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글은 홍성진 영화해설의 라쇼몽 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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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난무하는 헤이안 시대,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라생문`의 처마 밑에서 나뭇꾼과 스님이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 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잠시 비를 피하러 그곳에 들른 한 남자가 그 소리를 듣고 궁금해 한다. 이들은 이 남자를 상대로 최근에 그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을 들려준다.
사건이 벌어진 배경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 사무라이 타케히로(모리 마사유키)가 말을 타고 자신의 아내 마사코(교 마치꼬)와 함께 오전의 숲속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자던 산적 타조마루(미후네 도시로)는 슬쩍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는 그녀를 차지할 속셈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속임수를 써서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타조마루는 마사코를 겁탈한다. 오후에 그 숲속에 들어선 나뭇꾼은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가슴에 칼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곧 타조마루는 체포되고, 행방이 묘연했던 마사코도 불려와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문제는 겉보기에는 명백한 듯한 이 사건이 당사자들의 진술을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들려준다는 점이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먼저 산적 타조마루는 자신이 속임수를 썼고, 마사코를 겁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무라이와는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떠벌린다. 하지만 마사코의 진술은 그의 것과 다르다. 자신이 겁탈당한 후, 남편을 보니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초리였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초리에 제정신이 나간 그녀는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무당의 힘을 빌어 강신한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또다른 진술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지만, 오히려 산적 타조마루가 자신을 옹호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엇갈리는 진술 속에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담겨있다. 좀처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이때, 실은 그 현장을 목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뭇꾼이다. 그는 마사코가 싸우기 싫어하는 두 남자를 부추겨서 결투를 붙여놓고 도망쳤고, 남은 두 남자는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개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홍성진 영화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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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은 진중권씨의 관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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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최종적 진리를 믿는가
- 객관적인 절대진리에 대한 <라쇼몽>의 혼란 -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여자의 모자를 보고, 끊어진 밧줄을 보고, 이윽고 칼에 찔려 죽은 사무라이의 시신을 본다. 패닉에 빠진 나무꾼은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를 하고, 이로써 종잡을 수 없는 해괴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네 사람의 진술은 모두 확보됐다. 하지만 동일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의 진술은 크게 엇갈리며,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네 사람 중 진실을 말하는 것은 누구일까?
네개의 시각
체포된 도적 타조마루가 입을 연다. 사무라이를 기습해 묶어놓고 그의 아내를 겁탈했다. 처음에는 무섭게 저항하던 여자가 곧 자신과의 관계를 즐기는 듯했다. 자리를 떠나려는데 여자가 “자신의 수치를 두 남자가 알게 할 수는 없다”며, 한 사람이 죽기 위해 둘이 결투를 벌여야 한다고 말한다. 스물세합을 겨룬 끝에 사무라이를 살해했으나, 여자는 그 사이에 도망가고 없었다. 그도 여자 찾는 것을 포기한다. “그녀도 다른 여자와 다를 게 없었다.”
절에 숨어 있다 끌려온 마사고가 말한다. 자신을 겁탈한 뒤 타조마루가 자리를 뜨자, 남편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경멸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결박을 풀어준 뒤 단검을 주며 “제발 죽여달라”고 부탁하다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 보니 남편이 단검을 가슴에 꽂은 채 죽어 있었다. 나 역시 강물에 뛰어드는 등 자살을 기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죽어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무당의 입을 빌린다. 아내는 겁탈자의 유혹에 넘어갔다.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며 도적에게 말한다. “저 남자를 죽여야 같이 갈 수 있어요.” 이 말에 충격을 받은 타조마루는 아내를 쓰러뜨린 뒤, 내게 여자의 생사를 결정하라고 말했다. “이에 나는 그를 거의 용서했다.” 순간 아내는 도망가고, 도적이 결박을 풀어주었다. 절망한 나는 가슴에 단검을 꽂고, 얼마 뒤 누군가가 그 단검을 뽑아갔다.
당황한 나무꾼은 실은 자신이 사건을 목격했다고 실토한다. 도적은 겁탈한 여인에게 자기와 결혼을 해달라고 애걸했다. 도적의 유혹에 아내는 두 남자가 결투로 결정하라고 말한다. 남편은 결투를 거부한다. “창녀에 목숨을 거느니, 차라리 내 말이나 챙기겠다.” 이 말에 도적도 여자에 흥미를 잃는다. 여인은 흥분하여 사내들의 명예심을 자극한다. “여자는 자신을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가는 거예요.” 결투 끝에 도적이 사무라이를 죽이나, 여인은 기진맥진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간다.
라쇼몽 효과
‘라쇼몽 효과’라는 게 있다. 기억의 주관성에 관한 이론인데, 여기에 따르면 동일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면서도, 그 각각이 모두 개연성을 갖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도 사건에 연루된 네 사람의 진술은 서로 엇갈리나, 그 모두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그 각각이 자기 자신에게는 참일지 모르나, 모두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네 사람의 진술 중에는 논리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증인 중에 두 사람은 타케히로가 단검으로 자결을 했다고 말하고, 다른 두 사람은 그가 살해됐다고 주장한다. 살해됐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의 묘사도 서로 엇갈린다. 당사자인 타조마루는 자신이 스물세합을 겨룬 끝에 힘겹게 이겼으며, 사무라이 역시 명예롭게 죽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무꾼이 묘사한 결투장면은 이와 거리가 멀다. 두 사내는 서로 벌벌 떨며 졸전을 벌였고, 승자는 엉겁결에 이겼고, 패자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졸전인지 명승부인지는 주관적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문제는 역시 ‘타케히로가 자결했는가, 아니면 살해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자살을 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두 사내의 결투를 종용했다면, 당시에 여인의 생명이나 다름없던 정숙함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남편으로서도 자신이 자살을 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명색이 사무라이가 결투에서 도적에게 졌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타조마루는 왜 자신이 사무라이를 살해했다고 하는 걸까? 전설적인 도적으로서 자신의 명예 때문일 게다. 그는 지은 죄가 많아 어차피 죽을 목숨. 타조마루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사형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럼 나무꾼은 왜 그러는 걸까? 생각해보라. 자살한 사람의 가슴에 꽂힌 단검을 훔쳤다고 하면 윤리적으로 큰 문제가 될 터. 당연히 사무라이가 강도에 살해당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리는 무엇인가?
사라진 단검을 나무꾼이 가져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타케히로가 자살했는지 혹은 살해당했는지를 밝혀주지는 못한다. 나무꾼은 타케히로의 가슴에서 단검을 뽑았을 수도 있지만, 마사고가 떨어뜨려 땅에 꽂혀 있던 놈을 주워 챙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일까? 영화는 그 어느 쪽으로도 답을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동일한 사건에 관한 네개의 진술은 끝까지 진위가 확정되지 않는다.
미국의 어느 비평가는 이 영화를 “원자폭탄과 일본 패망의 알레고리”로 읽는다.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영화에 굳이 상징적 해석을 가하자면, 차라리 영화의 시네마토그래피를 담당했던 미야가와의 말을 듣는 게 낫겠다. 숲을 찍을 때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비쳐 나뭇가지들 사이로 해가 비쳤다가 사라졌다 하게 한 것은 허위에 의해 가려지는 진리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이 영화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라쇼몽>은 철저하게 해석학적이다. 네 사람의 엇갈리는 진술이 있어서가 아니다. 외려 감정과잉의 오버액션을 하는 스님 때문이다. 사실 영화에서 스님이 하는 역할은 거의 없다. 그는 영화 속에 있으나, 실은 영화 밖에 있다. 거기서 그는 영화 속에 없는 ‘진실에 대한 궁극적 믿음’을 대변한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이 영화를 좋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진리란 가려진 것이 드러나는 ‘탈은폐’(aletheia). 그는 이 진리의 궁극적 일어남을 믿는다.
스님은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을 참을 수 없다. 영화 시작부터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인간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지옥”이라고 외친다. 드디어 구원이 찾아온다. 진리의 부재가 진실의 회복으로 바뀐다. 나무꾼이 “오늘 같은 날 인간을 신뢰하는 게 어렵겠지만” 버려진 아기를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자, 스님은 감격한다.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석학과 해체론의 경계
그런데 네 사람의 진술이 그저 거짓말이기만 한 걸까? 그들의 진술에도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고 하면 안 될까? 데리다에 따르면, 원래 진리란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 네개의 진술 역시 그저 허위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진리를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의 처지에서 사물을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제3자인 나무꾼의 증언 역시 주관적 해석에 물들어 있지 않던가.
주관적 해석, 상대적 관점들의 끝에 언젠가 ‘최종적 진리’에 닿으리라는 믿음. 이 초월의 욕망마저 버릴 때 해석학은 해체론이 된다. 초월적 기의는 없다. 영화의 바깥, 현실의 바깥은 없다. 영화 밖에서 궁극적 진리를 확인하는 스님만 없었다면, <라쇼몽>은 해체론적 영화가 될 뻔했다. 영화 안에서 영화 밖으로 초월하려는 스님의 오버액션. 그것 때문에 영화가 많이 촌스러워졌다. 게다가 아이를 안고 가는 나무꾼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이란.
증언에 따르면, 구로자와 아키라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거대한 먹구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로써 영화 속의 상황이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 속의 상황은 현실 속에 사는 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얘기. 라쇼몽 위로 먹구름만 드리웠더라면, <라쇼몽>은 해석학을 넘어- 데리다에 수십년 앞서- 해체론을 선취할 뻔했다.
위의 두 글을 다 읽으셨나요? 스크롤의 압박이다, 진중권씨의 글에 이르러서는 단 해석학이나 해체론의 배경지식이 없어 어러워, 하면서 스크롤을 내려 글의 제목에 김연아가 왜 붙은거야? 하면서 내렸을 수도, 아무 설명 없이 글만 딸랑 두개 올라오고 뭐야? 하면서 댓글이나 볼까? 하면서 휠을 긁으며 내려왔을 수도, 꼼꼼히 다 읽고 글쓴이가 뭔 말은 하려는지 몰라 밑으로 오신 분도, 난 글쓴이와 생각이 달라! 한번 논쟁해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글의 밑으로 오신분도, (가장 안타깝지만) 그냥 백스페이스를 누르신분도, 또 많은 분들이 계시겠지요.
제가 정확히 이 글을 읽은 분들의 행동양식을 알아냈나요? 일단 거기서부터 상당한 오류를 일으켰겠지만 제가 적은 분들이 있다면, 제가 그들의 행동의 근간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글이 길어 읽지 못하는 분이 있다고 가정하면, 제가 그분에게 적어도 공부를 하려면, 아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책 한두권을 한달에 읽으면서 지내야 할텐데 이 정도 짧은 글도 못읽냐! 라고 핀잔을 줄 거에요. 그런데 그 분이 '전 책과 거리가 먼 운동선수에요.'라고 말한다면? 저의 핀잔은 꽤나 일반적이죠. 하지만 그 범위에서도 벗어난 사람이 존재하고 그러니 다른 해석이 이루어졌어야죠. 해석이 틀려버렸죠.
김연아선수를 두고 벌어지는 일들, 어제 (피겨계에서 상당히 권위가 떨어지고 신뢰도 떨어진) 한 기자의 기사에서부터 시작된 코치와의 결별 문제로 꽤나 인터넷이 달아올라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김연아 선수의 트위터의 글로 불화설이 대두되었죠.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자 넷상에서 글을 쓰기 좋아하고, 김연아 관련 글에 코멘트를 해왔던 분들, 어쩌면 논쟁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각자의 '해석'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의 제 '해석'이 맞았나요? 정말요?
(최종적) 진리란 상당히 달콤한 열매로 보여집니다. 무언가의 궁극점, 어느 누구도 부정못할 무언가는 상당히 매력적이지요.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어디서 있을 수 있는지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진리라는 것을 인지할 만큼 인간의 인식구조가 완전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거든요. 우선, 얘기의 폭을 축소해 인간관계에서 진리가 있을 수 있을까요? 있다해도 그게 가치를 갖을까요? 위에 언급된 [라쇼몽]의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사태에 대해 각자의 '해석'을 내놓는데 왜 그럴까요?
김연아와 오서, 정말 그들은 좋은 조합, 스승과 제자, 사이였을까요? 아니 스승과 제자는 맞았을까요? 김연아선수가 오서코치의 지도하에 많은 성장이 있었나요? 오서 코치 초창기의 07월드 쇼트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와 이번 올림픽 쇼트프로그램 007에서 큰 차이를 느끼셨나요? 느끼셨다면, 록산느의 탱고 때의 김연아선수의 지독한 허리부상을 감안한다면 어떤가요? 결과적으로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으니 좋은 코치였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아니, 그들이 어떠한 관계였고 어떤 사이였는지 소급할 필요 없이 확실하고 명징한건 그들은 계약관계였다는 것이죠. 돈과 돈으로 관계하는 계약관계. 그렇다면 김연아와 윌슨, 박미희, 곽민정 등 일단 드러난 인물만 다섯명인데 이들 각자의 인간관계,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말과 행동, 그에 따른 그들의 해석, 여기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아주 일부분의 결과물, 해석하는데 상당히 어렵지 않나요? [라쇼몽]에서 나뭇꾼과 스님이 한 말,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
이 글을 쓴 글쓴이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이번 일에 관련한, 이 글에 대한 어떠한 해석이든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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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문제는 진중권의 글에 나타난대로 "영화 속의 상황은 현실 속에 사는 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의 조건')이기 때문에 김연아 사례가 그리 특수해 보이진 않습니다. 하나 분명히 할 것은 해석학이 해석의 다양성을 얘기하지만 그것이 '모든 해석이 옳다', '모든 해석이 틀리다'와 같이 얘기하는 게 아니란 점입니다. 그렇다고 '절대 불변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 점이 해체론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죠. 해체론은 '절대 불변의 진리'를 믿고,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해석이 맞다(혹은 틀리다)'라는 결론으로 나갑니다. 진중권이 말한 '영화가 해체론으로 나갈 뻔한 경로'가 그것이죠.
그렇다고 영화가 해석학으로 향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영화는 '절대 불변의 진리'를 믿고, (해체론과 다르게) 그것이 가능하다(스님)고 주장함으로써 해체론으로부터 탈출합니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해석이 관점에 좌우된다는 해석학적 통찰을 버린다는 점에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리죠. 요컨대, 고전적인 진리 개념(이데아 류), 해체론, 해석학 사이의 미묘한(혹은 매우 커다란) 간극이 존재합니다. 자신이 어느 지점에 놓인지를 분명히 하는 게 논쟁의 시작이자 끝이죠.
근데 이번일 생각해봤는데, 남녀 사이에도 고백만큼 중요한게 헤어지는 방법인데 예를들면 문자한통으로, 혹은 전화로 헤어지자고 하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김선수 측에서 그동안 고마웠다. 금메달 딴게 오서코치 공이 크고 감사하지만 이제 길이 다른거 같다. 하면서 인센티브도 좀 주고 퇴직금도 좀 주면서 좋게 헤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함께 금메달을 만들어낸 사람인데 그냥 일개 강사처럼 대해서 오서 코치가 화가 난거 같습니다. 또 오서 코치도 그렇다고해서 언플하면서 당황스럽다느니 어쩌느니 연기하면서 까내리는것도 보기안좋고 답답하네요
인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해체론이 문화 예술에서 이야기 하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와 좀 다른것 같습니다. 건축을 예로 들면 해체주의는 헤겔의 정반합 원리에 기초해 건물을 해체 -> 새로운 창조로 만들어 가는데 인문학의 해체론도 그 기저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인지 궁금하군요. 이미 페이지 넘어간 게시물이라 답변은 없을듯 하지만 늦게 읽은 제 잘못이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