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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3/31 21:42:40
Name 종이사진
File #1 110626_28629.jpg (338.8 KB), Download : 57
Subject [일반] 맛, 그 이상의 맛.





아직 미혼이었던 시절,

한창 연애 중이었던 지금의 아내에게, 밖에서 사 먹는 것이 아닌 직접 만든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쿨하게 그러겠다고 하군요.

그래서 집이 빈(흐흐) 어느 날, 아내를 집으로 초대하기에 이릅니다.



고맙게도 아내는 미리 파스타 재료를 모두 구입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면의 모양이 귀여운 동물 형태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식탁에 앉아서 파스타를 만들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했죠.

마치 저희가 결혼하여 주말 오후에 늦은 점심을 준비하는 신혼부부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파스타 한 접시가 완성되어 식탁에 도착했습니다.

보기도 좋은 것이 맛도 좋다고, 로제소스로 버무려진 파스타는 매우 먹음직스러웠습니다.

저는 만면에 웃음을 띄며 여자친구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마치 바닷속 크릴새우를 수백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먹는 흰긴수염고래마냥,

작은 동물 모양의 파스타를 사정없이 입에 쓸어 담았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뜨거웠거든요;

우걱우걱 파스타를 씹으면서 입안에 점차 퍼져나가는 맛이 느껴질 무렵,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저도 알 수 없는 예감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착각이려니 했지만, 점점 진하게 느껴지는 파스타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히 채울 때,

그 예감은 점점 녹은 확률을 띌 가능성으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이별선언...인가? '







그렇습니다. 파스타는 맛이 영 아니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매우 고약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내의 입을 통해 들은 바로는, 크림이 없어 우유와 슬라이스 치즈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두 재료 중 하나의 상태가 안 좋았는지, 아니면 질럿과 다크템플러 조합처럼 영 어울리지 않았는지,

입에 머금고 있기 힘든 수준의 존재감을 자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있었던 그녀와의 데이트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잘못했던가?

혹시 그녀가 신호를 보냈는데 내가 무시했던가?

오랜 연애기간 동안 설렘이 일상적 편안함으로 바뀌어, 나는 그녀의 소중함을 잊고 있었나?

처음 입에 머금은 한입을 마치 자대배치 받은 이등병의 심정으로 씹 어넘기며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야, 이별선언은 아닐 거야.

어쩌면 그녀는 나를 시험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음식을 만든 것이야.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슬픈 예감을 애써 외면하며, 저는 일부러 밝은 웃음으로 파스타 한 접시를 다 비워냈습니다.



훗날, 그렇게 잘 먹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그렇게 맛있나 싶어 팬에 조금 남아있던 파스타를 한입 먹었다가,

저절로 욕-_-을 하며 뱉어버렸다고 합니다.

자기가 만들어놓고도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처음에는 이딴 폐기물을 맛나게 먹고 있는 저를 보며 미각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나중에는 제가 자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감동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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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meranian
14/03/31 21:45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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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이 필요합니다.
구밀복검
14/03/31 21:48
수정 아이콘
파스타 만큼 쉬운 요리가 없는데...그걸 감안할 때 사실은 글쓴 분에게 감동줄 기회(나아가 고백 타이밍)를 주기 위한 아내 분의 계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4/03/31 21:51
수정 아이콘
제대로 패스하셨군요
The HUSE
14/03/31 21:57
수정 아이콘
글과는 별개로...
왜 제 와이프는 반찬통에서 먹길 싫어하고,
꼭 그릇에 덜어먹을까요. 설거지 시른데. ㅠㅠ
종이사진
14/03/31 21:58
수정 아이콘
저는 사진 찍기를 즐기다보니 반대가 좋습니다.

안해주네요;
The HUSE
14/03/31 22:20
수정 아이콘
음식은 찍지 말고 드세요. ^^
불량공돌이
14/03/31 22:03
수정 아이콘
11년 자취 1년 신혼 경험상, 반찬통에서 바로 먹으면 음식이 빨리 상하는듯 합니다.
반찬의 신선도 유지와 노동의 최소화를 위해 (설거지는 제가 하므로 ) 반찬은 여러종류를 조금씩만 만들기로 했습니다.
The HUSE
14/03/31 22:20
수정 아이콘
10년 자취동안 상할정도로 음식을 많이 만들어 놓은적이 없어서...ㅡㅡ;;
마스터충달
14/03/31 22:04
수정 아이콘
간만에 해로운 글이군요.
정말 멋지시네요.
리산드라
14/03/31 22:18
수정 아이콘
재료를 준비해오신 아내분이 크림소스를 안들고오시고
설사 실수로 안챙겨왔다 하였더라도 구지 로제로 만들었단사실은......

계획적인일이라는게 백프로네요...
종이사진
14/03/31 22:20
수정 아이콘
색깔만 보고 로제소스라고 생각한 거죠;

뭘 넣었길래 색깔이...
14/03/31 22:24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
엔하위키
14/03/31 22:48
수정 아이콘
크크크 재미난 에피소드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요리 만들면 간이라도 보려고 먹어보지 않나요?
종이사진
14/03/31 22:57
수정 아이콘
나름 자신이 있었나봐요;
눈부신날
14/03/31 23:38
수정 아이콘
저희 어머니도 이상하게 간을 안보십니다 만약 봐야할 필요(가족 외 다른 사람에게 대접한다든가, 혹은 비싼 재료가 들어갔다든가)가 있으면 꼭 저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가끔 예기치 못한 폭탄을 맞을때가 있는데 왜 간을 안보냐고 물어도 명쾌하게 답을 안합니다 아마도 음식하는 입장에선 음식이 꼴보기 싫은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늘하늘
14/03/31 23:39
수정 아이콘
만우절은 내일인데 ㅠㅠ.

아.. 테스트 였군요. 역시 남자는 음식에 대한 으리가 있어야 되는군요!
늘 행복하세요 ^^
14/04/01 00:53
수정 아이콘
ㅋㅋㅋㅋㅋㅋ아 넘 맛있어보여요ㅜ
어니닷
14/04/01 08:06
수정 아이콘
아 이거 머죠?
14/04/01 08:29
수정 아이콘
만우절이라고 너무 심하시네 ㅋㅋ
14/04/01 11:06
수정 아이콘
아무도 글쓴이의 ㅋ릴새우 드립을 언급하지 않는다...
종이사진
14/04/01 11:12
수정 아이콘
ㅋ림돠 다ㅋ템플러도요...
부서진꿈
14/04/01 12:13
수정 아이콘
의심과 확인을 한번에 주셨군요.

미각 의심과 사랑에 대한 확인.

일타쌍피(?)인가요....
혜정은준아빠
14/04/01 12:55
수정 아이콘
'제가 자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 이 글은 맛 없는 음식 먹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아닐텐데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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