 왔다는 말이 없을 정도로 늦게 왔다는 거죠. 이럴 땐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합니다. 한편 이응표 역시 이억기를 버린 대표로 지목됐었죠.
류형은 이운룡과 함께 이순신이 후계자, 양아들 수준으로 신임했던 사람입니다. 그도 안 왔네요. 뭐 이 경우는 어쨌거나 상급자인 김억추가 안 간 상태였으니라는 말도 가능하긴 합니다.
민정붕은 해전 얼마 전에 피난민 위덕의에게 판옥선을 빌려준 죄로 곤장을 맞았습니다. 죄를 짓긴 했지만 도망도 안 갔고 물자라도 마련해 보려고 한 게 아닐까 싶은데... 도우러 가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한편 일본군의 규모는 난중일기에 적힌 133척으로 봐도 문제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 구성이죠. 확실한 건 수군대장 도도 다카토라와 전사한 구루지마 미치후사, 간 마사카게 정도입니다. 정황상 여기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도 참전했을거라 예상하는 거죠.
그 외에 간양록의 저자 강항이 '배로 무안에 간 자'라고 설명해 놓은 육군 다이묘들이 있습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인데 이 병력이 해전에 직접 참전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군감 모리 다카마사의 수군 주진장(主進状)에는 전주에서의 회의로 수군이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10일에 큰 배는 강에 놔두고 출격, 전라도의 포구와 섬들을 수색하며 진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16일(조선력으로 15일인데 진짜 명량해전이 15일인 걸지도요)에 조선 수군을 발견, 공격했죠.
도도 다카토라의 가문 기록 고산공실록에는 조선 수군이 유속이 빠른 해역에서 속도가 느려지는 곳, 스이엔이라는 곳에 (전라우
[수영]이요)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수군 장수들끼리 모여 공격해야겠다고 결정했고, 유속이 빠르니 큰 배는 못 타겠다 싶어 세키부네로 갈아타고 싸웠다고 하죠. 다만 적선 중에서 대선이 있다는 난중일기의 묘사로 봐서 다이묘급은 여전히 안택선 내지 큰 세키부네를 탄 것 같습니다.
+) 칠천량 해전 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일부러 대선으로 갈아타고 싸운 것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판옥선이 명량해협에서 잘 싸웠던 거 생각하면 아다케후네(안택선)로 바다에서 싸우는 것 자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고 봐도 될 겁니다. 큰 배로 싸우는 건 판옥선에 대항하려는 일본군의 작전 중 하나였고, 이렇게 작은 배로 갈아탄 게 일본군의 패인 중 하나였습니다만, 솔직히 크게 다르게 볼 필욘 없습니다. 임진년 내내 판옥선 vs 세키부네나 그보다 더 작은 고바야로 싸웠거든요 -_-;
이 때 일본군의 마음가짐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말 당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 필요한데 없으니까요. 하지만 자기들도 유속이 빠르다고 하면서 바로 돌격한 것과, 현장엔 없었지만 날마다 기록해 놓은 케이넨의 일기를 보면 뭔가 서두른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습니다. 충청도까지 따라갔던 케이넨은 명량해전이 벌어질 무렵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정박해 있는 포구'로 가기 위해서였죠.
최소 삼백척 이상부터 천척까지 갈 것 같은 일본군이 정작 싸우는 건 133척이었다는 것과 수가 아무리 많아도 자기들이 불리한 걸 알면서 빠르게 승부를 건 것, 그리고 충청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항구를 향해 후퇴하고 있었던 상황, 이런 걸 보면 일본군이 급하긴 급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당시는 9월 중순이었습니다. 양력과 다르게 조선의 달력은 10월부터는 겨울이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초겨울까지는 모든 걸 끝내고 이듬해를 준비해야 되는 상황이었죠.
둘 중에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 둘로 압축할 순 있습니다. 13척밖에 안 되니 조선 수군을 무시하고 바로 뚫자고 한 것이든가, 그 이순신이 다시 왔으니 13척밖에 안 될 때 지금 뚫어야 된다고 생각했든가요.
어느 쪽이든, 차라리 야습을 반복해서 조선 수군을 계속 후퇴시키고 도망갈 놈 더 도망가게 만드는 게 일본군에겐 유리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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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의 이점은 확실했습니다. 이순신이 탄 상선은 원래의 경상우수영 상선, 다른 판옥선보단 컸을 겁니다. 여기다 강진현감 이극신이 탄 걸 보면 일단 다른 배보다 병력이 더 많으면서 배가 없으면서 합류한 장수들도 탔을 거구요. 기본적인 병력이 다른 배보단 많이 탄 상태였습니다.
적들이 포위를 해도 올라가려면 사다리를 걸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영화 명량처럼 바로 올라탈 순 없었죠. 크기 차이가 있었으니까요.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되는 거였습니다. 화포랑 화살을 미친듯이 쏘고, 올라오는 놈들 찌르면서요. 공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격하는 쪽은 유속 때문에 발을 제대로 딛기도 어려운 환경이었죠. 막는 쪽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되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렇게 적들은 왔다가 물러났다 했습니다.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는 아닐 겁니다. 모리 다카마사부터가 판옥선에 낫을 걸었다가 총알과 화살을 퍼붓자 다른 배로 옮겨타서 도망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해석에 따라 판옥선에서 낫을 걸어 다굴했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그리고 모리 다카마사가 정말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겠습니다) 다른 배들도 마찬가지였죠. 화포로 싸우더라도 대장군전으로 싹 쓸어버리는 수준이 아닌 이상은 격군들까지 쓸어버릴 순 없습니다. 화포와 화살로 전투원들을 몰살시키니까 격군들이 죽기살기로 도망치는 상황으로 봐야죠.
그런 상황에서 아군을 부르고 명령을 내리는 초요기를 올립니다.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이 반응했고, 거제현령 안위가 그보다 더 빠르게 왔죠. 어이구 그래 오긴 왔구나. 근데 욕은 먹어야겠죠?
"
네 이놈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안위는 곧바로 적진에 돌격합니다. 이어 김응함이 왔죠.
"
너는 중군장이 돼서 피하기만 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다.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처형의 형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
김응함 역시 적진에 돌격합니다. 이렇게 세 척이 됐습니다.
거제현령 안위, 저평가를 넘어서 존재감이 많이 약한 편입니다. 임진왜란이 임진년 쪽에 집중되고, 조선 수군 쪽도 그런 편이니까요. 하지만 능력은 확실한 걸로 보입니다. 그 역적 정여립의 친척인데도 벼슬길에 올랐으니까요. 임진년 승전에 참가 못 해서 벼슬은 낮았지만 부산왜영방화사건으로 공도 세웠구요. 그게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_-; 이순신을 옥죄여서 문제였죠.
+) 정여립의 친척이라는 것과 난중일기에서 '안위가 망령된 말을 한다'는 것을 통해 밀덕 쪽에서는 안위가 이순신에게 반역을 주장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편입니다.
이 때 안위는 김응함보단 더 깊게 돌격한 모양입니다. 적장은 휘하 배 2척에게 안위의 배를 공격하라 명했고, 죽도록 싸웠지만 백병전을 허용하게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백병전 허용은 곧 조선군의 전멸을 뜻했죠. 그렇게 놔둘 순 없었습니다.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고, 안위의 격군 7, 8명은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니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각기 죽을힘을 다해서 혹 몽둥이를 들거나 혹 긴 창을 잡거나 혹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난격하였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기운이 다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이렇게 안위의 배에 달라붙은 적선 3척을 깨뜨립니다. 이 시점에 송여종과 정응두의 배도 왔죠. 그리고 여기서 왕건이를 하나 건집니다. 바다에 떨어진 적들 중에 흉악하기로 소문난 '마다사'라는 놈을 찾아낸 거죠. 항왜 준사 덕분이었습니다.
이순신은 김돌손을 시켜 마다시를 낚아서 토막내서 걸게 합니다. 이걸로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하죠.
이 마다시는 흔히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지마 미치후사로 봅니다만, 역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가 맞을 듯 싶습니다. 일단 이름이 딱 마다시잖아요.
이렇게 적을 깨부수고 '마다시'를 참수합니다. 해류가 조선 쪽으로 와야 마다시의 시체가 판옥선으로 흘러올테니 정오가 될 때까지는 적 함대 하나를 깨부쉈다는 얘기가 되겠죠. 명량해전은 아침 6시 정도부터 오후 4~6시 정도까지 제법 긴 시간의 전투였습니다. 정오쯤까지는 조선군 쪽으로 해류가 흐르고 있었구요. 이 덕분에 조선 수군이 유리했다고 하기엔 최근 이민웅 교수의 연구로 전투를 지속하기에도 힘겨울 정도의 유속이었다는 주장이 나왔죠. 반대로 생각하면 일본군도 정말 배를 컨트롤하기 힘은 상황이었겠지만요.
고산공실록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자기 배에서 앉아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한편 '마다시'는 바다에 떨어진 걸 조선 수군이 건져서 (행록에는 살아있는 상태였다고도 합니다만) 매달았죠. 이렇게 적장 두 명을 잡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휘하 함대도 박살냈구요.
이제 해류가 바뀝니다. 조선 수군에서 일본 수군 쪽으로요.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올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각기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어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고산공실록에는 "선수(船手)와 가로(家老)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저기서 선수와 가로의 범위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도도의 직속 병력만인지 일본군 전체인지 말이죠. 어느 쪽이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 피해를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다 고산공실록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전사, 도도 다카토라의 부상,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졌다는 것도 적고 있죠.
모리 다카마사는 자신과 도도가 조선 수군을 직접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보고합니다. 그것도 판옥선에 올라타서 싸우다가 (...) 부상을 당하고 바다에 빠졌다고 말이죠. 고산공실록에서도 적을 공격하려다가 되려 당했다는 쪽으로 다루고요.
믿기 어려운 상황이죠. 도도 다카토라는 총대장이고 모리 다카마사는 군감입니다. 일본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확인하고 그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은 거죠. 이런 군감이 직접 전투에 나선다?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거기다 이건 오후 4시쯤이 돼서 '본격적으로 적을 토벌하려고 하자 적이 지리를 잘 알아서 도망가 버렸다'로 마무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죠.
한편 고산공실록은 아군의 피해가 컸다고 마무리했고, 적을 피해 도망갈 때 일본군이 뱃길을 잘 알아서 도망을 잘 갔다로 마무리합니다. 이 쪽이 진실에 가깝겠죠. 하지만 여기서도 다른 한편으로 수급 380여급을 얻었다는 말을 첨부합니다. 이런 꼴이니 자기들이 공격하다가, 그것도 판옥선 위까지 올라갔다가 부상당했다는 둥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거죠.
그렇게 저녁이 됐습니다. 신나게 적을 공격하던 조선 수군은 다시 바뀐 물길을 타고 귀환합니다. 그 바다를 계속 지키고 싶었지만 여전히 적은 많고 아군은 적었죠. 결국 우수영을 버리고 북상을 선택합니다.
"우리의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었다."
자신이 다 계획하고 한 것이었지만, 그 자신 역시 그 결과를 믿지 못 했을 겁니다. 적이고 아군이고 다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직접 싸운 적장들, 멀리서 그 소식을 들었을 육군들, 겨우 13척을 이기지 못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겠죠. 아군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정말 죽었구나 하고 싸웠는데 이겨버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요.
이렇게 명량해전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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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 31척 격침, 전투의 규모 및 임진년 해전의 전과를 생각하면 적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은 물론 고산공실록과 생각해 봐도 너무 차이가 납니다. 이건 간단히 추측할 수 있죠.
임진년의 해전들은 안골포 해전과 부산포 해전을 빼면 적들을 포위하거나 육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각기 한두척씩 잡아서 불태우는 과정을 거쳤죠. 명량해전은 이게 안 됐습니다. 적 전투원을 몰살시켰더라도 적 격군들이 살아서 도망갈 수 있고, 화포나 화살로 적당히 두드린 적들 역시 도망갈 수 있죠. 목선은 완전히 가라앉히기 힘든 편이고, 명량해전은 이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군은 너무 적었고, 적들이 바뀐 해류를 통해 도망가기도 쉬웠으니까요. 그렇게 완전히 가라앉힌 배가 31척이라고 봐야겠죠. 전투가 끝난 후에는 조선 수군이 곧바로 후퇴했구요.
이 해전의 의의는 간단합니다. 적들의 수륙협공을 좌절시킨 거죠.
9월, 일본군도 무작정 진격을 계속할 순 없었습니다. 7일의 직산전투를 통해 명군이 맞선다는 걸 알게 됐고, 겨울을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병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습니다. 명군 조선군 다 합쳐도 일본군보다 부족했고, 질로 따져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일본군도 신중해야 했습니다. 임진년처럼 무작정 밀어봤자 후방이 끊길 수 있었으니까요. 거기다 의욕도 임진년보다 훨씬 떨어진 상태였구요.
이런 선택의 길목에서 명량해전이 일어납니다. 결국 일본군은 미련 없이 후퇴하죠. 조선 수군이 후퇴한 틈을 타서 수백척이 전라도 서해안을 휩쓸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이 병력이 그냥 그 정도까지만 목표였던 걸까요? 글쎄요. 배를 수백척씩 동원했는데 목표가 서해안 마실 갔다오는 정도였을 리는 없습니다. 전라도를 이미 거의 장악한 상태였고, 보급에 써도 부족한 배를 수백척씩이나 동원한 상황이니까요.
이후 일본군은 다시 바다를 포기합니다. 아니 뭐 최대한 병력 긁어모아서 대규모로 공격하려고 마음 먹는다면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패배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죠. 겨우 13척도 이기지 못 했습니다. 이 상태에서 더 싸우라구요?
조선 수군이 오면 도망칠 뿐이었고, 도망칠 수 없으면 그냥 두드려맞을 뿐이었죠. 이런 상황에서는 다시 진격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유재란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버티는 형국으로 바뀝니다. 더 진격할수도 없고 후퇴하자니 히데요시가 무서운 상황이 된 것이죠. 여기다 패하긴 했지만 울산성 전투를 통해 조명연합군이 세게 나오면서 공격하려는 의지를 더 잃기도 했구요. 물론 조명연합군도 힘으로 쫓아낼 순 없다는 걸 절실히 느껴버렸습니다만.
이렇게 명량해전은 끝 납니다. 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리면서요.
조선 수군은 이제 재건에 돌입합니다. 적을 이 땅에서 몰아낼 날을 기다리면서요. 원수를 이 바다에서 무찌를 그 날을 위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