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예인에게 열광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모니터 앞에서의 시간 뿐, 그 외에 별다른 지출은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내가 실물로 우연히 본 연예인들은 꾀죄죄한게 스크린의 모습과 좀 괴리감이 있어서 내게 이렇다 할 흥분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고작해야 ‘오…..’ 정도의 나지막한 탄성이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치의 반응이었다. 내가 아직 정우성이나 장동건, 한고은이나 한지민 같은 절세의 미남 미녀들을 아직 영접해보지 못한 무지랭이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는 유명인의 미모가 얼마나 출중하건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평정을 유지하려 애를 쓰고 말 것이다. 첫째, 제 얼마나 인물이 훤하건 그것 때문에 나를 굽히고 들어가며 사인이나 셀카를 구걸하기가 싫다. 둘째, 저렇게 생겼으니 티비에 나오고 영화를 찍고 하며 인기를 얻는 거겠지 하고 그들의 특수성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나는 엄격한 개인주의자라서 내 호들갑으로 유명인을 불편하게 하는 게 싫다. 냉정에 가까운 존중으로, 만약 그런 사람이 내 가까이 있더라도 난 기꺼이 지나쳐줘야지 하는 쓸데없이 굳은 결심을 품고 선을 그어놓은지 오래다.
친구와 함께 용산역에 쇼핑하러 갔다가 화장실에서 나는 익숙한 사람을 마주쳤다. 음…혹시? 방송에서 보던 것보다 좀 살이 쪄서 처음에는 확신이 안 들었지만 나는 이내 정답을 알아차렸다. ‘장비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름 석자 대신 왜 나는 게임 아이디를 먼저 떠올렸을까. 이 외국인이나 할 법한 사고회로의 작동은 대체 뭔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이성이 완전히 멈춘 건 아니라서 “장비 아니에요?” 라고 묻는 촌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소, 내가 연나라의 익덕이외다 그대는 뉘신지 같은 병맛 넘치는 상황극은 현실에서는 거의 벌어지지 않는 법이다.
나나 그나 이미 생리작용을 해결하고 손을 씻는 와중이었다.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질문을 던지기에 그렇게까지는 뻘쭘하지 않은 상황, 나는 용의자를 추격하던 형사가 마침내 쫓던 인간을 궁지에 몰아놓은 것처럼 자신감에 가득차 물었다. “허영무 선수 맞으시죠?” 손을 다 씻고 털던 허영무도 이런, 들켰군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대답했다. “아, 네………” 딱 걸렸어 라는 생각을 한 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내 행동은 유명인을 조우했을 시 지켜야 할 태도 및 행동수칙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었다.
“팬입니다.” “아….네…” 여기까지는 무난하다. 0.1초나 될 까 하는 이후의 공백에 우리는 서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래서 어쩌라고. 아니 그냥 그렇다고. 이렇게 아는 척 한번 해주는 게 허영무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사인까지는 오바여도 뭔가는 요구해야 그에게나 나에게나 뻘쭘함 이상의 뭔가가 남지 않을까? 0.8초. 난 지금 널 실제로 봐서 좀 흥분했다고! 넌 나한테 너무 대단한 인간이었다니까! 이 이상 지체한다면 난 우주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제일 잘 했던 인간을 잠깐 당황시켰던 걸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뭘 더 어떡하지. 갈 길 바쁜 사람을 붙잡고 몇년 전의 영광을 시시콜콜 떠드는 짓은 내가 암만 반가워도 못할 짓이다. 0.9초. 충동에 의거해 나는 불쑥 요청했다. “악수 좀…”
음, 이건 좀 이상한 짓이야. 오른손을 내미는 와중에도 나의 좌뇌는 우뇌를 꾸짖는다. 야 여기는 화장실이야. 그리고 허영무는 이제 막 손을 다 씻었다고. 너 같으면 손 다 씻었는데 그 손으로 남의 손 붙잡고 싶겠냐. 우뇌는 항변한다. 그럼 어떻게 하리. 콘돔이라도 하나 사서 손에 쥐어줄까. 허영무는 머쓱하게 거부의 제츠쳐를 내비췄다. “제가 지금 막 손을 씻어서 축축할텐데...” 나는 자비없는 미소로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너가 머뭇거린다면 내가 리드하마. 나는 진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여기에 내 왼손도 가담했다. 네 오른손은 이제 내 것이야, 악수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어. 이 급습에 허영무 역시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이 자에게 악수를 해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의 마지못한 악수에 나는 열렬히 응대했다. 어째 허영무가 악수를 하는 것보다 내가 허영무의 팔을 흔드는 것 같다.
찰나의 순간인데 별의별 생각이 다 지나갔다. 오, 내가 지금 우주에서 스타1을 제일 잘 하던 자의 손을 붙잡고 있어!! 이 손으로 마음만은 풀업이던 기적을 일으킨건가! 으, 진짜 축축하다. 악수 끝나고 허영무 나가면 빨리 손 씻어야지. 남자 화장실에서 이렇게 외국 바이어를 응대하는 미쓰비시 회사의 중역처럼 나는 왜 이렇게 허리를 굽히고 악수를 하는 걸까. 하하 허영무 너도 허리를 푹 숙이고 있구나. 나 지금 목소리가 너무 들떠있지 않나. 이거 허영무에게는 좀 황당할 수도 있겠는걸. 굽혔던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고, 우리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 나 좀 놔주지? 그래 안 그래도 놔 줄려고 했다. 허영무는 나갔고, 나는 손을 씻었다. 이제 아무리 급해도 물이 안 마른 사람의 손을 잡는 건 좀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내 친구가 다가왔다. “뭐냐? 누구랑 악수한거야?”
“허영무였어.” 그리고 잠깐 마비되어있던 이성이 다시금 작동하며 날 부끄럽게 했다. 아이유가 옆에 있어도 말 한마디 안 걸꺼라던 내 결심은 대체 어디로 흩어진걸까. “어쩐지, 너가 도대체 누굴 봤길래 그렇게 악수하자고 하는지 궁금했다 크.” 나와 친구는 각자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밟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도 별 수 없는 걸까. 유명인을 보면 그렇게 다들 뇌 속의 너트가 헐거워지고 볼트가 뚝 떨어져버리는 걸까. 갖가지 의심 끝에 나는 데카르트처럼 한 가지 절대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아, 나 진짜 스덕후다………
대회가 끝난지 2년이 넘었는데 마지막 챔피언랍시고 화장실에서 손 씻던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대다니. 심지어 현역 활동도 중단하고 이제 우리처럼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을. 그런데도 스타크래프트1 방송을 보며 불살랐던 그 순간 순간이 허영무를 보자 잿더미 속에서 벌겋게 익고 주체할 수 없는 불꽃으로 피어오른다. 그 때는 심심할 틈이 없었는데. 흥분과 긴장으로 달궈진 무대 위에서 너희들의 땀과 눈물이 절망으로, 영광으로, 기적으로 치직거리며 증발하던 1분 1초에 나와 우리는 얼마나 부르짖었고 꽃가루를 뿌려들 댔는지. 무표정한 두개의 얼굴 뒤로, 분주한 왼손과 잽싸게 미끄러지는 오른손 너머로, 많은 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주먹을 움켜쥐고,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막고, 다들 그렇게 웃었던가 울었던가.
지나간 순간은 모두 과거로, 그 때 그 그 곳에 담아두었던 감정들은 그렇게 흘려보낼 수 밖에 없더라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들은 있다. 무심하고 황량한 시간의 물결 사이를 그렇게 부유하고 있는 것들이 가득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게 나는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져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담긴 불꽃을 다시 한번 음미한다. 그리고 뚜껑을 닫을 때 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다. 고맙다고. 허영무에게도 마찬가지다. 시작은 기억할 수 없지만, 네 덕에 마지막 순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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