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경, 평화롭던 학교가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다름 아니라 괴생물체 하나가 추레한 꼴로 교정을 걸어다니는 것이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드넓은 교정에 추리닝에 쓰레빠를 신고 머리에는 까치집을 한 모습은 이 학교 학생이 아니라 인근주민, 아니 지하철역 노숙자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사실 인근주민이 맞긴 합니다. 학교 근처에 자취하거든요.
오른손에 소주병을 들었으면 어울리겠지만, 의외로 오른손에는 책이 들려 있습니다. '전신 조훈현' 조훈현의 바둑인생을 소설처럼 재미있게 쓴 대필 자서전입니다. 네. 유유히라는 괴생물체가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입니다.
벌써 학교를 몇 년째 다니고 있는지 손바닥 하나로는 헤기 부족할 지경입니다. 여자 동기들은 거의 졸업하였고 이제 남자 동기들도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집에서의 원망섞인 물음은 언제 졸업할래에서 언제 인간될래로 바뀐 지 오래죠. 후줄근한 유유히 앞을 바삐 지나다니는 여후배들의 짧은 치마,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형광색 바지의 멋쟁이 남후배들. 까치집의 쭉정이는 슬금슬금 멋쟁이 남녀들을 피해갑니다. 혹시나 아는 사람 마주칠까 싶어 고개도 푹 숙인 채.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나온 길. 날씨는 쨍쨍하고 하늘은 푸릅니다.
덕분에, 쓸쓸집니다.
책을 지고 메고 들고 부지런히 재잘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학생들을 담배를 하나 물고 쳐다봅니다. 아,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동대문에서 산 (민망한) 옷에 뱃지까지 붙여 달고, 기른 머리 왁스 발라 넘기고 뿔테안경에 페도라까지 척 쓴 채로 학교가 좁다 하고 돌아다녔었지. 멋모르던 1, 2학년 시절. 즐거웠었어~ 내가 작던 그때가~.
역설적이게도, 주위가 모두 쓸쓸하지 않아서 나 홀로 쓸쓸한 그때.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더군요.
"유유히 오빠!" 누구지..? "서현아!"
양산을 받쳐쓴채 요새 유행하는 웨이브 머리를 한 흰원피스의 숙녀가 제게 아는 척을 하는군요. 같은 과 후배인 서현(가명)입니다. 예쁜 외모와 나긋나긋한 성격 덕에 꽤나 인기가 많았었죠. 브X운아이드 걸스의 모 멤버를 닮은 외모로, 저를 포함한 모든 남자들이 "남자깨나 홀리게 생겼다" 정도로 평가하고 있는 아이였지만, 의외로 계속 남자친구가 없다가 군대 간 사이 후배와 썸씽이 있다는 소문만 들려왔었습니다. 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옆에는 여자아이가 한명 더 있지만 모르는 얼굴입니다. 아마 동아리 친구겠지요.
"오빠 진짜진짜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요?"
"나야 뭐 그럭저럭이지.. 넌 잘 지내? 몇학기 남았어?"
"저 한 학기요. 잉~ 졸업하기 싫은데~ 아하하"
여전합니다. 귀여운 척. 문제는 그게 정말 귀엽다는 것이지만.
"오빠 진짜 반가워요~ 어디 가세요?"
"(집에 가는 길이지만, 왠지 할일이 없어 보일까봐)도서관. 하하 공부하느라 폐인같지?"
"요새 머 하시는데요?"
"복학 준비(를 가장한 무위도식이)지 뭐."
이런 식의 무의미한 대화를 하고 있노라니 옆의 친구가 어색해하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왠지 미안해서 대충 대화를 마무리지은 뒤 개강하면 밥사줄께 하니 좋아라 하는 그녀와 헤어졌습니다. 그래도 쓸쓸하던 참에 밝은 아이를 만나서 쓸쓸한 기분이 좀 가신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거기, 그 시점까지는 말이죠.
"한번 더~ 나에게~ 질풍같은 용기를~"(핸드폰 소리)
모르는 번호입니다. 뭐지? 광고전환가? 싶으면서도 받아봅니다. 사실 요새 전화가 하도 없다보니 사채쓰라는 광고전화나 티유 요금제 변경하라는 전화도 괜히 반가워 쓸데없이 오래 끌곤 하거든요. 아네. 그래요? 와. 파격적이네요? 어떡하면 된다고요? 아, 그런데 그 조건은.. 죄송합니다. 어렵겠네요.
"네 저 학교 자주 와야돼요 취직 스터디할려면 오빠한테 올때마다 연락할께요 밥사달라고 히히"
그 이후로도 잡다한 이야기를 계속 재잘재잘대더군요. 외국 나갔다 온 이야기. 취업걱정 이야기.... 계속 맞장구를 치면서 듣고 있자니 뭔가 이상하더군요. 아니, 군대갔다와서 1년이 넘도록 연락도 거의 없다가(싸이에서 한 육개월에 한번씩 서로 방명록 쓴 정도) 뜬금없이 너무 친한 척이군요. 혹시 내게 관심있나? 예전부터 애써 억눌러왔던 생각이지만 갑작스레 예쁘장한 그녀 얼굴이 어른거리며 괜히 혼자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그녀 팔짱을 끼고 캠퍼스를 거니는 상상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집니다. 이것도 병일 텐데요.
"야 어떻게 매번 사주냐^^ 어쨌든 다시 보자 복학하면 나도 학교에 계속 있으니까"
"그래요^^ 정수랑 같이 갈께요 같이 사주세요 크크"
정수? 정수가 누구지? 왜 같이 온다는 거지? 순간 06학번의 반반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떠오릅니다. 아, 그녀석이었구나. 아, 그랬구만.
그 다음은 어떻게 대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충 응응 하다가 끊었죠. 끊고 담배 하나 물고 깊게 빨아들이며 생각합니다.
신기하게도, 쓸쓸했던 마음이 씁쓸함만 가득해 있었습니다.
PGR 분들도 김칫국을 자주 들이키시나요?
저처럼 씁쓸해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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