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 근래 쓰고 싶은 글이 몇 개 있는데 못 쓰고 있습니다.
회사일이 요즘 너무 바빠 글 쓸 짬이 안 나거든요. 저는 회사에서 글 쓰는 농땡이라 말입니다.
아, 집에서 쓰면 되지 않느냐고요? 집에서는 안됩니다. 애 재우고 나면 프야매와 크루세이더 킹즈2를 해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여튼 그러한 까닭에 글 대신 잡담식으로 대강 늘어놓아 볼까 합니다.
1. 신해철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였던 90년대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 90년대를 통틀어 신해철이라는 사람이 맡은 역할이 단연 독보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의 솔로앨범에서부터 시작해 1997년의 N.EX.T 4집으로 이어지는 그 일련의 과정은 지금 봐도 눈부실 지경입니다. 분명 신해철은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밴드 출신이었는데 데뷔는 느끼한 발라드 아이돌 가수였고, 이후 다양한 장르를 한꺼번에 집어삼킨 괴물같은 잡식성 앨범들을 연달아 내놓았지요. 물론 저는 대중음악 전문가가 아니며, 오히려 헤비메탈과 하드락의 차이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음악 세계에서 얼마나 넓고 다양한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인형의 기사]와 [도시인]이 같은 앨범에 있고, [The Ocean]과 [날아라 병아리]가 같은 앨범에 있는걸요.
문제는 이런 잡탕볶음밥식 앨범은 마치 결혼식장 부페 같은지라 대체로 조화를 못 이루고 망가져버리기 십상인데, N.EX.T의 앨범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의 영향도 있는데, 그보다는 오히려 곡 하나하나가 질적으로 단연 뛰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워낙 질 놓은 요리가 나오니 심지어 탕수육과 크림스파게티를 같이 먹어도 괜찮은 거죠.
게다가 신해철이 단지 장르만 넘나드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신해철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양반, 노래를 통해 이야기를 할 줄 알거든요. 노래는 본질적으로 시와 같습니다. 시는 글쓴이의 사고와 감정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도구죠. 신해철은 그 분야에 있어 매우 뛰어납니다. 게다가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요. [The Ocean]처럼 폼을 잔뜩 잡아 가면서도 결코 촌스럽지 않게 의지를 표현하고, [영원히][Hope]처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도 합니다. [민물장어의 꿈]은 세월 속에서 성숙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 걸작입니다. [일상으로의 초대]는 순수하고 올곧은 사랑 이야기죠. [남태평양]처럼 그냥 실컷 웃을 수 있는 맛이 간 노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아! 개한민국]처럼 사회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합니다. 대 놓고 '상을 받기 위해 만든' [그대에게]도 빼놓을 수 없겠죠.
쓰다 보니 중언부언이 길어지는지라 요약하겠습니다. 신해철 아저씨. 앨범 좀 더 내 보슈. 거 맘만 먹으면 밥 먹고 곡만 쓸 수 있는 양반이 몇 년을 기다렸는데 겨우 4곡이여?
......아. 애 봐야 하는구나.
2. 딸내미
그래서 두번째 이야기는 제 딸내미 이야기입니다. 딸내미는 이제 20개월 돌파. 똥오줌을 아직 못 가리는 것만 빼면 완전무결하게 성장 중입니다. 애교도 엄청나게 늘었고, 그만큼 고집도 늘었습니다. 어제 야근을 하고 늦게 집에 들어가니, 현관의 자동조명이 켜지면서 문이 열린 애 방을 비추더군요. 반쯤 잠들어 있던 딸내미가 졸린 얼굴로 저를 쳐다보더니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반가운 표정으로 씨익 웃는데 그 미소가 그대로 제 명치를 강타. 그리고 반바퀴 굴러서 상체를 일으키며 말하더군요. 아빠 왔네. 아빠 회사 갔다 왔네. 아빠 보자. 어이쿠. 이거 꼭 끌어안고 부비부비해주지 않을 수가 없더란 말이죠. 애 재우던 와이프는 손 씻고 애 만지라고 화를 내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자고 있는 저를 깨웁니다. 어떻게 깨우느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들고 모서리로 제 얼굴을 찍습니다. 그리고 제가 눈을 뜨면 쪼르르 뛰어가 제 안경을 들고 옵니다. 이거 써라, 이거죠. 안경을 쓰면 방금 전까지 제 얼굴을 내려찍던 그 책을 제게 들이밀고 외치죠. 이거 읽어주자! 라고 말입니다. 어차피 내용은 죄다 외우고 있으니까 반쯤 감긴 눈으로 읽어주다 보면 갑자기 벌떡 일어나죠. 그리고 안 앉습니다. 옳거니. 눈치를 챈 제가 물어봅니다. 똥 쌌니? 딸내미가 대답하죠. 쌌네. 그럼 바지를 벗기고 화장실로 슈웅.
요즘은 키즈카페와 땅콩에 꽂힌 모양입니다. 눈만 뜨면 키즈카페 가자고 보채네요. 나중에 가자고 하면 이럽니다. 빠빠 먹고 갈까? 저는 대답하죠. 아니야. 더 나중에 가자. 그럼 말합니다. 엄마 오면 갈까? 제가 다시 대답하죠. 아니야. 더 나중에 가자. 그럼 이제 자기가 결정을 내리고 고래고래 외칩니다. 코오 자고 아빠랑 엄마랑 할머니랑 키즈카페 가자! 고함소리가 하도 커서 귀가 떨어질 것 같네요. 이렇게 목소리가 큰 녀석이 왜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만 보면 겁을 먹고 꼼짝도 못하는지 원. 땅콩도 마찬가집니다. 아침 먹자마자 씩 웃으면서 아빠 땅콩 먹자, 그럽니다. 제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점점 물러서지요. 빠빠 먹고 먹자. 코오 자고 먹자. 엄마 오면 먹자. 그런데 그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땅콩을 안 줄 수가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손에 쥐여주며 다짐받습니다. 이게 끝이야! 나머지는 내일 먹자! 그럼 고개를 끄덕이고 오물오물 땅콩을 씹어먹습니다. 다 먹고 나면 저를 올려다보며 묻죠. 아빠 땅콩 더 줄까? 하고요.
아빠는 다들 딸바보가 된다고 하는데, 저는 이미 어엿한 딸바보인 모양입니다. 딸 가진 아빠들 모두 힘내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0개월인데 저렇게 말을 잘 하나요! 놀랍네요. 제 아들은 이제 17개월인데 할줄 아는 말은 아빠, 엄마, 쿠쿠 (밥솥에서 쿠쿠 소리가 가끔나서 따라합니다) 응가, 할마, 빠빠, 아이야 (아마도 아니야를 말하는 듯) 등 채 10개도 되지 않습니다. 아들과 딸의 언어습득 종특 차이인가요? 어쨌든 딸바보 부럽습니다. 제 아들 녀석도 아침에 먼저 일어나면 (다행히) 책모서리로 찍지는 않고, 그냥 싸다구를 가볍게 때립니다. 일어나라 이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