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WARNING : 이 글에는 <토이스토리3>의 내용과 캐릭터에 대한 상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1편의 내용과 2편의 전체적인 줄거리도 소개됩니다.
<토이스토리3>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시리즈의 2편을 잠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보안관 인형 우디는 제시와 프로스펙터라는 인형들을 만나 자신이 과거 TV인형극의 인기캐릭터였고 그들이 같은 프로그램의 동료였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도쿄의 장난감박물관으로 가자고 우디를 설득한다. 우디는 주인인 앤디에게 돌아가려 했으나 제시의 과거를 듣고 마음이 약해진다. 제시 역시 사랑받는 인형이었으나 아이가 커가고 관심사가 변함에 따라 소외되고 결국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디는 장난감으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장난감이 필요 없어질 때 장난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2편에서는 이 철학적 고민에 대한 해답이 명쾌히 제시되지 않는다.
우디는 “버림받을 것인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희귀 아이템으로써 살 것인가?” 라는 갈림길에서 아이들을 기쁘게 하는 장난감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유효기간은 ‘앤디가 어린이일 때 까지만’ 이다.
우디는 앤디와 함께하는 동안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관객으로서는 우디와 장난감들이 앤디에게 줄 수 있는 효용가치가 결국 다했을 때, 그 이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용도폐기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형태로 라이프사이클을 마치게 되어도 우디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차피 3편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리고 픽사는 장난감들의 주인인 앤디가 성장하는 시간을 실시간으로 보내고 나서야 ‘이별에 대처하는 장난감들의 자세에 대한 보고서’ 후편을 완성했다.
그동안 앤디는 대학에 가게 될 만큼 성장했다.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장난감들은 앤디와 놀던 행복했던 시간들을 반추해보지만 더 이상 앤디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나마 버려지지 않고 다락방에 보관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히 탁아소로 보내진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안정적으로 의식주가 해결되고 기본적인 문화생활이 보장되어야 하듯이 장난감다운 삶을 위해서는 같이 놀 수 있는 아이들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장난감들에게 아이들은 주인이자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이다.
성장한 아이들이 나가도 새로운 어린이들이 계속 들어오는 탁아소는 장난감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처럼 보인다.
그러나 탁아소에 온 첫날 버즈를 비롯한 장난감들은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에게 배정된 ‘애벌레 방’은 장난감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소중히 다룰만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노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지극히 간단하다.
“방을 바꿔달라고 하자!”
단 하루의 고생 끝에 그들은 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토이스토리3> 의 문제점은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아이들과의 힘든 하루 일정이 끝난 후 그들은 허리를 피고 관절을 두드리며 망가지고 지저분해진 몸을 추스린다. 마치 고된 일을 끝낸 육체 노동자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앤디와의 생활이 귀족의 삶이었다면 탁아소에서의 생활은 하층노동자의 삶인 것이다.
인간사회와 마찬가지로 탁아소의 장난감사회가 유지되려면 누군가는 그 힘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방을 바꾸게 되면 그들을 대신하게 될 다른 장난감들의 힘겨운 삶에 대해서는 조금의 고민도 없다.
상류층의 삶을 살아왔던 그들에게 사회연대의식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을까?
더 큰 문제는 앤디가 그들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다.
탁아소의 이상적인 모습만 본 상태에서, 그들은 앤디에게 돌아가자는 우디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아이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장난감다운 삶’을 선택했다. 그랬던 그들이 ‘체험 삶의 현장’ 같은 난리블루스를 겪은 후 삶의 조건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컴컴한 다락방을 원하게 된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힘겨운 현실이 무서워진 그들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울고 싶은 아이의 뺨을 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나비 방’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더라도 , 다시 아이들과 노는 즐거움을 만끽했더라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해!”를 이구동성으로 외쳤을까?
시리즈1편의 옆집 소년 시드처럼 장난감들을 함부로 다루는 아이가 주인이어서 온갖 고생을 하던 처지였다면 탁아소의 고생은 오히려 행복하지 않았을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이 필요하듯, 장난감다운 삶을 위해서는 아이들과의 놀이가 필요하다. 즉, <토이스토리>의 장난감들이 아이들과 놀 때 장난감들은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조건이다.
좋은 환경에서 노동이 곧 삶의 즐거움이 되는 생활을 누려왔던 그들에게 애벌레 방에서의 고된 노동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애벌레 방은 온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도 삶의 기쁨은 거의 누릴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러나 현실이 어렵다면 도피가 아니라 개선의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되더라도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는 고민이 그들에겐 전혀 없다. 다락방으로 도망칠 궁리뿐이다.
이는 마치 야생으로 돌아간 동물원의 동물들이 나태하고 안락한 삶을 그리워하는 격이다.
명백히 도피와 퇴행이다.
물론 공평을 위해 교대로 방을 바꾸자는 건의를 했어도 랏소 베어는 무시했을 것이다.
랏소가 지배하는 탁아소의 인형사회는 지도자와 소수의 간부들이 국민을 통제하며 국민의 희생으로 국가가 유지되는 권의주의 독재정권에 대한 명백한 은유이다.
마치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세상처럼 곳곳에 설치된 CCTV가 장난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저항세력은 투옥된다.
이에 그들은 마치 헤브라이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처럼 탁아소로부터 엑소더스를 감행한다.
홍해의 기적이 나타나듯 장난감들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적 같은 구조를 받는다.
유대의 신이 바다를 갈라 길을 터 준 것처럼 그들을 불길에서 구해준 것도 갈고리 신이다. 이 부분은 전편에서 보여준, 외계인 인형들과 갈고리 신의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관객에게 더 큰 재미를 줄 수 있는 장면이다.
결국 그들은 온갖 위기를 넘기고 대탈출, 아니 대도피 끝에 앤디의 집으로 돌아와 다락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지도자 우디의 기지가 발휘된다. 어머니가 앤디에게 쓴 메세지인 것처럼 꾸며내어 자신들을 동네 꼬마 아가씨 보니에게 보내달라는 요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리즈1편에서 우디는 이미 혁명을 이끌어 옆집의 악동 시드로부터 장난감들을 구한바 있다. 그것도 아시모프의 로봇대원칙과 같이 절대 어기면 안 되는 장난감대원칙(인간에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을 어겨가면서.
이번에도 그들은 탈출과정에서 탁아소의 장난감 사회에 자유와 민권 의식을 전파했고 독재자 랏소를 실각시켰다. 이제 그곳은 일이 고될지언정 예전과 같이 독재에 시달리고 장난감들의 희생으로 체제가 유지되는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당연히 탁아소로 다시 돌아갈 줄 알았던 우디의 선택은 실망스럽게도 보니의 집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러니까 역시 이건 엑소더스 스토리였다.
모세가 온갖 고난 끝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민족을 이동시켰듯, 장난감들의 지도자 우디는 결국 안락함이 보장되는 보니의 집으로 장난감들을 인도한 것이다.
탁아소의 장난감들이 교대근무를 하며 여러 아이들과의 힘든 노동을 하는 동안, 우디네들은 장난감을 소중히 여기는 보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다시 상류계층으로의 진입이다.
그렇다면...우디의 선택은 과연 옳은가?
아마 우디가 보니의 집으로 장난감들을 이끈 것은 보니와 즐겁게 놀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이라면 우디네들은 다시 예전처럼 안심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겐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는다.
보니가 성장하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그때도 쓰레기신세가 될지, 창고에 처박힐지, 다른곳으로 기증이 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지 않을까?
유예기간을 늘렸을 뿐, 결국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탁아소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우디의 독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장난감들 모두의 주체적 선택으로.
발상의 전환을 한다면 탁아소는 장난감으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에서 벗어나 주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이다. 오히려 그들이 양육의 일부를 책임지며 많은 아이들을 키워내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도 있는 곳이다. 고되지만 해고의 걱정이 없으며 장난감으로서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보람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는 곳이다.
우디는 보니의 집에서의 경험으로 장난감으로서의 참된 기쁨, 노동의 가치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 깨달음이 그들을 탁아소로 인도했다면, 혁명의 이념을 전파한 그들이 탁아소 사회로 들어가 그 곳 장난감 노동자들과 연대해 평등하고 더 좋은 삶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디였을까?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 영화에는 배신당한 자의 슬픔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랏소는 끝까지 악당으로 묘사되고 인과응보의 결말을 맞는다.
사실 잃어버린 인형들 중에서 랏소만이 대체되었다는 것(그것도 똑같은 인형으로)은 오히려 주인인 데이지가 랏소를 가장 사랑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이 사랑받았기에, 자신이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랏소의 마음은 그 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
이런 랏소의 슬픔까지 어루만져주기에는 러닝타임이 너무 촉박했을까?
그리고 배신감으로 인한 랏소의 분노는 왜 인간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같은 장난감에게로 향했을까? 분노가 그를 악당으로 만들었다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시리즈의 1편에서는 사랑받던 장난감의 입장에서 주인의 관심이 새로운 장난감에게로 가게 될 때 느끼는 소외감과 질투를 다루었다.
2편에서는 주인이 성장했을 때의 불안이 갈등을 일으키는 중심테마였다.
그런데 3편에서 슬쩍 넘어가버린 랏소의 이야기는 사실 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랏소는 자신이 상대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며 자신이 없어져도 얼마든지 똑같은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장난감들 스스로의 결단이나 의식구조 변화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관심을 못 받거나 버려진다는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이야 말로 장난감들에겐 존재자체의 한계인 것이다.
사실 버즈는 이미 대체가능성의 경험을 슬쩍 한 적이 있다. 2편에서 대형 장난감매장에 들어갔을 때 자기와 똑같은 수없이 많은 버즈가 박스 안에 놓여 진열된 것을 보고 그 이미지에 압도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편에서 버즈는 자신이 우주전사가 아니라 장난감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었다. 아마 버즈가 행동형이 아닌 사색형 캐릭터였다면 그 수많은 자신의 복제품들을 본 순간 ‘나는 누구인가’ 라는 모든 철학의 공통된 관심사를 떠올리며 다시금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랏소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깨달았다.
자기와 똑같은 수많은 복제품이 언제든지 자신을 대신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에 ‘존재의 초라함과 보잘것없음’ 을 충격적으로 각인시켰다.
우디네들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해주지 않고 “주인에게 구해달라고 해”라고 냉소적인 대사를 던지는 것은 이런 트라우마 때문이다. 장난감으로서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오직 ‘주인찾아 3만리’ 하는 우디네들이 랏소에겐 가소롭게 보였을 것이다.
이렇듯 랏소의 이야기는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나 무겁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을 수는 없다.
후반부에 보여준 두 번의 작별 때문이다.
먼저 품안의 자식을 떠나보내는 엄마와 성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아들 사이의 작별이 나온다. 곧 이어 추억이 깃든 장난감을 다른 아이에게 맡기는 앤디와 옛 주인을 떠나 새 주인을 맞는 장난감들과의 이별 장면이 배치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작별의 구도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하나이다.
소중히 키운 아들을 더 큰 세상으로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장난감들을 보니에게 보내는 앤디의 마음과 대칭된다.
엄마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아들의 마음은 새로운 주인에게 가는 장난감들의 마음과 상통한다.
따로 떼어 보아도 아름다운 두 작별은 데칼코마니처럼 맞물려 관객의 감정을 더욱 고양시키고 슬프지만 감동적인 이별을 완성한다.
산다는 것은 퇴적물이 쌓여 암석이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세월의 더께를 쌓는 사이사이에 우리는 여러 번의 헤어짐을 겪는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 점점 더 다져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슴 뭉클한 작별의 장면들은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헤어짐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떠난다는 것과 떠나보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운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도 15년간 사귀어 온 이 장난감 친구들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정말 그리울 것 같다고, 그리고 함께 놀아줘서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고 진심어린 고마움을 담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