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조그마한 일을 벌리며, 주위의 유능한(?) 인재(?)들을 스카웃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이러저러하게 영어일어한국어 3개국어 능통+각종 업무경험 풍부한 친구 하나를 꼬시게 되었는데, 얼마 전 그 친구가 제게 이런 말을 건네더군요.
"야. 근데 예전에 너 술먹고 막 사고치고 다녔냐?"
"ANG?"
"아니, 친구한테 너랑 같이 일한다고 말하니까 그 친구가 진심어린 목소리로
너랑 왠만하면 일 하지 말라고 하던데?"
"읭? 뭐? 누가? 왜?"
종합해보자면, 한때 개처럼 술을 마시고 다니던 시절 단골 술집 중 하나에서 알바를 했던 사람이라던데, 제 술버릇이 너무 안좋은 덕택에 나쁜 인상이 남은 듯 하답니다. 그러니까 대충 3,4년 전의 일인데. 게다가 나는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군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나쁜 인상을 줄 정도면 아무래도 제가 좀 심하게 굴었던 듯 합니다. 뭐, 기억나는 당시의 단점들은 술을 좀 많이 마셨다는 것. 몸을 잘 못 가누는 편이었다는 것. 연애에 실패한 사람들을 지독한 인신 공격으로 항상 울렸다는 것 정도였을 텐데, 정확히 어떤 때 무슨 짓을 해서 나쁜 평판을 얻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는 술마시면 개가 되는 사람입네 같아서 변명하자면 대충 1,2년전을 기점으로 전 술버릇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취할 때 까지 안마시는 습관을 들이고, 취하지 않습니다. 2년동안 두 번 정도 취했었나. 아무튼.
뭐, 누구나 하는 착각인 '그래도 나는 착하게 살아왔으니' 하는 착각에서 살다가 받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적당히 나쁜 짓을 하며 살아온 듯 합니다. 그렇게 세탁기를 돌리고 샤워를 하며 잠시 생각해보다 머리가 아파졌습니다. 아, 나 꽤 아니 그야말로 남근추출적으로 잘못 살았구나. 어떤 점들에서는 분명히 악평을 받을 만 하구나.
몇 몇 조모임에서 순도 100프로의 프리라이더로 살았다거나, 일상적인 약속들을 어겼다거나 하는 사소한 잘못들. 몇 몇 조직의 장을 맡아놓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던 순간들. 스스로 명확하게 정의롭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 사람을 배신한 날들. 그리고 수 많은 악행들. 아, 나는 정말 질 나쁜 인간이었구나. 라는 생각입니다. 대체로 무책임과 관련한 잘못들이 많이 떠오르더군요. 장으로 있던 어떤 집단의 중요한 회의에 술을 먹고 뻗어 참석하지 못했다거나, 술을 먹고 뻗은 정도가 아니라 급성 알콜중독으로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거나. 업무 인수인계를 대충 하기는커녕 임기 끝내고 바로 잠적해주신 덕에 후임자가 죽도록 고생했다거나. 처리해야 할 데이터를 백년만년 딜레이시켰다거나. 뭐,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 좋은 평판을 남겼을 리는 없지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덕에 그 시절 만난 친구들은 여전히 제 곁에 있어주지만, 미안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많이 떠오른 잘못들은 역시 인간에 대한 배반입니다. 라고 하기에는 거창하고 스무 살 서른 살 남짓한 인생에서 이런 문제들이란 연애 문제겠지요. 자주 감정과 언어를 흘리고 다녔습니다. 어떤 이와는 내가 양다리를 걸친 덕에 깨어지고, 다시 사귀었다가 다시 양다리를 걸친 덕에 다시 깨졌습니다. 앞으로 영영 볼 수 없겠지요. 순진한 사람에게 장난처럼 폴랑폴랑 감정을 던져 놓고 두어 달 놀다가 휙 잠적해 버린 덕에 마음 고생을 심하게 시킨 적도 있습니다. 편할 때 만나 놀고 언어와 사랑과 감정을 헐값에 넘기다 불편해지면 안면몰수하고를 반복하다 꽤나 욕을 먹고 갈라진 적도 있었던 것 같고. 하지만 갈라짐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사귀었던가요. 친구의 연인, 후배의 연인인거 뻔히 알면서 수작도 걸어 본 듯 하고. 사람의 기억이란-아니 내 기억이란 간사해서 누구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무책임에 기인한 사건들이려나요. 그네들과 그네들의 친구들이 날 좋게 기억해 줄 리는. 아, 역시나 이것도 술과 마찬가지로 최근 1,2년을 기점으로 "착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악행과 상관 없이, 억울한 악평을 산 적도 있습니다. 대체로 억울한 악평이란 그렇고 그런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이를테면 연애라던가, 연애라던가. 막상 나는 딱히 감정도 수작도 추파도 보내지 않은 아해들의 연인들이 내게 강렬한 적대감과 악평을 표출한 적이 두어 번 있습니다. 해당자와 전혀 상관없는 강의를 갑자기 청강해서 내 뒷자리에서 나를 쏘아본다거나, 아해를 잠깐 만났다 집에 왔는데 갑자기 불현듯 서든리 미니홈피에 업로드한 자작 UCC가 불건전 게시물로 신고당해 있다거나(아, 사회통념상 "약간" 불건전하긴 했습니다만 서너 달 아무 문제 없이 게시되어 있다가 하필 만난 다음 날 신고처리되더군요,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뭐.). 뭐, 이해하지 못할 감정은 아니지만 내가 딱히 감정을 표현한 적도 수작을 건 적도 없는데 그렇게 나오신다는 건. 아니 나를 직접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막상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인간들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들. 이봐요. 나도 친구의 친구에게 내 연인의 마음을 뺏긴 적이 많지만 그래도 그래 찌질하게 굴진 않았습니다만.
잘못도 하고 오해도 하고 잘못도 받고 오해도 받는 그런 삶입니다만, 뭐어, 어쨌든, 나는 그리 잘 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좋은 친구들이 함께해주고 있다는 건, 타고난 인복에 감탄해야 하는 걸까요. 조금 더 착하게 살아야겠어요. 이런저런 고백을 들은 유능한 인재님께서는 "내가 너님의 배덕의 상대였다면, 넌 나한테 칼맞았어요."라는 코멘트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럴지도. 생각해보면 나는 누군가의 미움이나, 악행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정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라니, 좁 비겁한 듯. 있습니다, 가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하지만 결국 나의 잘못이 컸던 사건의 감정적 가해자에 불과한 치일진데. 잊어야겠죠.
착하게 살아야 겠어요.
개인적으로 만화에 등장하는 가장 좋아하는 라스트컷은 김수박 님의 어느 단편-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부라자 유어 라이프 비슷한 제목이었습니다-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목적 없이 여행을 간 주인공이, 떠돌이 아저씨와 만나 겪는 작은 에피소드를 다룬 단편이었는데. '아저씨는 아저씨의 삶이 부끄럽지 않으세요?'라는 주인공의 질문에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안 부끄러워.
그래도 나는, 착하게 살아왔잖아"
-
아, 그나저나 내일 책모임이죠? 되도록이면 참석해보고 싶어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음, 제 생각에도 누구나 다 자신이 나쁘지는 않은 길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을 일이 잘 없기 때문이 아닐까하네요.
헥스밤님이 최근 1,2년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헥스밤님의 나쁜 모습이 일부분이나마 보였을 수도 있죠.
저도 나름 잘,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또 어느 부분에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역할은 많잖아요? 한 집안의 누나든 형이든 동생이든, 아들이든 손주든 말이죠.
누군가의 친구일 수도 있고, 선배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고, 그냥 버스에 앉아서 고개 푹 수그리고 있는 개념없는 청년일 수도 있죠.
저의 역할은 굉장히 많으니까 그 역할들을 모두 충족시키는 건 힘들겠지요.
그 상황 상황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긍정적인 평가가 많아지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