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진행되는 만화를 읽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이웃으로부터 장아찌를 받아 먹었다.
장아찌는 좋아하는 반찬 중 하나인데 어릴 적 외할머니 댁에 가면 외할머니는 끼니 때마다 장아찌를 주셨다.
그 장아찌는 조금 짰지만 굉장히 맛이 있어 강된장과 함께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반찬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장아찌를 볼 때면 외할머니가 참 많이도 생각났다.
어머니가 장아찌를 해주시면 '엄마 것도 맛있지만 역시 장아찌는 할머니 것이 최고지'라고 말했었고
이 말을 몇 번이나 들으신 어머니는 나중에 외할머니가 하신 장아찌는 미원을 많이 넣어서 그런 것이라며 귀여운 투정을 부리셨다.
그래서 그렇게 맛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뭐 그런 것이 중요한 일이겠는가.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손주에게 음식을 주고 싶었던 외할머니의 사랑이 담겨있었을텐데.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버스에서 휴대 전화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예능 방송을 보는데
출연진 중 한 명인 가수가 곡을 쓰다 막혀서 재충전 및 소재를 찾을 겸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찾아가는 것이 나왔다.
손자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신 외할머니는 마을 입구까지 나와 기다리셨고 오랜만에 손자의 모습을 보는 얼굴에는 기쁨이 묻어있었다.
가수와 그의 외할머니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난 그 장면들을 빠르게 앞으로 넘겼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눈물이 고일 뻔 했으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아 계신 조부모는 외할머니 뿐이셨다.
외할머니는 결코 좋은 배우자와 결혼을 했다고 할 수 없었고 가난 때문에 자식 중 2명과 사별을 하셨다.
그렇게 박복하신 외할머니였지만 그래도 5명의 딸들이 모두 착하여 외할머니를 잘 모셨고
외할머니는 그 중에서 가장 고생을 많이한 어머니를 아껴주셨기에 자연스럽게 나도 외할머니의 이쁨을 받으며 자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는 고사리 같던 내 손을 잡으시고는 이 녀석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이라 하셨었고
내 동생이 태어났을 때 이제는 동생 때문에 부모님에게 버려질 것이라며 웅크려 울던 내 손을 잡으시고는 괜찮다며 위로해 주셨다고 한다.
스스로 하셨던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외할머니는 건강하셨고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정정하셔서 여름마다 복숭아를 재배하셨다.
여름에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 댁에 놀러가면 외할머니는 스스로 키우신 노란 황도 복숭아를 꺼내주셨고
난 껍질만 벗겨진 복숭아를 통째로 집어 단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정말 맛있어 보이게 복숭아를 먹어치웠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묻는다면 다른 과일은 고려조차 하지 않고 복숭아를 선택하는데
어릴 때 너무 맛있게 먹은 복숭아가 여전히 머리 속에 남아 계속 그 맛이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외할머니셨지만 한 번 크게 넘어지시고는 급격하게 기력이 쇠하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동안 건강하셨으니 내 자식이 가방을 메고 학교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오래 사실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빌었건만
어디 사람 목숨이 기원한다고 늘어나겠는가.
결국 외할머니는 7년 전의 쾌청한 4월에 봄바람을 타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리움 때문에 울적한 기분을 추스리며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그 날 사오신 노랗고 물렁한 황도 복숭아를 깍아주셨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라서 사오셨다며 주신 복숭아는 추억에 잠겨버린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딱 좋았고 역시나 달고 맛있었다.
복숭아를 다 먹은 나는 어머니께 장아찌를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흔쾌히 받아주셨다.
덕분에 그 날 이후로도 며칠 동안은 장아찌 덕분에 외할머니를 생각할 수 있었다.
p.s 며칠 후 이 날 일을 아버지와 함께 늦은 밤 야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는 지금은 어머니에게도 외할머니 이야기가 가슴 시린 추억이라기보다는 아련하게 기분 좋은 회상일 것이라고 대답해주셨다.
그 밤은 그 동안 몰랐었던 할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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