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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06 23:54
혹시 아나요 PGR에 글 쓰는 일도 윤리적 대면이 될지 크 최소한 여기서는 칼로 누굴 벨일은 없으니 다행입니다. 가끔씩 키배나 좀 하시겠죠... 흐 키배라 해도 그동안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을 가지셨다는게 느껴지니 예전보다 더 좋은 활동 기대합니다 흐
14/10/07 00:01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일종의 윤리적 대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스갯소리지만, Facebook의 얼굴(Face)이 레비나스의 얼굴(visage)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키배는 역시 본능이죠...
14/10/07 00:19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셧다운 제도는 게임에 필요한 게 아니라 PGR에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레비나스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바는 아니지만, 레비나스가 설정하는 타자는 지나치게 연약한 타자라는 점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의 한계를 분명히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건과 그걸 바라보는 아픈 마음이 들면 타자의 약하고 연약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그의 철학이 자주 떠오르고는 하죠. 저에게는 때로 믿어보고 싶은 철학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4/10/07 00:30
오히려 저는,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타자란 주체를 실존주의라는 권좌에서 내려오게 한 강력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주체의 실존은 타자와의 만남에 오로지 의존할 뿐이죠. 이미지적인 형상은 마치 저 애니메이션의 토모에처럼 여성성이 강하지만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4/10/07 00:58
네. 레비나스가 말하는 '나'는 타자에서부터 시작된 다는 점에서 이전의 철학들과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고, 분명 강렬한 존재입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이 형성되는 정신적인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그에게 타자의 윤리학을 쓰게 된 배경에 기독교적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러한 면에서 타자를 신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생각했을 때 꽤 이해가 빠르게 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글에 '수난', '부름', '응답'과 같은 종교적 색체가 있는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걸로 압니다. 그러한 면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해 강렬하다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강력함과 일치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한 내용이지만,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에는 '위험하고 주체적인 타자'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레비나스가 설정한 '타자'는 스스로 말할 수도 없고, '나'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위에 예로 들어주신 <바람의 검심>을 통해 생각해보자면 과연 켄신의 타자가 토모에일까요? 오히려 타자로서의 성격은 보스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14/10/07 01:11
레비나스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는 유대교입니다. 살짝 다르죠. 종교적인 부분에 큰 영향을 받았고 타자와 신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레비나스의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타자 아닌 타자", "그 어떤 타자에 앞서는 타자", 이런 식으로 표현했고요. 그런데 그런 식의 표현 자체가 타자의 강력함을 시사하는 게 아닌가 해요.
그 문제는 레비나스가 "제3자"를 등장시켜 해결하려고 합니다. "제3자"의 등장이 레비나스의 철학이 윤리학으로 변하는 기점이고요. "제3자"가 있기에, 자아는 "타자의 타자"가 될 자격을 획득하죠. 말할 수 없는 타자지만, 이미 "자아는 타자"인 것이죠. 켄신이 토모에를 사랑하게 되면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는데, 그 바뀐 관점을 죽은 이후에 적용하지 않으므로서 관계를 지속해나갔다는 점에서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보스는 토모에를 사랑하기 이전에는 "타자"였을지 모르지만, 토모에를 사랑한 이후에는 "나"에게 윤리를 발생시키는 "제3자"가 아닐까 싶어요.
14/10/07 01:41
레비나스의 윤리학 관련 글들을 읽을 때 마다 "왜 레비나스는 '자아'를 타자화 시키기 위해 둘이 아니라 셋을 필요로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아가 '타자' 하나에 대한 관계에 기초해서 자신을 타자화 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요......
14/10/07 02:13
현상학과 존재론(실존주의)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한 지점입니다. 그런데 굳이 그게 없더라도 아주 쉽게 생각해서 어떻게 "내"가 "너"가 될 수 있나요.
14/10/07 02:18
'혼자'있을때야 '나'는 '나'지만(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태어날 때 부터' 혼자있다면 발달상의 문제로 '나'도 없겠지만요 ㅡㅡ;), 같은종의 다른대상이 있다면 '다 자란 평균적인 인간'은 해당하는 개체가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생물이니 '내'가 저 개체에 있어 '너'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10/07 02:26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나"입니다. 제가 원빈으로 다시 태어나도 제가 원빈이 된 것이 아니라 "원빈"이 "나"가 된 것이죠. "너"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이 사랑이 레비나스가 봤을 때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지점이 레비나스가 "눈코입이 없는 게걸스러운 위장"에 비유한 폭력적인 "자아"입니다. 서양철학의 오랜 숙제라고 생각했고 이를 "타자"를 통해 해결한 것이죠. 그래서 "자아"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갖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3자"가 등장하면서 "타자"는 "타자의 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무한한 책임이 윤리적 선택의 가능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요.
이야기가 다 아리까리하게 되는데 이러한 논의를 쉽게 하려면 후설과 하이데거에 대한 사전 지식이 꼭 필요합니다.
14/10/07 02:38
후설과 하이데거야 '영감님들'이라 '자아'에 대한 다른 분과학문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지식활용에 있어 좀더 제한된 맥락위에 있지만,
레비나스는 1990년대 중반까지 생존해 계셨던 것을 알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ㅡㅡ; 사실 정말 묻고자 하는 것은 "왜 '자아'에 대한 '가정'을 바꾸지 않았나" 일수도 있고요.
14/10/07 02:52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측면에서 one of them이라는 뜻으로 현상학과 존재론의 주체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죠. 현상학에서 자아는 가정되거나 정의되는 것도 아닙니다. 뭐랄까, 무슨 말씀하시는지는 아는데...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14/10/07 03:06
제가 이런 사변(?)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학이 모든 질문에 답을 줄 줄 알았는데... 사랑이나 삶 같은 거에 대해서 하나도 안 알려주잖아! 뭐야!" 이런 심리였어요. 과학자가 정말 되고 싶었는데요...ㅠㅠ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뵈요!
14/10/07 03:37
사랑이 어떻게 신경생리학적으로 '가능'해지는가, 해당하는 범주에 포함되는 행위들의 기제에 대한 답은 해주지만 통상 그런게 궁금한 것이 아닌지라......
제 전공영역(사회학)에서도 나름 끗발날리는 학자양반(대가라고 남들이 불러주는)들이 '사랑'에 대해서 책한권씩 씁니다만, 역시 공부로 배워봐야 소용이 없......(열정을 매체로하는 체계 같은 식이니 과학보다 어쩌면 더 쓸모없는 ㅠㅠ) 사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일지도 모릅니다.
14/10/07 03:43
(1) 윤리적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타자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2) 켄신는 토모에(타자)에게 책임을 느껴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결론) 켄신은 죽은 토모에를 윤리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3) 주체는 타자와 윤리적으로 대면해 세상과 연결된다. (4)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세상과 연결된 것이다. (대결론) 켄신은 토모에(타자)를 윤리적으로 대면해 세상과 연결되었다. 혹시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게 맞나요?
14/10/07 03:47
몇 가지 핀트가 어긋났지만, 개략적으로는 맞지 않을까요...? 이말이 저말 같고 저말이 이말 같은 내용인지라 정리하기가 어렵네요 ㅠㅠ
14/10/07 04:07
토모에는 죽었지만, 켄신은 그녀를 (윤리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토모에는 켄신에게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켄신은 토모에가 자신이 앞으로 사람을 계속 [죽일 것]을 바란다고 말한다. 언뜻 모순되지만 진실된 말이다. 그녀의 죽음 때문에 켄신이 자신이 [했던 일]을 포기하면 그녀를 통해 대면했던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고 그녀를 대면하지 않는 일이다. 혹여 그녀가 죽었지만 죽어서도 바랄 수 있다면 켄신의 행복을 위해서 더 이상 자신을 대면하지 않고 잊기를 원할 수도 있겠지만, 켄신은 그녀와의 만남을 자신의 뜻대로 연장시켰다.
글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이 부분인 것 같은데, 살인만 강조되어있어서 어떻게 켄신이 그녀를 윤리적으로 대면한다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살인이 토모에를 윤리적으로 대면한다는 바로 윗 문단에 속죄와 책임이라는 단어가 등장해서 살인이 (아마 다른 의미겠지만) 윤리적이라는 건지 아니라는건지 더 복잡하고요. 살인보다 새 시대를 연다는 것에 집중한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레비나스를 몰라서 그런지 너무 어렵습니다ㅠㅠ 가능하다면 핀트가 어긋난 부분을 살짝이라도 교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4/10/07 04:41
영화는 켄신의 성장담을 그립니다. 삼공파일님은 이 과정에 레비나스의 윤리학,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레비나스가 상정한 개인이 윤리를 체화하는 양상을 비추어본 것이구요.
단순화하면 이렇습니다. 도모에란 타자를 경유해서 켄신은 '세상'을 느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도모에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도모에를 경유한 세상의 무게와 책임은 다시 켄신의 것이 되구요. 도모에를 떠맡기 위해 켄신은 도모에만 떠맡으면 안 됩니다. 둘만 사는 게 아니니까요(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의 윤리는 윤리란 번역어의 본뜻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 참 재미있지요.). 도모에를 삭제할 경우, 켄신 자기가 꼴리는대로 지금까지처럼 칼질을 하건 자기 스승처럼 산에 들어가 검술도장을 차리건 별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 행동을 켄신 자신의 내부에서 윤리적으로 재고할 여지가 없으니까요. 음, 좀 더 표현을 다듬으면, 이게 켄신의 윤리적 직관에 호소하지 않으니까요. 한편 여기서 세상을 삭제해볼까요? 도모에가 죽고 켄신이 도모에란 이름으로 칼질을 하건 농사를 짓건 아무 것도 안하고 틀어박혀 있건 그게 지 마음에 직관으로 다가올 경우엔 별 문제 없게 됩니다. "그럼 도모에의 죽음으로서 켄신은 반드시 지금까지처럼 살인을 해야하느냐?" 이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지 꼴리는대로 뭘해도 괜찮다며?" 이게 마냥 그런 건 아닌 게... 어쨌든 그게 도모에를 경유해서 세상이 켄신에게 다가왔다한들, 세상과 도모에와 자신에 대한 켄신의 관계설정이 어떠하냐에 따라 갈릴 문제기 때문이죠. 즉, 이 지점부터는 (당연히 물리적인 시간의 선후를 따질 문제는 아닙니다만)순전히 켄신 자신에게서 해석의 몫으로 남습니다. 다만, 그 해석이 개인에겐 일종의 경서가 되어 - 마치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의 수준으로 실시간 따박따박 반영되어 문자 그대로 윤리적인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게 이전까지와 다른 점이겠네요. 이상은 본문에서 작성자분이 말씀하려던 부분이 대강 이런 것 같다고 제 나름대로 짐작한 것이었고 정말 레비나스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에게 있어, 홀로 있는 인식과 타자, 그리고 제3자를 잇는 끈은 (다소 비약이 있겠지만)신입니다. Tout-Autre[다른-타자](허벌나게 다른쯤으로 독해하시면 될 겁니다. 왜, 명색이 필살긴데 필살기만 있는 게 아니고 초필살기가 있고 또 진초필이 있잖아요? 좀 다르긴 한데 대강 비슷해요.)란 결국 신의 윤리적 이름이죠.
14/10/07 05:27
팟저 님 말씀에 따르면 더더욱 살인이 아니라 새 시대를 여는 것이 켄신의 윤리적 목표인 것 같습니다. 살인은 새 시대를 여는 것의 수단으로 그때까지의 기간한정으로 시행될 뿐이고, 그 이후에는 살인에 대해 속죄와 참회를 할 것이라 다짐하니까요. 별개로 팟저 님이 쓰신 아래 덧글을 보고 삼공파일 님이 살인을 강조한 이유가 자기가 세운 윤리의 수단이 살인일 수 밖에 없는 비장한 상황을 강조하시려 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친절한 해설 감사합니다.
14/10/07 04:19
"토모에는 죽었지만, 켄신은 그녀를 (윤리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토모에는 켄신에게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켄신은 토모에가 자신이 앞으로 사람을 계속 죽일 것을 바란다고 말한다. 언뜻 모순되지만 진실된 말이다. 그녀의 죽음 때문에 켄신이 자신이 했던 일을 포기하면 그녀를 통해 대면했던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고 그녀를 대면하지 않는 일이다. 혹여 그녀가 죽었지만 죽어서도 바랄 수 있다면 켄신의 행복을 위해서 더 이상 자신을 대면하지 않고 잊기를 원할 수도 있겠지만, 켄신은 그녀와의 만남을 자신의 뜻대로 연장시켰다."
이와 같은 윤리적 대면을 책이 아니라 삶을 통해 깨닫고 살아낸다고 하면 참으로 어렵고, 아니, 어렵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개인을 짓이기는 어마무시한 비극이 될 겁니다. 전 정말, 제 삶에 널린 그 무수한 전조에도 불구하고(전조야 사실 우리 모두의 삶에 있는 것이니)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픈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아주, 정말 아주 무서운 일이 될 거에요. 뭐 당장 위의 켄신이 겪기도 했거니와...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할텐데, 만에 하나라도 어느 운 없는 이가 그러한 일을 겪는다면, 그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이며, 자신이 뱉은 말에만 충실히 복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겠죠. 이건 참... 아주 아름답지만 많은 것들이 그렇듯 풍경으로, 책 표지 너머로 볼 때만 아름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속 개인은 정말 산산히 부서져 나갈테죠. 레비나스가 그린 모습은 아닐테지만 바람의 검심을 경유해 일본에서 생산하는 대중 서사물이 '세카이계'의 범람을 맞이한 건, 같은 맥락에서 참으로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점점 불필요한 건 생략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죠. 생략해도 호소하잖아요. 그들이 그려내는 세상은 참으로 무시무시하죠. 어쨌든 삶으로서 살아내는 형상을 띄긴 띄어야하니 그러한 건데... 생략을 해도 그 정도로 무시무시하단 말입니다. 더군다나 만화고, 애니메이션인데도요. 하기사 우리가 삶을 통해서만 무언갈 알 수 있었다면 정말 많은 것들이 어마무시해질테죠. 꼭 레비나스만이 아닐 겁니다. 들뢰즈가 괜히 바틀비를 주목했을까요. 사례로서야 흥미롭지만 정작 개인은 사례가 되는 과정에서 갈려나가거나 사례가 되어 작살이 나죠.
14/10/07 13:55
사르트르와 하이데거의 경우에 "역사 앞에 선 주체"를 실존으로 보는데 토모에를 만나기 전에 켄신을 그러한 주체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토모에를 만나면서 "타자 앞에 선 주체"로 변모하고 진정한 책임에 눈을 떴다고 본 것이죠.
토모에가 죽은 이후에 "타자 앞에 선 주체"는 완성되지 않고 켄신은 계속 "역사 앞에 선 주체"로 행동합니다. 쉽게 말해 move on하지 않은 것이죠. 스스로의 자유를 박탈하고 진정한 책임을 그 이후로 미룹니다. 이는 토모에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켄신의 병적인 사랑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삶이란 하잘 것 없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설령 아무런 이벤트조차 없을지라도 언제나 어마무시한 비극인 것 같습니다. 삶을 통하지 않고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요. 그리고... 반가워요!
14/10/07 14:35
(1) 토모에가 죽은 이후에 "타자 앞에 선 주체"는 완성되지 않고 켄신은 계속 "역사 앞에 선 주체"로 행동합니다.
(2) 토모에는 죽었지만, 켄신은 그녀를 (윤리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1)은 위 덧글에 (2)는 본문에 나오는 말인데요,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것 같은데요..
14/10/07 14:50
무언가 모순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제 의도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이미 토모에를 만났지만 토모에를 만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토모에를 만나고 있는 것이죠. 계속되는 살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의무라고 생각하며 계속하는 모습은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14/10/07 15:54
(a) 병적인 사랑은 윤리적 대면의 한 형태가 아니다.
(b) 병적인 사랑은 윤리적 대면의 한 형태이며, 모든 윤리적 대면은 같은 층위에 있다. (c) 병적인 사랑은 윤리적 대면의 한 형태이다, 윤리적 대면의 층위는 다를 수 있다. 이 중에서 병적인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시고 싶은지 궁금하네요. (a)의 경우가 의도하신 바 같은데 그렇다면 모순은 없고 대신 본문이 글쓰신 분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 경우 켄신은 토모에를 윤리적으로 대면하고 있진 않지만 조금 다른 형태로 대면하고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b)의 경우라면 바로 위에 제가 단 덧글에 (2)는 긍정할 수 있겠지만 (1)을 대놓고 부정하고 있으니 문제가 있고요, (c)의 경우라면 설명이 너무 부족한 것 같네요..
14/10/07 08:14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자게의 퀄리티 높은 글이네요.
제 기억에 아마도 토모에의 약혼남은 신선조가 아닌 막부쪽 관료의 말단 호위무사로 알고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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