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인상적인 기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두고두고 떠올릴만한 이야기입니다. 훗날 강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그 기억 속에서, 이제 막 제국의 지배자가 된 소년 황제는 초목이 움트는것을 보고 즐겼고, 다른 성(省)이나 외국의 묘목을 가져와 심기를 사랑 했습니다. 그리고 몇 마리의 기러기를 잡아 장춘원(長春園) 물가에 만든 커다란 새장 속에 가두어 놓고, 마음껏 물을 먹게 하고 모이를 쪼아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북쪽 변경너머 머나먼 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야생 기러기가 사는데, 이놈들은 첫서리가 내리기 전 본래 살던 둥지를 떠나 중국 본토로 내려오고, 북변을 지키는 군사들은 이들을 보고 곧 겨울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강희가 잡은 기러기는 그런 기러기들이었습니다.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따사로운 봄이 올 적에, 이 기러기들 주위로 흰 오리들이 물위를 떠나디며 몰고, 다른 새장에는 공작과 뀡, 메추라기와 앵무새, 주먹만한 새끼학이 있으며, 비탈에 누워 있는 황갈색 사슴과 노루들은 막대기로 쿡쿡 찌르면 일어나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입니다. 장춘원에는 작약, 백합, 자두, 복숭화, 목련은 물론 하미에서 들여온 포도나무가 수천 평의 땅에서 자라났습니다. 포도밭에는 백포도, 흑포도, 자줏빛 포도, 청포도 등 온갖 종류의 포도가 열리는 것입니다.
황제의 즐거운 추억 속에 묘사된 장춘원의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입니다. 그 유명한 정경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영남지방의 규방가사인 화류가(花柳歌)에서도 이렇게 묘사가 되었습니다.
"화류간(花柳間)에 노든 벗님, 이내 말슴 들어 보소. 구십춘광(九十春光) 덧업서, 장춘원(長春園)에 피는 꽃이, 지난밤 찬 서리에, 하마 거의 이을러니, 이우러 떠러지면, 고은 색을 일흘로다. 관성자(管城予) 빗기 자바, 백화 방명로거 내니, 패강월 발근 달에, 선녀들도 하도만타."그리고 다시 시간이 남으면 소년 황제는 사냥터로 이동했습니다. 사냥은 여러 사람들에게 즐거운 여흥거리로 여겨졌지만, 황제가 사냥을 하려는 이유는 단순한 여흥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만주 왕조의 군주인 강희는 그것으로 자신을 단련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을 단련하기 위한 사냥에 나서게 된 날, 근어시위 아수모얼건은 이 대제국의 주인에게 망설임 없이 여러 자세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그 충고를 받아들인 소년은 이내 활과 총을 다루는데 상당힌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미래의 일이지만, 북변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느 무관은 이 황제가 사슴을 엄청나게 많이 잡자, 마치 신과 같다고 감탄했습니다.
강희제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짐은 종종 사슴들에게 고함쳐서 그들이 덫에 걸리게 만든다. 그 놈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여 신 같은 솜씨라고까지 할 수야 있겠는가?"
효장태후
8살 짜리 아이가 다스릴 수 있는 제국은 없습니다. 하물며 그 제국이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소년 황제가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공부였습니다. 소년은 공부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에 대해 황제는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짐은 8살, 황상에 올랐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당시 장 아무개, 임 아무개라는 내시 둘이 짐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둘 다 명대에 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경서를 가르쳤다. 또 한림원의 심전이 짐에게 명대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가르쳐 주었다. 훗날 짐은 열심히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고, 17년부터는 매일 오경(새벽 3시~5시)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전에도 역시 글을 읽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해 피를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교육의 중심은 바로 어린 효장태후의 몫이이었습니다. 황제가 아직 사리분별도 못할 나이였을때는 효장태후의 시녀이자 충복인 소마라고(蘇麻羅故)라는 여인이 황제를 돌보고 기초적인 교육시켰는데, 그녀는 종종 중국의 사극에서 효장태후의 심복으로 묘사가 됩니다. 실제로도 강희 41년인 1702년에 소마라고가 사망했을때 효장태후의 능인 소서능 옆에 묻힌 것으로만 보아도 보통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런 교육이 있기전에도 이 소년은 맹랑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아직 순치제가 살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1659년의 어느 날, 6살 짜리 꼬마였던 히오완예이는 형인 복전, 아우인 상녕과 함께 부왕인 순치제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라고 하여도, 평소에는 얼굴 조차 보기 힘든 그런 아버지. 순치제는 이 날 따라 그들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물었습니다. 막내 상녕은 고작 3살이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형 복전은 그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현명한 군주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히오완예이 ─ 강희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꼬마는 씩씩하게 자신있는 투로 입을 열었습니다.
"아바마마를 본받아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이제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미래에 대해 예상을 했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효장태후는 강희제가 아직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그를 가르켰으며, 정치적인 계산과 수완에 뛰어났고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이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짐은 어려서 걸음마를 배우고, 말문이 트일 때까지 조모로부터 먹는 것, 걸음걸이, 말하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교육 받았다. 혼자 있을 때에도 반드시 배운 그대로 행해야 했으며, 이를 어기면 엄한 벌을 받았다."
굳이 말하자면 교육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게중에서도 어린 시절의 교육은 더욱 중요한 법이고, 8살은 한참 더 배우고 배울 나이입니다. 때문에 강희가 황제가 되고 난 후에도 효장태후의 가르침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녀는 신하들에게는 선왕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한마음으로 어린 황제를 보좌할 것을 당부하고, 꼬마 강희제에게는 민심을 얻어야 나라를 얻을 수 있으니 인자하고 겸허해야 하며, 신중해야 한다는 군주로서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한번은 효장태후가 강희제에게 대신들 앞에서 자신이 바라는것을 이야기 하도록 했습니다. 강희제는 매우 공손한 태도로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사는 것뿐입니다."
대신들은 황제의 영민함과 고상한 기풍을 칭찬했습니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조아심 부베(Joachim Bouvet, 1656.7.18 ~ 1730.6.28)는 황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이 엿보였다. 그래서 나이는 어렸지만, 그의 부친은 많은 황자들 중에서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머지않아 이 나이 어린 황태자는 단정한 품행으로 부왕의 선택이 정확했음을 증명해 보였다.
여기서 궁금한것은, 그렇다면 완연히 황제의 스승 노릇을 하고 있는 효장태후가 섭정으로 권력을 농단하여, 정사를 어지럽히고 제 욕심을 채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그녀는 상당한 입김을 여러 일에 불어넣고 있었으나, 어찌되었건 수렴청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손자의 힘을 약화시킬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조모에 대해 극진한 존경심을 보이던 강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꼬마 황제는 역사책을 보면서 공부를 하다가, 한안제(漢安帝)가 집권했을 때 태후가 수렴청정을 한것을 사관(史官)이 높이 평가한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수렴청정이 나라의 복이 아닐진대, 이를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한 황실의 쇠락함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것이 분명 하겠구나."
그러나 '한 황실의 쇠락을 시작시켰던' 수렴청정은 없더라도 만만찮은 난관이 자신을 향하여 있다는것은, 강희 역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네 명의 보정대신(補政大臣) 이야기입니다.
사망 직전, 순치제는 네 명의 유력한 만주 대신을 불러 후사를 부탁했는데, 선대가 말한 의무, 곧 "함께 충성하고, 생사를 같이하며, 황제를 보위하고, 붕당을 만들지 않으며, 뇌물을 받지 않는" 임무를 부여받은 색니(索尼), 소극살합(蘇克薩哈), 알필륭(遏必隆), 오배(鼇拜)가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세는 깨지는 법이며, 좋은 뜻은 종종 물거품이 되어 다가오는 법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오배
게중 오배는 '만주 제일의 용사' 라고 일컫어질 만큼 기골이 장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본래 그는 네명의 보정대신 중에 가장 서열이 낮은 인물이었으나, 특유의 오만함과 야심만만함을 앞세워 색니가 사망한 틈을 타 곧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여 심복을 요직에 배치했습니다. 다른 보정대신인 소극살합은 이에 대항했지만, 오히려 누명을 뒤집어 쓰고 처형 당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형을 결정한 강희는 이것이 억울한 누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희는 이를 억지에 불과하다 여기며 어떻게든 버티며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배가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 소년 황제를 압박하자 결국 버티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한 오배는, 그리고 눈에 거슬리는 "서양 오랑캐" 도 손을 봐줄 요량이었습니다. 아담 샬 역시 오배에게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1664년 7월, 강희제가 아직 11살 밖에 되지 않았던 시기에 과거 아담샬을 비난했던 양광선은 다시 한번 서양의 과학을 부정하며, 신역법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오배는 한술 더 떠 신역법에 10가지 착오가 있다며 선교사 아담 샬을 비롯한 흠천감 관리들을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강희는 이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아담 샬은 곧 고발되었는데, 그릇된 종교 이념을 설파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과학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점성술을 파괴하고,만주족 황실을 저주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비밀스런 가톨릭의 요술을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이 중 '비밀스런 가톨릭의 요술' 이라는것은 대략 이런 식입니다. 순치제의 갓난 아들이 죽었을 당시 아담 샬이 그 묏자리와 장례 일자를 정하는 일의 최종 책임을 지면서 의도적으로 제 목적을 위해 풍수를 악용했고, 그로 인해 부정이 탄 장례식이 곧바로 황태자 어머니와 사망 원인이 되었으며, 이후에 황태자의 아버지인 순치제의 죽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남회인(南懷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벨기에의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59년에 중국에 건너왔습니다. 오배의 공격으로 그도 옥살이를 하는등 피해를 입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비난이었지만 당시의 아담 샬은 무려 72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리고 4월 20일 무렵에 이미 한번 쓰러져서 타인의 부축 없이는 걸을 수도 없고 말하고 쓰는 것도 어려운 지경이었으니, 효과적인 반론을 기대하는건 무리였습니다. 지기 변호는 커녕 그는 중개자를 통해서 간신히 우물거리는 말이나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나온 그의 답변은 지난날 그가 보여주었던 기지와 재치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론 고통을 앓는 자의 앞뒤없는 중얼거림에 불과했습니다.
재판은 수개월에 거쳐서 진행되었고, 아담 샬과 동료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담 샬은 모든 명예와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슬에 묶여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효장태후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아담 샬과 친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건은 의정왕대신회의로 넘어갔고, 다시 지리한 몇달의 시간이 지났으며, 아담 샬은 더욱 쇠약해졌습니다. 의정왕대신회의는 최종적으로 아담 샬의 참수형을 결정했습니다.
오배의 일파는 이에 반발했는데, 물론 참수형을 당하게 된 아담 샬을 구해주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들은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혜성 하나가 북경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대지진이 벌어져 아담 샬이 갇혀 있던 감옥의 담벼락까지 무너지는 이변이 나타났고, 미신을 신봉하던 신료들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 효장태후가 거듭된 항의를 하자, 결국 아담 샬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늙고 병든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이듬 해 잠을 자던 도중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기리고 있던 하나님의 곁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이렇듯 오배의 일파가 벌이는 만행이 극에 달했기에, 강희는 매우 분하게 여기며 그를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황실 조정의 대부분이 오배의 세력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쉬운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오배는 황제와 가까운 요직에 치밀한 술수를 부려 놓았는데, 자신의 조카와 심복들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목리마(穆理瑪)를 양황기 만주도통에 임명해 군권을 장악하게 했고, 대학사인 반포이선(班布爾善), 이부상서 아사합(阿思哈), 공부상서 마이새(馬邇賽), 일등시위 아남달(阿南達) 등이 모두 오배와 결탁한 세력들이었습니다.
즉 사방에 오배의 사람이 가득차 있으니, 함부로 경거망동 한다면 저 역전의 무장에게 소년 황제 따위는 한 주먹으로 날라가버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강희는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면서, 한편으로는 오배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강희 5년인 1666년. 이부의 관리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오배의 패거리인 이부상서 아사합, 시랑 태필도 등은 오배가 미리 시킨 말대로 하나의 의견을 제안했습니다.
"각 성의 총독과 순무가 관리하는 관아에, 중앙 관리를 파견해 감시하도록 합시다."
그 중앙 관리가 어느 편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 입니다. 이때 강직한 성격의 이부시랑 풍부(馮簿)는 떨치고 일어나서 반론 했습니다.
"총독과 순무, 이들은 모두 나라의 중신인데 중신을 믿지 못하고 관리를 보내 감시한다면, 감시하도록 파견된 관리들이 너무 강한 권세를 가지게 되는것을 모르시오?"
그러나 오배의 위세를 등에 엎은 태필도 등은 오히려 의기양양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며 풍부를 몰아부쳤고, 심지어 소매를 걷어올리고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풍부는 놀라지 않고 오히려 태필도와 아사합등의 태도를 지적했습니다.
"대신들끼리 논의하는 자리, 반대 의견이 있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옳고 그름은 황상꼐서 가리실 일, 어찌 혼자서만 옳다고 하시오?"
바로 그 '황상' 은 이 이야기를 듣자 풍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 행동으로 인해 무소불위한 것처럼 보인 오배의 권세도 흠집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인 1667년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때 풍부는 좌도어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날 오배는 상소문을 작성해서 황제에게 보냈고, 내각에서는 이를 접수하여 적합한 절차를 행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켕기는 점이라도 있었던지 오배는 갑자기 나타나 상소문을 고치겠다고 뻗댔습니다. 하지만 이는 절차상 불가능한 이야기라 풍부는 원칙론을 앞세워 오배의 제안을 거절했고, 이에 격분한 오배는 풍부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이간질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강희제는 풍부의 행동이 옳았다며 두둔했고, 오히려 오배에게 상소문을 쓸 때는 신중을 기하라고 따끔하게 타일렀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 내굉문원시독(內宏文院侍讀) 웅사이(熊賜履)는 소위 대청회전(大淸會典)의 편찬을 주장하면서,조정에서 행정무원칙, 직무방기, 학교해이 등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고 특히 "행정이 자주 바뀌고 법제가 정해지지 않은" 행정무원칙을 첫 번째 문제로 지적했습니다. 그는 행정에 원칙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옛 제도를 참조하고, 현실을 고려하여, 회전을 완성케 하고 천하에 반포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웅사이는 회전을 편찬함으로서 행정을 법규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건의는 사실 오배 세력에 대한 비판의 의미입니다.
웅사이가 말한 행정의 난맥상, 관리의 나태, 교육의 태만은 나라가 잘못되고 있다는 비판이고, 그 비판의 화살을 맞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최고 권력자인 오배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오배는 매우 화가 나서 웅사이를 처벌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망령된 말을 한 죄입니다!"
하지만 강희는 오히려 의아하다는듯이 물었습니다.
"국가의 일을 진술한 것인데, 어찌 그대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이 일로 웅사이가 처벌을 받지 않은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강희제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것이 소년 황제의 개인적인 힘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머뭇거려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볼것은 조정에도 반 오배 세력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배가 너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마구잡이로 날뛰기에, 조정 내부에서도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어느정도 만만찮게 형성 되어 있었다는 이이야기입니다. 강희제가 이들을 모두 조직하지는 않았겠지만 은연 중에 편을 들어주며 점점 조정의 세력비를 바꿔놓는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음모를 꾸미면서도 겉으로 보여지는 강희의 태도는 오배에게 대단히 정중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배가 소극살합을 제거했을때 강희는 오배와 알필륭을 일등공신으로 봉했고, 얼마 후 다시 태사(太師)로 봉했으며, 반포이선과 마이색의 관직을 승격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소년 황제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오배도 딱히 트집을 잡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오배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이나 조정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만주 제일의 용사'라고 불릴 만큼 강건한 사람이니, 이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강희제에게 귓뜸을 해주었는데, 실로 놀랄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배가 집안에서 묘한 음모를 꾸미는듯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강희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호위대를 이끌어 오배의 집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황제의 어가가 오배의 집 앞에 다다를 무렵, 호위병 중 한명이 미리 알려 황제를 맞이하게 하려고 했지만, 강희제는 이를 저지했습니다. 대신 그는 호위병들을 데리고 직접 오배의 침소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오배는 깜짝 놀랐습니다. 황제가 이렇게 대놓고 찾아올지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는데, 주위에 호위병들이 칼까지 들이밀고 있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강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우리 만주인들의 풍습이거늘 무얼 그리 놀라시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안부를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슬슬 결판을 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강희는 알고 있었습니다.
황궁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강희가 찾은 인물은 색니의 아들, 색액도(索額圖) 였습니다. 일단 만나는 이유는 "바둑이나 한번 두자" 는 명분이었는데, 실제로 둘은 오배를 제거할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희는 계획대로 우선 자신과 나이가 비스한 청년들을 은밀히 선발해, 동작이 재빠르고 무예가 뛰어난 호위병 배당아(拜唐阿)와 함께 무예를 수련하도록 했습니다. 조정에 오배가 풀어놓은 사람들은 이들의 대련을 지켜보았지만 단지 어린 황제가 무술을 좋아해 함께 어울려 놀고 있다고 여겨 별다른 주의는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대의 비밀스런 이름은 바로 '선복영' 이었고, 그 실체는 황제의 특별군이었습니다. 1669년 5월 16일. 이 날은 오배가 황제를 알현하기로 되어있던 날입니다. 강희는 때가 왔다고 여기며 선복영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의 신하이자 친구다. 나에게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오배에게 복종할 것인가?"
선복영들은 "폐하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이 말을 들은 강희는 오배의 악행을 일일히 열거한 후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알리고 호위병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습니다. 잠시 후 오배가 입궁하자 강희제가 비밀리에 신호를 보냈고, 호위병들은 삽시간에 달려가 오배를 두들겨 패고 그를 포박해 옥에 가두고, 지체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오배와 결탁한 관리들을 모조리 잡아다 처단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숙청이 이루어지는 동안 강희는 곧바로 20여개에 이르는 오배의 죄상을 공개하면서 오배로 인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을 풀어주고 모두 복직시켰습니다. 그토록 강력해보이던 오배의 세력이 너무나 순식간에 제압된 것입니다. 당시 강희제의 나이는 17세 였습니다.
선교사 부베는, 어린 시절의 강희제에 대해서 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를 통치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보여 준 모든 것들이, 마치 수십 년간의 통치 경험을 가진 노련한 황제와도 같았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17 15:33)
* 관리사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