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지하철에서 구걸하거나, 껌하나만 사달라는 사람들을 비웃는게 왠지 정상인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어디에서는 저사람들은 다 사기친다고 하고 누군가는 저런거 사면 XX이라고 욕하더군요. 서라운드 스피커 마냥 아주 잘 들리게요.
그런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한편이 있습니다.
분명 재수할때 언어공부하다가 곱씹어도 곱씹어도 마음에 들어서 따로 빼논 시였지요.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人格)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生命)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罪惡)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倫理), 도덕(道德), 법률(法律)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해설은 푸른나무 출판의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라는 책을 참고하였고, 그것과 함께 제 주관을 포함하여 씁니다.
역사속에서는 언제나 불의와 폭력이 존재합니다. 표면상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이나 아름다운 말들로 꾸미지만 그 속에 탐욕과 불의를 감추고 있는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는 때때로 이 세상은 악의 소굴이라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과연 인류와 문명의 역사는 이런 악의 구렁텅이밖에 되지 않는가, 이 시의 숨은 주제는 그런 문제에 관련되어 있지요.
이 작품의 '당신'은 이상향, 독립 따위로 읽힙니다. '당신'이 없으므로 '나'는 사람다운 삶을 부정당하는 치욕속에 있기 때문이지요. 제 2,3연에서는 '나'에게 갈고 심을 땅도 없고, 집과 민적도 없다고 나옵니다. 이러한 나를 모독하고 능욕하는 '주인'과 '장군'은 넓게는 인간세계의 타락한 모습을 나타내고, 좁게는 민족의 삶과 존엄이 박탈된 식민지하의 상황을 뜻하는 듯 합니다.
이처럼 타락한 세계, 치욕적인 삶 속에서 '나'는 절망합니다. 온갖 도덕, 윤리는 허구에 불과하고 권력(칼)과 돈(황금)에 봉사하는 세상에 대해서요. 그럴싸한 명분은 권력과 돈 앞에서 그저 수단으로 바뀔뿐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는 마지막 행에서 이러한 충동을 드러냅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음으로서 더러운 현실을 부정하고 이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지요. 술을 마심으로서 현실을 거부하고,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함으로서 이제까지 일어난 역사와 문명에 대해 '허위와 기만'이라며 외치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앞에 무력한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혐오가 드러나지요.
그러나 마지막 순간, 다행이도 그는 '당신'을 발견하지요. 이 '당신'이란 세상이 타락했다하더라도 사람은 바로 이 현실과 싸우지 않고서는 어떠한 정의, 선에도 다다를 수 없음을 암시하는 존재입니다. 역사가 모두 정의로웠던 것은 아니나, 우리는 바로 그 잘못된 역사들 안에서 참된 가치를 이루려 모색,반성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즉, 한용운의 역사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식은 바로 이런것입니다. 인간이 권력과 돈앞에 무력하고 그 많은 지식과 윤리, 도덕과 이성들이 썩어간 고목처럼 스러진다 한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절망치 않고 싸움으로써 참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길은 너무나 험하고 아픈 길입니다만, 한용운은 그렇게 사는 것 만이 '참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좁게는 일본의 일제강점기 시절의 침탈에 대한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좀 더 크게 지금의 현실에 확장해 보겠습니다. 동남아나 남미에서는 '아메리칸드림' , '재팬 드림', 에 이어서 '코리안 드림'이 부는 것처럼 부자가 될 꿈을 가지고 한국에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마치 시 속의 '장군'이나 '주인'처럼 그들에게 행동하지요. 보험도, 임금도 제대로 적용치 않고, 그저 대체노동력이 충분하기에 갖은 횡포를 부리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저 그들이 품은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 이하임을 꾸욱 참아야만 합니다. "사장님 나빠요~"라고 말할 수 있는 노동자는 아마 거의 없을 테지요.
즉,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지주나 친일 지주, 경관들이 그러했듯 우리가 외국인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에게 하는 일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일깨우고, 반성의 시간에 젖게하는 시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비단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고 학대하는 나쁜 기업주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그들처럼 사회적 약자로서 존재하는 거지들이나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저들은 멀쩡한데도 앵벌이를 하는걸꺼야'하는 속설을 되뇌이며 애써 그들을 비하하고, 무시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칼과 황금도 휘두르지 못할 걸 아니까 이러한 행위는 더욱 적극적이고, 겁이 없어지지요. 마치 들으라는 듯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돈이 아까워서 주지않는게 아니라, 저들이 나빠서 안주는거라고, 자신을 변명하며, 우리는 착하지만 저건 부당한거야 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요? 까짓 얼마 안되는 돈으로, 비록 그사람이 정말 불순한 의도의 앵벌이더라도 우리에게의 오백원보다는 그들에게 오백원이 더 소중하고 가치있게 쓰일 가능성이 높으니-그냥 속아주는 셈 치고 주어도 되는 것인데. 많은 옹졸한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착하지 않음을 애써 변명하는 듯 보입니다. 물론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겠으나 지하철이나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이 500원정도를 '희생'까지 말할만큼 중대한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겠지만요.
우리는 역으로 당했던 수많은 희생과 약자로서의 설움에는 뜨겁게 끓어오르면서-물론 당연히 그래야합니다만- 주변의 거지나 사회적 모순의 희생자들, 베트남의 유족들이나 피해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사회적 강자가 일본인 에서 우리로 변했을 뿐,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행위를 정당하게 합리화 하는것처럼 보이지는 않으시나요? 마치 저들은 당연히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 처럼요. 아니면 그저 우리는 상황이 그렇고 실제로 속을 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다면서 책임을 피하거나요.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반복하다보면 진실로 인식하듯,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저렴한 의식에 대해 무방비해진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역시 우리는 칼과 황금앞에서 쉬이 '참인간상'을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세상이 이미 '참인간'을 구형취급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