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 정말 고맙다, 내가 진짜 와우 끊을께."
참 도원결의의 현장이 이랬을까요. 만취상태에서 제 얘기 몇 마디 듣더니 친구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왔습니다. 저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자존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러면 내가 뭐 끊을까? 담배 끊을까?"
"담배 끊기 힘들텐데…."
속으로 퍼뜩, 어쭈 이놈봐라가 올라오더라고요.
"야, 내가 담배 말고 스타도 끊는다, 다 끊는다!"
술이라는 게, 뭐, 그렇습니다. 처음에 별 생각 없이 한 잔, 두 잔 먹다 보면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죠. 마음 맞는 친구와 술을 먹을 때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술을 먹는지 술이 나를 먹는지 모르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이 딱 그런 상황이었네요. 졸업장만 기다리며 소일거리 없이 여름을 맞이하던 중에 후배들의 동아리 일을 도와주러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잘 곳이 마땅치 않아 친구녀석 자취방에 신세지기로 했고요. 선배랍시고 후배들한테 폼도 잡고 싫은 소리도 하고 돌아서는데 기분이 영 야리꾸리했습니다. 사실, 혼자 가만히 회상하기만 해도 복잡미묘한 심정이 북받칠텐데, 그 한복판에 가서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마냥 애를 썼으니 울지 않은 게 다행이었습니다. 에쎄 한 갑 사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탁탁 불 붙여서 한모금 들이키고 푸우 뱉은 다음에 왼손에다가 담배개피를 피고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자취방 주인한테 "소주 먹자" 문자 한 통 띡 보냈죠. 그리고, 한 잔, 두 잔… 난데없는 결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스타를 끊는다? 막상 말을 하고 나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내 자신한테 의문이 들더군요. 지우고 또 깔고 지우고 또 깔고, 몇 번을 그만두려고 해도 실패했는데? 거울에 비친 나한테 말 거는 기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스타를 끊을 수 있지?' 메아리 치듯 머릿속에서 답변이 들려왔습니다. '피지알을 끊어야 스타를 끊지. 맨날 스타 얘기 보면서 어떻게 스타를 끊어?'
"야, 내 피지알도 끊는다"
"니 보는 스타 사이트?"
"어"
"알았다"
아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쉽게 말하나.
"야, 너 피지알이 나한테 어떤 건지 알아? 내가 그냥 끊지는 못하고 니 방에 가서 작별인사의 글을 남겨야겠다."
아무리 술을 먹었어도 저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하다니. 그리하여 핸드폰 서약서에 담배, 스타, 피지알이 한 번에 올라갔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는데, 작별인사의 글은커녕 들어가자마자 들입다 곯아떨어졌습니다. 네, 이 글을 쓰게 된 경위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냥 시시한 내용입니다, 사실 담배, 스타, 피지알 중에 하나라도 지켜질 지 자신도 없네요.
#2.
프로게이머분들, 게임방송피디분들, 캐스터에 해설자분들까지 함께 하는 이곳에서 제 이야기를 하는 게 저조차 웃기다 못해 가소롭네요. 하지만,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대나무밭에 당나귀귀 외치는 기분으로, 간략하게 읊조려 봅니다.
스타가 처음 나오던 시절, 저는 초등학생이었고, 게임방송이 나오자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기욤 패트리 선수의 경기를 보고 임요환이 쓰는 빌드를 따라해보는 정도로 스타를 꽤 좋아했는데 금방 관심을 접게 됐습니다. 친구들이랑 나가서 노는 걸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PC방, 오락실, 아니 애초에 집 밖으로 나가는 일 거의 없이 TV 보고 책 보면서 조용히 지냈습니다. 기숙사에서 지내는 힘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는 게임 같은 걸 할 생각도 나지 않았고요.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게 됐고 기숙사 생활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제 스타 인생이 시작된거죠.
대학생이 되니 할 일이 참 없었습니다. 하지만, 괴롭히는 선생님들, 친구들도 없고, 사소한 문제도 없고, 나름 해방감에 행복했습니다. 이런 무료하고 괜찮은 일상 속에서 스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방 쓰던 친구, 같이 고등학교 다니던 친구들 모두 예전부터 스타를 좋아했고, 시간은 남고 친구는 없는 저는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죠. 얄미운 친구 하나가 프로토스를 했었고 제 룸메이트가 저그를 했었는데, 그 녀석 잡으려면 저그를 해야된다는 룸메의 권유에 저그를 고르게 됐습니다. 그 친구들이랑 놀 때면 항상 농담 삼아 그 때 저그가 아니라 테란을 했어야 됐다고 낄낄거렸는데, 세월이 무상하네요. 아마 그 친구들 역시 이 글을 볼텐데, 또 이렇게 저렇게 지내다보니, 요즘 이 한가로운 날에 서로 연락 한 번 없을 정도로 멀어졌습니다. 친구따라 강남 갔는데 어느 순간 난 강남에 있는데 친구는 어딨는지 모르겠는, 그런 상황, 여기저기서 많이 줏어들은 것 같은데 제가 그 상황이 된 거죠.
어쨌든 스타를 시작은 했는데 몇년을 하던 친구들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맨날 깨지다가 어느날 어쩌다가 한 판 이기고 그 횟수가 늘다보니 제법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기는 횟수보다는 지는 횟수가 많은지라 왠지 모를 승부욕이 불탔고, 그야말로 스타에 빠지게 되버렸습니다. 그렇게 대학 첫 6개월을 어중이 떠중이 보내고 가을학기를 맞이할 당시 피지알을 비롯한 스타계에 엄청난 인물이 등장합니다. 스포츠 스타를 동경하게 되는 게 그런 걸까요? 현실의 내 저그는 이렇게 친구들한테 얻어터지는데 저기 저 곳에 있는 저그는 테란이고 프로토스고 다 때려잡는구나. 그렇습니다. 마재윤이 MSL 연속 결승 진출을 하고 온게임넷 로열로더가 된 그 시기, 2006년 가을이였습니다. 마재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수업도 빠지고 시험도 빠졌고 경기가 끝나면 빌드를 따라해보고 심심하면 또 보고 그랬죠. 그 잘 나가던 마재윤이 어처구니 없게 프로토스한테 결승에서 지더니 나중에 죽을 쑤는 걸 보면서 동경에서 응원으로 마음이 바뀌더군요. 이기는 걸 보려고 마재윤 경기를 봤는데, 나중에는 마재윤이 이기는 걸 보려고 마재윤 경기를 보게 되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허허, 그런데, 참, 피지알에 저랑 비슷하신 분들 정말 많은 것 알기에 내색은 못해도 저도 참.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가면, 그렇게 마재윤 경기를 챙겨보느라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디씨인사이드도 알게 되고 점차 컴퓨터 폐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마재윤만큼 인터넷을 달구었던 스즈미야 하루히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도 보게 되면서 2006년 가을에 그야말로 폐인 생활의 절정을 달렸습니다. 덕분에 일본 애니메이션 성우 몇 명, 제작사 몇 개 정도는 알 정도로 쓸데가 희박한 지식들을 알게 됐는데, 5개 보던 것이 4개, 3개 줄어들면서 어느덧 일본 애니메이션은 안 보게 되었습니다.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스타는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을 빠질 정도로 열의를 불태우지는 않게 되었지만, 육룡이니 택뱅리쌍이니 재밌는 콘텐츠가 나오고 재밌는 전략이 나오고 한 판 두 판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뚝 하고 끊어질만한 것이 아니었죠. 그렇게 쭉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3.
피지알은 처음에 스타 일정이 보기 편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접속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스타 일정이 가장 많이 보는 게시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매일 들어오는데 아뿔싸, 게임게시판을 보게 되고 자유게시판을 보게 되고 유머게시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자유게시판이라는 곳은 정말 재밌는 곳이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여기 뭐하는 사이트야.'라는 탄식이 나오게 하는 게시물들. 과학, 철학 관련 글이 아니라 계산화학, 분석철학 관련 글이 올라오는 기가 막힌 전문성. 이 심도 깊음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글쓴이들의 응어리가 느껴지는 그러한 외침 같았습니다. 하나, 둘, 그런 글들을 읽다 보니 처음에는 나도 써보고 싶어지고, 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편집해서 올렸다가, 나중에는 피지알을 위한 글을 쓰게 되고, 댓글 논쟁에 참여하고, 화도 났다가 또 참여해보고. 제 과정이 아마 여러분들이 겪으셨을 피지알 중독증상과 거의 흡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취기 어린 약속에 피지알과 헤어질까 고민하다 간만에 항즐이님이 쓰신 공지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에 10대들을 향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처음 봤을 당시에 치기 어린 마음이 들었습니다. 10대던 70대던 자기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혹은 낭비하느냐는 다른 사람이 참견할만한 사안이 아닙니다. 더욱이 썩은 대한민국을 더 썩게 만들고 잘 먹고 잘 사느냐 아니면 저항하고 바꿔나가면서 힘들게 먹고 힘들게 사느냐는 도덕적 잣대조차 들이대기 어려운 일일 겁니다. 지금도 특별히 변함 없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보니 항즐이님이 쓰신 공지글의 그 내용은 그런 꼰대의 충고가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지금 대학을 졸업한 저에게 갓 입학한 후배 한 명을 앉혀놓고 아무 얘기나 해봐라 해보면 나올 법한 그런 그냥 정말, 공지였네요.
19살부터 23살. 웃기는 얘기지만,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를 막 떠나보낸 심정입니다. 그 시간동안 매일 피지알에 접속하고 거의 매일 스타를 하고 보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인생이 순식간에 지나가나 싶기도 하고, 피지알과 스타에 투자한 내 노력, 시간 인생에 후회가 많습니다. 그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고 그 시간에 전공 공부를 하고 그 시간에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고 그 시간에 사회 경험을 했더라면….
"나도 똑똑한데, 나도 영어 잘 할 수 있는데, 나도 좋은 데 갈 수 있는데, 나도 돈 많이 받고 살 수 있는데."
이런 한심한 후회 정도는 아마 해도 괜찮겠죠? 왜 내가 스타를 했을까, 왜 피지알에 글을 썼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것이 제 인생이 일부가 되었고, 앞으로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제 인생을 전개시킬지는 미지수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저런 한심한 후회가 조금이라도 드니까, 혹시 원망하는 마음이 들까, 잘못된 생각들이 자리잡을까, 피지알을 떠나려고 합니다.
#4.
이런 식으로 회상을 하니 마치 젊은 날 청춘을 피지알에 통째로 갖다 바친 느낌인데 당연히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피지알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아 이 글을 쓰는 겁니다. 쪽지, 댓글, 제가 쓴 글을 통해 교류하신 분들, 또 지난 번 독서모임에서 좋은 말씀 해주셨던 분들, 좋은 글을 통해 많은 지식과 생각, 경험을 전달해주신 분들 다들 너무 감사합니다. 특별히 아이디를 언급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분은 Orbef2님입니다. Orbef2님과 직접 많은 얘기를 하지 못해 조금 아쉬웠지만, 주최하신 모임에 참석해서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고, 쓰신 글들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피지알처럼 좋은 사이트를 술김에 안 들어오게 되다니, 정말 억울합니다. 100만 원 내기를 했는데, 나중에 쿨하게 하나 이뤄놓고 담배 한 대 물고 스타 한 판 한 뒤에 피지알에 글 한 번 쓰렵니다. 그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P.S. ... 그 인간적으로 이 글에 달릴 댓글만 이틀 정도 보겠습니다. 그 때 담배 끊는다고 했을 때도 오늘까지만 핀다고 하고 몇 개피 더 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