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제독은 귀환 후 본국 해군성에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그러면서 수심이 얕은 곳에서 항해 가능한 포함과 상륙용 장비, 해군육전대(해병대죠) 1500명, 포병 등을 요구하죠. 바다라면 몰라도 육지에서 싸울 때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조선 해역으로 진입하는 데 나오는 문제들은 해결했지만 조선의 군사력과 전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몇 일간의 무력시위로 그걸 알기는 힘든 상태였고, 천주교도들의 정보도 여기까지 닿을 순 없었으니까요. 따라서 프랑스 정부가 직접 나서는 것보단 극동 함대 사령부가 국지적인 군사행동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했죠.
+) 전편에 얘기했던 벨로네를 보면 프랑스가 조선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양까지 가서 고종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앉혀서 박해를 막겠다고 했죠 (...) 그에 비하면 로즈는 나은 편이었습니다. 한계는 알았으니까요.
해군력으로 조선을 압박하기 좋은 곳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강화도였죠.
10월 5일, 로즈는 청과 각 나라 외교관들에게 한강 해역의 봉쇄를 통보합니다. 니들은 손 대지 말라는 거였죠. 이어 청과 일본에 주둔한 해군을 총동원해 해상기동 훈련을 했구요. 군함 7척과 1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작전을 개시하죠. 그가 요구한 증원군이 도착은커녕 받아들여지기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천주교 탄압이 더 심해지고 조선에 숨어 있는 신부 두 명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거였죠. 조선에 한 번 갔음에도 그들과 연락이 닿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요.
+) 그 중 한 명이 나중에 탈출해 오페르트와 만나게 되는 페롱 신부입니다.
10월 11일, 프랑스 함대는 군함 7척을 이끌고 치푸항을 떠나 다음날 저녁 입파도에 도착합니다. 음력으로 9월 3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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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부터 프랑스 함대는 북상해 작약도와 호도 사이에 정박지를 정한 후 4척으로 염하(강화해협)으로 이동합니다. 이들은 14일(6일) 갑곶진까지 도달했으며, 조선군 포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강화도 상륙은 이렇게 시작됐죠. 해군 대령 올리비에를 지휘관으로 해서 3개 제대로 나눈 후 갑곶진에 상륙한 것입니다. 조선군의 움직임은 없었고, 쏟아지는 폭우가 그들을 방해했죠.
강화도에는 50여개의 돈대(선박에 대한 감시 및 방어를 맡았죠)가 축조돼 있었습니다. 숙종부터 영조 때까지 이런 돈대와 성을 쌓아 방어력을 강화해 놓습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된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후 이양선이 심심하면 출몰하면서 화포를 설치해 공격력을 강화했구요.
병인양요 당시에는 진, 보 6개와 돈대 20여개에 병력을 강화해 1500명 정도가 강화도 동쪽을 맡고 있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편제상이었죠. 거기다 프랑스군의 침입을 알지도 못합니다.
프랑스군이 1차 침입 후 물러났을 때 고종은 내탕금(간단히 고종의 사비 -_-a) 3만냥을 수군에 풉니다. 특히 경기와 충청에 집중했죠. 하지만 이 정도로 힘든 건 당연한 거였고 강화도 내의 방어력을 키우는 것도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그 마을의 지방관이 나와서 애원하는 몸짓으로 우리의 상륙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작전은 조선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순조롭게 수행되었다." - 쥐베르
저녁에 초지 첨사 조기준이 이들의 상륙을 알고 문정 및 상륙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전날 영종 첨사 심영규도 염탐을 시도했지만 배에 접근할 수 없었죠.
여기서 강화도의 상황을 좀 정리하자면... 정점은 종 2품인 강화 유수가 맡습니다. 유수부는 개성, 광주, 수원, 춘천 등 한양 주변의 요지에 설치한 관청입니다. 행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갈수록 군사적인 면이 커졌죠. 강화도에 유수부가 생긴 건 인조 때구요.
강화도부터 경기도 서쪽 해안을 맡은 육군상비군은 진무영, 숙종 때 설치됐죠. 수군의 경우 통어영이 영종도 등 각 섬을 맡습니다. 이 둘은 통합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강화유수를 중심으로 운용됐죠. 진무영의 경우 강화유수가 진무사를 겸하는 식이었습니다.
한양의 문으로 나름 중요했던 상황이었지만, 병력부터 무기 등이 부족했고 수군의 경우 경기, 황해, 평안도를 다 맡아서 더 힘들었죠. 그리고 전력도 상대가 안 됐구요.
당시 강화유수는 이인기, 그는 프랑스군의 1차 침입 때 보고가 늦어서 자를까 말까 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고종이 봐줬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죠.
그는 휘하 경력 김재헌을 보내 문정을 시도합니다. 주민들은 피난가고 프랑스군이 민가를 쓰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는 민가로 끌려갔다가 겨우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누구고 왜 왔냐는 질문이 오간 후 본론이 나왔죠.
"금년 봄에 당신네 나라에서는 무엇 때문에 서양사람 9명을 죽였습니까?"
"당신네 나라 사람이 도성에 잠복해 있으면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남의 재물과 돈을 빼앗았으며 암암리에 반역 음모를 꾸몄으므로, 나라의 법에 비추어 사형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처형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이 만일 당신네 나라에 들어가서 이와 같이 불법을 자행하였다면 당신네 나라에서도 역시 사형에 처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죽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사(사신)로서 문정하러 온 사람을 살해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빨리 배를 돌려 가십시오."
호오 패기가 _-)b; 로즈는 그를 보내줬지만 (어차피 하급 관원이라고 제대로 상대도 안 해줬죠) '한 무리의 추악한 자들'이 무기를 들고 음식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김재헌이 소 3마리를 제시하지만 안 됐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 소 5마리, 돼지 5마리, 닭 10마리를 주겠다고 했죠.
로즈는 강화유수에게 전해달라며 자기들이 온 이유를 알립니다.
"본인은 프랑스 황제로부터 극동에 주재하는 프랑스인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본인은 우리 프랑스의 선교사를 학살한 조선 정부의 행위를 징벌하고, 또 앞서 9월에 한강을 탐측하던 본인의 함대가 조선군에게 피격당한 모욕을 보복하기 위해 온 것이다."
15일(7일), 프랑스군은 본격적인 기동을 시작합니다. 도즈리 해군 중령이 이끄는 1대(100명)를 강화성에 파견, 위력정찰을 시작한 것이죠. 조선군은 사오백 정도 됐던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피아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게 드러납니다. 동문에서 짧은 교전으로 군관 한 명이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합니다. 남문에서도 프랑스군 일부가 공격을 개시했고 수문장이 전사하면서 곧바로 함락됐죠. 남문과 동문이 떨어진 상황, 이인기는 유수부에 병력을 집중해 싸우려 했지만 프랑스군은 부근을 정찰한 후 돌아갑니다. 그 순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프랑스군은 다시 올 것이었죠. 그는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밖으로 옮긴 후 다시 맞설 준비를 합니다.
로즈는 다음 날 강화성 완전 점령을 결심, 전 병력을 이끌고 공격합니다. 남문에서 의외의 저항이 있었지만 집중 포격 후 돌격을 개시했고, 군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버렸죠. 이인기는 성을 버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은 수령으로 강역에서 죽는 것이 직분상 당연하나, 양성(숙영조) 어진이 이미 백련사에 권봉(權奉)되었으니 달려가서 호위하는 것 또한 분의에 맞는 도리였습니다."
어찌됐든 조선의 관문이나 다름없던 강화도, 그 강화도의 요충지인 강화성은 이렇게 쉽게 함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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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분을 징벌하거나 굴복시키려고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분노는 조선 조정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의 친구이므로 진심으로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조정은 가장 거룩한 인류의 법을 무시하고, 복음을 전파하려고 여러분을 찾아온 우리의 형제 동포를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우리 형제를 학살한 자들을 응징하러 온 것이다. 조선 국민들은 안심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소유지와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는 존중될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를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친구로 생각하라."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이 생길 경우에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엄혹한 처벌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로즈는 이런 내용의 포고를 했고 휘하 병사들에게도 대민피해를 내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죠. 얼마나 지켜졌을지는 의문이지만요 -_-; 그는 최대한 이 곳에 눌러앉을 생각이었습니다. 유수부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이 때 발견된 은이 당시 프랑스 가치로 20만 프랑이었다고 하네요) 강화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실히 알게 된 것이죠.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은 뱃길로 강화도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한양을 말라죽일 수 있는 것이었죠. 이제 무력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협상도 할 때였습니다.
한편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좌의정 김병학의 의견에 따라 순무영을 설치합니다. 훈련대장 이경하와 총융사 신관호가 급히 파견돼 한강 일대의 방어대책을 수립하게 했구요.
+) 당시 서울 방비는 교과서에 나오는대로 5군영 (...)a 중앙의 훈련도감, 어영청, 굼위영(합쳐서 삼군문)과 수도 외곽 방어를 맡은 총융청과 수어청이죠. 순무영은 나라에 일이 있을때마다 임시로 생겼습니다.
기보연해(畿輔沿海 경기 연해) 도순무사 이경하, 중군 이용희, 천총 양헌수 등을 지휘관으로, 훈련도감의 마군 1초(125명 정도)와 보군 5초를 중심으로 다른 군영의 병력들을 받아 순무영이 편성되니 병력은 약 2천 가량이었죠. 이들이 한양을 떠난 것은 16일로 다음 날 아침에 한강의 양화진에 도착했죠.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사기가 높을 리가 없었습니다. 조정은 이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애썼고, 대원군은 양화진까지 직접 와서 이들을 환송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강화도로 건너갈 통진부로 가기도 전에 급보가 들려오니... 통진부가 털린 거였습니다. -_-; 프랑스군 정찰병이 상륙했고 부사 이공렴을 비롯한 소규모 병력이 맞서다가 순식간에 와해된 거였습니다. 그들이 더 깊숙히 들어오진 않았지만 강력한 적이 언제든 상륙할 수 있다는 걸 뜻했습니다.
조정은 수원과 광주, 양주에서 병력을 뽑아 금위영에 배속시켜 도성 방비를 강화했고 행주항에 병력을 집중시켜 한강으로의 진입을 막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는 전국에 초모사를 보내 의병도 모으려고 했죠. 전쟁은 그 전에 끝났습니다만.
프랑스군은 본토에는 그저 무력시위 정도의 작전을 벌이려 했고 조선군은 강화도로 넘어갈 배도 찾지 못 한 상황이었습니다. 짧은 소강상태가 시작되죠. 양헌수는 "전격 양박도주"라는 제목의 격문을 보냈고, 로즈는 그에 대응해 신부들을 죽인 책임자(로 삼정승을 거론합니다)를 끌고 올 것과 수호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죠.
강화성은 함락됐습니다. 하지만 아직 강화도 전체가 함락된 건 아니었죠. 영향력을 넓히려는 프랑스군과 강화도를 되찾으려는 조선군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1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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