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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1/12 22:38:31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먹는 낙(樂)
[1]
난 화요일, 갑자기 극심한 몸살을 앓게 되었다.
병원에 가니 두통을 해결할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고, 해열제도 두가지를 처방해 주셨다.

"별로 큰 탈 없으시면 여기 파란녀석을 드시고, 만약 열이 오래동안 내리지 않으면 캅셀처럼 생긴 요놈을 드세요"
"아...네."

처음엔 그 말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저녁이 되도 열은 39도에서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캅셀같은 녀석을 먹기로 결정했다.
약기운이 온몸을 지배한체 서서히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2]
열은 약간 내린듯 하다. 하지만 약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열이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다.
밥은 먹어야 약을 먹을테니 아침에 먹을 죽을 사러 갔다.
근데 죽집을 잘못 골랐나? 죽이 정말이지 맛이 없다.

이 맛은 마치 죽의 재료를 솥에 넣고 수년간 끓여 죽재료속에 존재하는 모든 향과 맛을 제거한듯한 맛...
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밥맛이 없어서 유독 맛없게 느껴지나보다...싶어 그냥 넘어갔다.

근데 이 죽.... 짜긴 또 엄청 짜다. 소금맛은 오래 끓여도 제거가 불가능한가보다.


그렇게 반 억지로 죽을 다 먹고, 약을 먹고 또 잠에 들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몸상태가 조금더 나아진듯 해서, 죽 말고 다른것을 먹어보기로 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국수가 있는데 그것을 먹기로 했다.
"분명 이 맛이라면 아침에 먹었던 죽의 호러블한 맛도 잊어버릴수 있을 터!"

하지만 국수를 한입 먹고나서 넌 현실을 깨달았다.
분명 맛있는 국수였을텐데,
그걸 고무줄을 먹기 편한 사이즈로 잘라 간장에 적당히 버무린 맛으로 느끼는 나의 혀는 지금 100%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나의 미각이 비정상이 되었다.
[틀렸어... 이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나에게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3]
그뒤에도 여러가지 음식을 먹었지만, 결과는 참담 그 자체.
모든 음식에서 난 소금맛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짠맛만 나는 국수를 억지로 먹은게 탈이 났는지,
속이 꽉 체해버렸다. 뭘 더 먹으면 토할것만 같았다.

어짜피 먹어도 지금은 소금맛밖에 안나니... 그냥 포기하고 굶기나 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식욕을 단념하고 하루를 굶었다.
근데 묘하게도 체한게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속에서는 신물만 올라오고 배는 더부룩한 그대로다.

한숨만 나오는 상황에 순간 마음이 울컥 했다.
"하아... 맛있는걸 먹어본지도 3일이상 넘었는데! 이건 너무 고통스럽잖아!"

갑자기 어머니가 해주신 맛있는 음식들이 떠올랐다.
자취하면서 어머님 음식을 먹은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이제 더이상 그 맛을 보지 못하면 어쩌지?
오만가지 우울한 생각이 났다 (...)

갑자기 치킨이 떠올랐다.
오오. 치킨....오오....
근데 지금 먹으면 소금맛밖에 안나겠지....
하지만 난 지금 심지어 체했잖아? 안되겠네 이거.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나는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깨어봤자 낙도 없는 삶. 그냥 다시 자러나 가야겠다.

약 따위는, 밥도 안먹었겠다, 그냥 그만 먹기로 했다.
두통은 이미 많이 사그라들은 상태였고,
먹는걸 제대로 먹지 못한 나에게 두통은 이미 뒷전이였다.


[4]
그렇게 하루가 또 흐르고,
한줄기 희망이 드리웠다. 위가 다시 활동을 하고 있는듯 하다.
약기운이 몸에서 달아난 탓인가? 혓바닥도 뭔가 항상 끼어있던 쓰고 짠맛같은게 많이 없어졌다.
그때 본능적으로 나의 몸은 음식을 넣어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뭔가 맛있어보이는 빵을 하나 샀다.
한입 베어먹었다. 근데 맙소사!
맛이 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간의 고통과 인내와 설움이 목에 매어 빵이 좀처럼 잘 넘어가지를 않았다.
눈물에 젖은 감격의 빵이란 분명 이런 맛일 것이며,
내 올해 가장 감명깊었던 순간중 TOP을 고르라고 하자면 이 순간은 분명 그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사람의 일상속에서 먹는 낙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에 벅차올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5]
"아 이거요? 알레르기성 두드러기네. 뭘 잘못먹은지 짐작이 안가면 당분간 야채만 드시는게..."
...

("의사양반, 이게 무슨 말이오?!")

바로 다음날 병원에 가서 들은 말이다. 사실 난 뭘 잘못먹은지 모르겠다. 근데 뭔가 잘못 먹은것 같았다.
근데 알길이 없으니 자극적이지 않은 야채만 먹으라고 조언해 주셨다.

결국 "다음날 무슨일이 있어도 치킨을 먹어야지!"는 두드러기가 가라앉은 뒤로 미뤄야 했다.
여기에서 무리해서 치킨을 먹으면 유게에서 말로만 듣던 치킨알레르기라는 것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꾹 참고, 3일만이라도 식단을 조절하기로 했다. 굳게 마음먹고 며칠동안 토끼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늘이 바로 그 3일째 되는 날이다.
난 인생 최대의 고민에 봉착하게 되었다.

"후라이드냐, 양념이냐."

인생은 참으로 즐거운것 같다.
반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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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12 22:41
수정 아이콘
에이, 똥얘기가 아니네..
스카리 빌파
14/11/12 22:51
수정 아이콘
먹는 낙이 사람에게 참 큰거 같습니다. 후후.
맛있는 회에 소주 한잔 했으면 한이 없겠네요.
존 맥러플린
14/11/12 22:55
수정 아이콘
먹는 낙이라길래 저도 똥얘기인줄..
망디망디
14/11/12 22:57
수정 아이콘
저는 후라이드요!
python3.x
14/11/12 23:08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 고생하셨어요
영원한초보
14/11/12 23:19
수정 아이콘
치킨 알레르기 있으면 정말 ㅜㅜ
王天君
14/11/12 23:34
수정 아이콘
얌전히 과일 드세요 자연의 섭리에 개기지 마시고!!
그댄달라요
14/11/12 23:37
수정 아이콘
후라이드를 시키고 양념을따로 달라고 하시면
상상력사전
14/11/13 00:01
수정 아이콘
아 아무 낙이 없이 먹는 낙으로만 사는 1인으로서 글 한줄한줄에 공감 100개.
치킨은 좀 미루시고 생협 과일이라도 사드시면서 몸보신 하셔요
웃어른공격
14/11/13 00:01
수정 아이콘
저도 비슷한경험이 있는데 예비군 훈련을갔는데 더위를 먹었는지 아무맛도 안나고...뭘먹어도 힘도안나고....

맛은 짬밥탓이려니....힘안나는건 예비군의 특성이려니 하면서 기나긴 동원훈련을 다받고 집에갔는데도 몇일간 아무맛도 못느끼고 힘도없어서..

진짜 더위먹은건가? 싶어서 병원에 갔더니...간염에 건린거였다고 하더군요...근데 무식하겨 버텨서 다 나아간다고....

그소리를 듣고 피눈물을 흘렸죠....제대로 알았다면 훈련도 땡보에 입원해서 회사도 합법적으로 제낄수 있었는데라는 억울함만이.....
14/11/13 01:17
수정 아이콘
굉장히 몰입해서 봤네요 크크 고생하셨습니다~
HOOK간다.
14/11/13 10:01
수정 아이콘
치킨 알레르기보다 삼겹살 알레르기가 더 무서운 1人..
아케르나르
14/11/13 13:43
수정 아이콘
만화 '맛의 달인'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죠. 거기서는 무를 갈아서 코에 넣는 식으로 미각이 돌아오던데... 그게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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