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북미대륙에 있던 영국 식민지 13주가 독립합니다. USA, 아메리카합중국이라는 유럽과는 달리 공화국이 됐죠. 시대를 거쳐 근대로 나아갔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국민들이 근대적인 국가를 만든 거였습니다. 이 때문에 독립 혁명이라고 칭합니다만... 뭐 혁명인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기로 하죠.
이 나라가 후에 세계최강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남미에서 비슷한 업적을 이룬 시몬 볼리바르는 실패했죠. 그가 독립시킨 6개 주는 서로 싸우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됐습니다. 반면 미국은 연방을 유지하며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죠. 뭐 위기야 한 번 있었습니다만.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해 미개척지 서부로 가는 길이 열렸고 서부개척시대가 계속되죠. 골드 러시가 한몫했죠. 미국인들부터가 많은 아이를 낳았고 유럽에서 희망을 품고 계속 이민해 왔습니다.
아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어떻게 됐냐구요? 다들 아시잖습니까.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재임 1817~1825)는 먼로 독트린을 발표,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간섭을 거부합니다. 이를 어길시 미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선언했죠. 그 범위는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는 하와이였죠. 반대로 미국 역시 유럽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 때 이미 아메리카는 다 자기 거라 생각했고, 불간섭 역시 유럽에서만이라는 얘기였죠.
이후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또 많은 영토를 뜯어내죠. 흰색입니다.
이렇게 영토를 넓히면서 해외에도 눈을 돌립니다. 일단 고립주의를 선언한데다 유럽 열강들의 눈치도 있으니 무역과 상선을 보호하는 함대 수준으로 시작했죠. 1822년 아메리카 태평양 함대가 창설됐고, 35년에는 동인도-중국 함대로 개편합니다. 아편전쟁으로 청이 문을 열자 미국도 44년에 왕샤조약을 체결합니다.
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석탄을 보급할만한 기지가 필요했고 적당한 곳에 일본이 있었습니다. 46년부터 일본 개항을 시도했고 (쇄국정책으로 실패) 48년에는 표류된 미국인 선원 문제를 두고 개항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합니다. 말로 안 되니 겁을 주자 해서 53년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이 시작됐고, 이듬해에 다시 와서 일본의 문을 엽니다.
56년 애로호 사건 당시 (청과 영불연합군과의 교전) 광저우에 있는 미국인들을 소개시키는 과정에서 청군과 교전이 일어났고, 이를 기회로 양쯔강을 미국 군함이 초계할 수 있는 권리까지 얻게 됩니다.
19세기 초만 해도 고립주의에 아시아 문제는 다른 열강에 묻어가는 식이었다면,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 확장은 이만하면 됐다고 보고 고립주의를 포기,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죠.
파란색이 북부, 붉은 색이 남부, 연보라색은 연방에 남은 노예제 허용주(경계주)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다 내부 문제가 터지니 남북전쟁이었습니다. 애초에 19세기 초부터 계속되던 불씨가 터진 것이죠. 연방을 탈퇴하려는 남부와 하나의 미국을 유지하려는 북부와의 대결이었습니다. 61년부터 65년간의 전쟁으로 북부가 승리했죠.
이 기간동안 미국은 아시아에 신경쓰지 못 합니다. 일본에게는 꽤나 유리하게 작용했죠. 뭐 그래도 이 때 일본과 이후 조선의 차이는 꽤나 큽니다. 일본은 너무 가까이 있었고, 시작부터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시도한 거였으니까요. 미국은 그 정도까지 볼 수 없는 상황이었구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동인도-중국 함대를 아시아 함대로 개편합니다. 당시 국무장관 슈어드는 강경 외교정책을 추진했고, 62년에 일본에서 미국인 통역관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슈어드는 열강들의 일본 공동 출병을 제의했고, 그게 안 될 경우 미국 단독으로라도 무력을 행사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67년 대만에서 표류한 상선의 선원들이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자 군함 2척으로 보복하기도 했죠. 알래크사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것도 이 때였습니다.
69년, 남북전쟁의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가 대통령이 됩니다. "무조건 항복
Unconditional
Surrender"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죠. 그와 피시 국무장관은 슈어드의 외교노선을 계승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건이 있었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조선, 그 나라에서 미국 상선이 격침된 사건이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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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된 제너럴 셔먼호, 프랑스의 1차 침입 때 그 배로 추정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말해준 거였죠. 리델 신부는 이를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통보했고, 샌포드는 미국 공사 벌링게임에게 보고합니다. 당시 벌링게임은 휴가 중이었고 대리 윌리엄즈가 청의 총이아문에 이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죠. 벌링게임은 급히 청을 가야 했구요. 청에 오자마자 조사 및 생존자가 있을 경우 귀환을 강력히 요구합니다만...
청은 이번에도 비슷한 태도를 취합니다. 명목상 조선이 속국이긴 하지만 법과 내정을 독립적으로 하고 있으며, 청이 간섭할 수 없다는 거였죠.
벌링게임은 병인양요의 결과를 듣고 유사시 프랑스와 영국에 공동출병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그 두 나라도 소극적이었죠. 이에 미국 단독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판단, 우선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벨 제독에게 진상 조사를 명령합니다. 벨은 와츄세트(Wachusett)호를 파견합니다. 그 자신도 제너럴 셔먼호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며 2천명의 증원군을 요청하죠.
와츄세트호는 제너럴 셔먼호를 안내했던 청 상인 우문태를 데리고 황해도 장연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주민 김대청에게 조정에 보내는 서신을 전달했고, 우문태는 별도로 조선 상인 김자평에게 경위를 묻죠. 여기서 화공으로 침몰했다는 것과 서양인 2, 청인 2명이 구금돼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며칠 후에 장연 현감 한치용이 찾아왔고, 회답은 보내겠지만 조선측은 제너럴 셔먼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서 즉각 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슈펠트 함장은 제너럴 셔먼호가 침몰했다 확신하고 생존자에 대한 희망을 가진 채 귀항하죠. 그 후 청에 생존자의 송환을 요구하지만 이번에도 청의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어 일본에도 요청합니다만 일본 외무성에서도 소극적으로 나왔죠.
"제너럴 셔먼호가 입은 피해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받고, 미국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는 그에 적절한 조치와 대응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 일본 주재 미국 공사 발켄버그
"조선 조정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해명이나 사과가 없을 경우 우리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 슈어드
미국은 단독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결론을 내렸고, 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 68년 4월 셰넌도어호를 파견합니다. 여기서 조선측의 답신과 생존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협상을 위해 고위관리를 파견하라고 요구했죠. 한편 조선은 청을 통해 답장을 보냈고 페비거 함장에게도 그 사본을 전달하려 합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선원들의 난폭한 행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생존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배가 미국 거였다는 걸 안 것도 슈펠트의 서신을 받은 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죠. 그 전에 셰넌도어호가 떠나서 전달하진 못 했지만요.
셰넌도어호는 장연을 떠나 삼화로 형했고, 박규수는 방어준비를 하면서 선공을 하지 말라고 엄명합니다. 미군은 답신을 받으러 온 것이고 그들의 태도도 그리 적대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죠.
4월 15일, 삼화부 해역에 셰넌도어호가 정박하자 삼화부사 이기조는 통역관 홍면조와 대솔군관 박형초를 보냅니다. 여기서 필담을 나누죠. 해변에 막대기를 꽂아 한 쪽이 쪽지를 꽂으면 가져가는 식이라서 오래 걸렸을 겁니다.
조 : 어디서 왔고 목적은 무엇인가
미 : 평양을 찾고 있다. 모든 것은 평양에서 얘기하겠다.
조 : 여기 삼화도 평양 땅이다. 평양에 가서 물을 거라면 여기서도 가능하다. 궁금한 게 무엇인가.
미 : 우리는 미국인으로 광둥, 상하이, 치푸를 거쳐 여기로 왔다. 목적은 통상이 아니다. 2년전 우리 상선이 대동강 하구에서 격침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 또한 우리의 서신을 국왕에게 전해 상호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게 해 달라.
조 : 우리에게 서신을 주면 전달하겠다. 우리는 청국 예부에 들어서 그대들의 방문을 알고 있었으나, 그대들이 우리의 접근을 거부하고 북상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의 서신을 보고 무슨 일인지 알게 됐지만, 지금 해안 일대에 경비가 삼엄해 귀선과 무력 충돌이 일어날까 우려된다.
미 : 귀국 국왕에게 전달하고자 한 서신은 이미 장연에서 전달했다. 귀국의 답신이 조속히 도착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그 때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조 : 이곳에 정박한 채 기다리기 바란다. 만약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민심을 자극하면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페비거는 일단 납득하고 수일동안 기다리다가 24일 용강으로 북상합니다. 도중에 남포에서 식료품을 지원받고 답례를 하기도 했구요. 5월 2일에 답신이 도착합니다.
- 귀하의 서신은 국서가 아니라서 국왕에게 올릴 수 없었다.
- 선원 4명 생존설은 김자평을 심문한 결과 거짓임이 드러났다. 직접 조사하기를 원한다면 김자평의 신병을 인도할 수 있다.
페비거는 김자평의 신병을 인도받았고, 우문태와의 대질을 통해 거짓임을 알게 됩니다. 이후 탐색을 계속하다 가도 근처에서 다시 문정을 받았고, 중군 이현익이 납치되고 민간인 2명이 피살된 것이 원인임도 알게 되죠. 명분을 잃은 페비거는 16일 자진해서 조선을 떠납니다.
평화롭게 진행됐습니다만 이 무렵 좀 큰 일이 벌어지니 바로 오페르트 도굴사건입니다. 조선 내에서 척사 의지가 커질대로 커져버렸죠.
귀환한 페비거는 슈어드(국무장관 슈어드의 조카) 영사에게 결과를 보고합니다. 슈어드는 이 사실을 슈어드에게 (...) 보고했고, 4개월 후에는 조선 개항 문제를 다시 보고했죠.
-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대한 견해와 입장을 재확인시킨다.
-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어 조선을 개국시킨다.
- 차후로 미국인이 조선에 표류할 경우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한다.
- 위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조선과의 담판을 진행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전권을 달라고 간청했죠. 슈어드 국무장관 역시 이를 받아들여 그를 조선 파견 특사로 임명하고 아시아 함대를 출동시켜 줄 것을 제의했죠. 하지만 해군 장관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합니다. 이건 해군을 파견해야 될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고, 서양에 대한 조선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조약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죠. 이렇게 계획은 불발됩니다.
69년, 그랜트 대통령과 피시 국무장관은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합니다. 상하이 주재 총영사로 간 슈어드(삼촌)를 소환해 회의를 거듭했죠. 여기서 청의 주재하에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그걸 위해 청국 주재 프레드릭 로 공사에게 전권을 위임하기로 했죠.
존 로저스 제독
1870년 11월, 로는 로저스 제독과 슈어드 총영사를 초청, 계획을 짜고 본국에 보고합니다. 이어 청국의 총리아문에 이 사실을 알리죠. 공친왕은 그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합니다. 대신 서신 정도는 전달해주죠. 71년 4월 10일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바로 답합니다. 미국과는 외교관계가 없으니 청에 입장을 밝히는 형태였습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그들의 도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 표류한 이들의 구제는 조선의 관례이므로 그를 위한 별도의 조약은 필요없다.
- 조선은 생산이 풍부하지 않아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
안 하겠다는데 미국의 방침이 바뀔 리가 있나요. 로저스 제독은 5월 초까지 나가사키에 함대 집결을 명령합니다. 군함 5척, 대포 85문, 해군 및 해병 1230명이었습니다. 5척은 기함 콜로라도호, 순양함 알래스카, 베니시아호, 포함 모노카시, 팔로스호로 이루어져 있었죠.
콜로라도 호에서의 기념사진
모노카시(1370톤급)
5월 15일, 원정함대는 출항준비를 완료했고 16일 나가사키를 떠나 조선으로 향합니다. 21일에는 풍도에 도착했고 23일에는 입파도에 도착했으며, 24일부터 강화도로 탐측을 시작합니다. 29일에는 작약도에 정박했죠. 이 과정에서 26일 조선측과 접촉했지만 필담이 통하지 않아 실패, 27일에 다시 필담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알립니다. 30일에는 인천부의 관원 김진성이 통역관 3명을 대동하고 콜로라도호를 방문하죠. 공식적인 첫 접촉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히 목적만 묻고 조정에서 보낸 문정관들이 인천에 있다는 것만 말해주고 갔죠. 다음날에 3명의 문정관이 옵니다. 하지만 로는 이들을 만나지 않았죠. 대신 이들의 요구를 다시 전하는데, 이 서신은 음력 4월 10일 실록에 나옵니다.
- 인천 수령에게 답합니다. 우리 목적은 우리 군주가 흠차(황제가 직접 보냄)한 대인을 태우고 귀 조정과 중요한 문제를 협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주가 흠차한 우리 관리(로죠 -_-a)는 귀 조정에서 반드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함게 토의하리라고 깊게 믿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 날 동안 머물러 귀 조정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또한 작은 배들을 위쪽으로 보내 바다의 형세를 조사해 큰 배가 올라갈 수 있는지 보려고 합니다. 바닷가의 백성들에게 알려주어 피차 예의로써 서로 대우해 사단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즉 미국 대통령에게 정권을 받은 로와 대등한 관리를 보내 협상하자는 것이고, 답이 오는 동안 해역을 탐사할테니 양해해 달라는 거였죠.
지금 보면 참 웃긴 말입니다. 전자의 경우 크게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후자죠. 남의 영해를 마음대로 탐사할테니 공격하지 말라는 건데... 조선에선 이런 개념을 아예 몰랐습니다. 안 된다면 확실히 안 된다 하고 된다 했으면 아예 공격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요.
미군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생각하고 6월 1일 보트를 보내 염하(강화해협)의 수심을 잽니다. 해안가의 요새들이 보였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했죠. 헌데 갑자기 이들에게 포격이 쏟아집니다. 미군은 함포사격으로 대응했고, 조선군은 급히 대피합니다.
통진 부사의 보고에 "좀 작은 이양선 2척이 4척의 종선을 거느리고 오늘 미시쯤에 곧바로 손돌목 쪽으로 향하였으므로 광성진에서 먼저 대포를 쏘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사가 약속대로 그에 호응하여 크고 작은 모든 대포를 일제히 쏘니, 그 배들도 이 대포소리를 듣고 대포를 마구 쏘면서 거침없이 손돌목을 지나갔습니다. 이번에 방어한 일을 돌이켜보면 매우 송구스럽고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요해지의 길목으로는 손돌목 만한 데가 없고 방어대책도 미리 세웠건만 초기에 격침시키지 못하고 결국 놓쳐버렸으니 군사 지휘체계를 놓고 볼 때 대단히 해괴한 일입니다. 해당 부사 홍재신을 우선 파출시키소서. - 경기 감사 박영보, 음력 4월 14일
박영보는 적선을 격침 못 한 게 문제라고 했는데...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몰랐죠. 이걸로 미군은 무력행사를 할 명분을 얻었습니다. 로는 "평화적으로 탐사를 하던 미군을 공격했다"고 밀어붙였고, 이에 대한 사과가 없을시 보복하겠다고 경고합니다. 조선에서는 무력충돌이 있던 건 유감이지만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죠. 양측의 입장이 좁혀질 리가 없었습니다. 로와 로저스는 강화도 상륙을 결심합니다.
이렇게 신미양요가 시작됩니다.
참고로 이 때 미군의 피해는... 경상 2명이었습니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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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얘부터 빨리 끝낼게요 (...);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19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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