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은 12월 26일, 성종이 죽은 지 불과 이틀 후였습니다.
그 전날 예조판서 성현은 49일에 절에서 재(齋)를 치를까 말까를 묻습니다. 기존의 예이긴 했지만 관습법이었고 성종이 불교를 믿지 않았으니 어쩔까 하는 것이었죠. 이에 세자는 왕비(정현왕후)에게 물었고, 이런 답을 듣습니다.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으셨으나 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이 없었고 옛부터 다 행했으니 이제 폐지할 수 없다."
세자는 이를 쫓아 수륙재를 열려고 했죠. 그 소식을 들은 대간들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갑니다. 먼저 온 것은 사헌부와 사간원이었습니다.
"대행왕(아직 묘호가 정해지지 않음)께서 불법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제 새로 정치 시작하려고 할 때니 사도를 버리고 예문(禮文)을 따르셔야 됩니다."
이에 세자는 어제 들은 논리 그대로 맞서죠. 이어 홍문관에서 와서 또 여러가지 말을 늘어놓자 이렇게 답합니다.
"아까 말한 그대로 전해줘라."
그러고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말 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아까 다 말했거든?"
이게 어디 하루이틀로 끝날 일이겠습니까? 대간들은 다음 날 다시 몰려왔고, 세자는 대신들에게 대간들을 달래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신들 역시 그들이 충성에서 나온 말이니 자기들은 못 하겠고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죠. 대간들은 계속 쪼고 대신들은 그 상황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이 다음날 그런 세자의 원군이 생기니 좌의정 노사신입니다.
"(옛날부터 해 온 걸) 이것을 가지고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데 곡위(哭位)에서 애달프시므로 일을 말할 때가 아닌데도 할 일을 버리고 대궐에 모여서 논란하여 마지 않으니, 신은 매우 그르다고 여기며, 큰일 외에 이런 일은 반드시 답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걸 주장하려는 대간들은 들이지 말자고 주장했죠. 이 때 사관론에서는 "그럼 이게 큰일이 아니면 뭐가 또 큰일인데?"라고 적고 있죠. 자, 모난 돌이 나왔습니다. 두드려 맞아야죠. 대간들의 화살은 재를 지내는 것은 물론 거기에 찬성한 노사신에게 향합니다.
"노사신이 그랬다 하니 신 등이 놀라움을 이기지 못 합니다. (중략) 대간의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하게까지 하니 이건 간신이 해 오던 꾀입니다." -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 (1월 1일)
이 때 세자, 아니 29일부로 즉위했으니 왕은 이렇게 답합니다.
"정승이 말한 게 아니라 내가 들이지 말라 한 것이다."
왕이 된 연산, 그는 아마도 세자 때부터 구상했을 청사진을 실행합니다.
이후 했던 말이 계속 나옵니다. 대간들은 물론 유생들까지 나서서 불교식 행사를 반대했고, 이에 찬동한 노사신을 탄핵했죠.
"전하께서 노사신의 말은 공경이라 하여 들으시고 신들의 말은 천한 자라 하여 듣지 않으시니, 옳으오리까?" - 성균관 생원 조유형 등
"너희들이 티 없는 재상을 능욕하는 것은 옳으냐? 들을 만한 일이라면 어찌 일찍이 좇지 않았으랴?"
여기에 성종의 묘호를 뭘로 할지도 끼어듭니다. 연산과 대신들은 성成을 밀었고, 그 아래에서는 주로 인仁을 밀었죠. 연산은 대신들과 상의 끝에 성으로 결정했고, 대간은 인이 아름답다며 성을 주장한 대신들을 탄핵합니다. '편견을 고집해 억지 이론을 끌어다 붙이고 그른 것을 꾸며 고집을 부린다'는 식이었죠. 연산은 화내며 이를 물리쳤고, 사직하겠다는 대신들을 이렇게 달랩니다.
"(인종은 한, 당 이래로 없었는데 송나라에서 나왔는데 영 아니더라. 이게 어찌 우리 아빠와 비교할 수 있겠냐) 성(成) 자의 해석이 다 아름다우므로 내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따라 정한 것이니, 사퇴하지 마오."
대간들의 반대에는 강력히 맞서고, 대신들을 공격하면 자기의 말이라 하며 막아줬으며 대신들에겐 자기가 책임질 것이라 하며 기운을 북돋워줍니다. 특히 노사신은 이런 연산에 호응해 대간들을 공격했고 연산의 말을 옹호했죠.
연산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과격하게 반대한 유생들을 잡아 가둡니다. 깜짝 놀란 대간은 물론 대신들까지 와서 반대했죠. 언로가 막힌다는 것이었습니다. 3명을 유배보내고 21명에게 과거응시자격을 취소하는 나름 중징계였죠. 이를 말리는 신하들에게 그는 연거푸 이런 말을 꺼냅니다.
"선왕께서 유생을 죄주지 않았으므로, 이런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가져 왔다. 일마다 수의(收議)한 뒤에야 처리한다면, 임금의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
능상의 풍, 위를 능멸하는 풍습, 그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가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몇 차례 이를 언급했죠.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1차 대상이 됐던 대간들도, 이 때는 연산의 비호 아래 있었던 대신들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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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대간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자신이 이기려고만 힘써서 상에게 논란을 벌이며, 날이 겹치고 달이 걸리더라도 꼭 이기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그 폐단이 차츰 임금의 위엄이 떨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 노사신
그 후로 3년, 성종의 상이 끝날 때까지였습니다. 굳이 세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일이 계속 나옵니다. 연산은 무언가를 시도했고, 대간들은 끝없이 반대했고 대신들을 탄핵했으며, 연산은 자기 주장을 밀고 대신들을 비호합니다.
대간들의 태도가 아예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부러질지언정 꺾이면 안 되는 자세, 이것은 지금의 언론에도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 때의 대간은 정말 그 때의 상황이라 해도 너무 시시콜콜한 것에 반대했고, 거기에 자신의 정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삼공(재상)은 음양을 화하게 다스리며, 찬성은 이공으로서 교화를 넓히는 직책인데, 지금 모두 사람답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 연산 3년 1월 25일 이수공, 벼락 떨어진 이유를 말하며 (...)
"지금 대간이 뇌성한 변 때문에 신 등을 인류가 아니라고 논하니, 신 등이 용렬하기는 하더라도 어찌 부끄러운 줄을 모르겠습니까." - 좌의정 어세겸, 좌찬성 이극돈, 사직을 청하며
"여러번 사면하는 소장을 올리니, 이것은 그 인군을 가볍게 보고 대간을 두려워하는 것이니, 대신의 체모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찾아볼 문제는 인사 문제, 대간들은 사사건건 딴지를 겁니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단체로, 나중엔 삼사가 한꺼번에 나섰고, 들어주지 않으면 밖에서 시위했습니다. 그러고도 안 들어주면 전원 사직했죠. 연산은 연산대로, 대신은 대신대로 언론을 아예 막을 순 없는 노릇이라 복직하게 했고 또 맞서고 무한반복이었죠.
특히 왕과 대간의 대립이 계속될수록 대신들의 발언권은 줄어만 갔습니다. 대간들에게 대신들은 연산의 그릇된 말에 순종하는, 사람도 아닌 놈들이었고 연산에게 대신들은 대간을 눈치보느라 할 말도 못 하는 이들이 돼 갑니다. 대신들은 그저 탄핵받으면 사직할 뿐이었죠. 노사신의 경우 다른 이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연산을 옹호했고, 대간들은 "노사신의 살을 씹고 싶다"는 무시무시한 말까지 꺼냈죠.
여기에 주요 사안마다 자기들의 말을 안 들을 경우 1년에 가까운 기간과 100회가 넘는 상소를 통해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반대할 만하다는 것과 굳이 반대해야 되나 하는 일들이 섞여 있죠. 하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반대만 계속하는 상황에서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죠. 특히 실무를 맡을 사람들을 계속 탄핵하는 상황에서요.
연산의 무리수도 있긴 했습니다. 특히 자기나 왕실에 대한 것은 최대한 신경쓰고 있었죠. 자기를 길러준 봉보부인 최씨에 대해 과하게 포상하려고 했고 이게 반대를 먹자 대간을 국문하게 합니다.
하지만 가장 컸던 것은 역시 폐비 윤씨, 그의 어머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연산 1년 3월 16일, 그는 성종의 묘지문을 보다 윤기무라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를 잘못 쓴 게 아니냐고 하니 폐비돼 죽었다는 걸 알게 됐고, 이 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이 밥을 먹지 않는다는 건 큰 사건이죠.
이 때 그가 어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고 하지만, 이전 글에 썼듯 이전에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폐비 윤씨를 공론화시킨 첫 사건이라고 봐야겠죠. 한 달 후에 폐비 윤씨의 묘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물었고, 8월에는 추존 문제를 꺼냅니다.
"폐후가 덕이 부족하여 부왕의 버림을 받았으니, 나는 골육의 정을 잊지 못하여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지만, 여러 신하들이야 어찌 소식을 하려 하느냐"
+) 자기가 윤씨의 기일에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럼 신하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나라의 기일로 여겨야 되나)의 문제로 넘어갔죠. 이걸 유도한 거겠죠.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인 영돈녕 윤호야 당연하겠고, 다른 대신들도 제사는 좀 더 잘 지내주더라도 추존은 성종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니 안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노사신은 연산의 편을 들었구요.
논의는 2년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나왔고, 대신들은 연산의 편을 듭니다. 괜히 반대하다가 자기들에게도 그걸 못 막은 죄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반면 대간들은 불꽃처럼 일어나 막아섰고, 양 쪽의 대립은 깊어져 갔습니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성종의 유교가 있었으므로 이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대들은 하늘과 땅에서 생겨났는가?"
성종의 상이 끝나자마자 연산은 행동에 옮깁니다. 이쯤 되면 대간들도 더 이상 막지 못 했죠. 3년 4월에는 이장을 마쳤고 묘호를 회묘라 했으며, 사당도 따로 세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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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모습들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길들여가는 시간이었고 대간의 행동은 분명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즉위말의 모습들은 물론 다른 왕들과 비교해도 그렇게 무리수를 둔 게 있나 싶죠. 세조 때를 통해 너무 강화된 왕권과 대신들, 그에 대한 반감으로 성종 대에 너무 강화된 대간의 권력, 이제는 좀 균형을 이룰 때가 된 거니까요. 대간들이야 계속 쪼아댔지만 무오사화까지 그가 딱히 실정을 저지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빈민을 구제하고 억불에 대해서도 살기가 힘들어 머리를 깎는다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였고, 왜구와 여진의 대처에 대해서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폐비 윤씨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죠. 나름 밀어붙이긴 했지만 이걸 가지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복수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들이 오히려 그게 걱정돼 찬성한 것도 있겠지만요. 대비들에게도 정말 잘 했고, 이게 좀 사치스럽다고 비판받는 정도였습니다. 갑자사화를 생각하면 그랬기에 더 충격이었을지도요.
+) 다만 묘를 이장하는 책임자로 이세좌를 고른 게 참 (...) 노린 건지... 이 이세좌 역시 연산이 보호해주던 대신 중 하나로 대간들의 집중포화를 받던 이였습니다.
+) 인수대비는 갑자사화 한 달 전 자기가 죽을 걸 예감하고 연산군에게 자기가 죽더라도 고기반찬을 먹으라며 챙겨줍니다. 이랬기에 갑자사화 때의 충격이 더 컸겠죠. 어쨌든, 폐비 윤씨 문제가 계속 언급되도 최소한 겉으로 그들의 사이는 좋았습니다.
그대로 갔다면 그는 평범하거나 유능한 군주로 기억됐을지 모릅니다. 대간들은 좀 억눌렀더라도 대신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말이죠.
하지만 그의 목표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능상, 위를 능멸하는 풍습, 이건 그와 뜻을 같이한 노사신의 생각도 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살은 대간에게만 향한 것도 아니었죠. 그저 지금은 대간이 강해 대신들과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일 뿐.
연산군 4년, 양측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또 서로에게 길들여질만할 때기도 했습니다.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대간들도 살짝이나마 물러서고 있었고 연산도 말은 계속하지만 딱히 큰 벌은 내리지 않는 상황이었죠. 팽팽하게 당겨져 언제 끊어질지 모를 밧줄로 볼 수도 있고 (이게 보통 무오사화를 설명하는 통설이기도 하고) 나름 힘의 균형이 맞춰져 가고 있는 걸로 볼도 있는 상태였습니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흐를지는 모두 연산의 방침에 달려있었죠.
이 때 돌발상황이 일어납니다. 조선시대 첫 사화로 분류되는 무오사화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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