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생활과 합체하고, 스포츠, 연예 스타들에 대한 대중의 접근과 의견 표출이 활발해지면서 우리는 소위 빠와 까가 격돌하는 걸
정말 자주 보게 됩니다. 최근 이 곳에서도 프로게이머나 스포츠 선수, 팀에 대한 의견이 많이 오가고 있습니다. 보다 넓게 보자면
종교나 정치에 대해서도 빠-까의 충돌은 빈번하지요.
저도 팬심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잔뜩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 우연찮은 계기와 인연으로 뉴욕 양키스의 팬이 되었고, 야구를
사랑하게 되면서 고향팀 엘지 트윈스도 엄청나게 응원하게 되었지요. 스포츠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종목 안가리고 이거저거 챙겨보며
응원하는 팀, 좋아하는 선수 하나 이상은 어느 종목에나 꼭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팀과 선수가
생기다보면,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다툼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고교시절 피끓는 남고생들이 불꽃을 튀기고 주먹을 부르쥐고
액션을 벌이는 이유의 1순위는 -여느 학원폭력물과는 사뭇 다르게- 프로야구였습니다. 엘지-삼성-해태-롯데의 4파전이 치열하게 벌어져
학생부 공권력의 개입이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었죠. 이런 다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종범에 대면 유지현은 쓰레기지."
앞뒤를 재지 않습니다. 말보다 좋고 빠른 주먹이 있으니까요. 저도 그랬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점잖게
"이종범이 훌륭한 선수지만, 유지현도 정말 좋은 선수야."
라고 말하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저도 못그랬습니다. 나중에 머리가 영글고 어떤 선수 한두명, 한둘의 팀보다 야구라는 스포츠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가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따위 대사와 어설픈 싸움질을 우리는 대체 왜 주고 받았을까. 팬이란 게 원래
이런건가하는 아주아주 기본적인 반성이었지요. 아, 반성.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성'이라는 것을 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기애에서 나아간 이기심, 자기애에 물든 팬심은 우리의 반성신경을 잠시 혹은 길게 마취시키는 작용을 하곤 합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을 판단할 줄 알면서도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도 결국 자신을 방어하고 아끼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자신이 아끼고 동경하는 대상을 넘어서서 자신을 투사하는 대상이 된 스타나 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잠시 반성을 멈추었을 때, 혹은 누군가가 그 반성을 멈추게 만들었을 때 우리는 팬을 벗어나서 빠가 됩니다.
데릭 지터(뉴욕 양키스 유격수)는 거품이다. 그만한 연봉을 받을 선수가 아니다.
양키 팬들에게 자주 투척되는 떡밥입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비부문에서의 기여도는 눈에 띄게 하락했고,
장타력은 워낙에 그리 훌륭하다고는 볼 수 없는 선수였지요. 그런데 받는 연봉은 리그 최상위권이니 그의 연봉이 거품인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터의 2012년 연봉은 16밀. 올해는 17밀입니다.) 하지만 팬들은 그 연봉을 아깝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니까요. 문제는 저런 평가가 단순히 저런 평가에 그치기만해도 그닥 반갑지는 않고 100% 공감되는 이야기가
아닐 진데, 단순히 저런 평가에 그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겁니다. 저기엔 몇 마디 비난이 붙거나, 다른 이와의 비교가 얹혀있기가
쉽지요. 그럼 저와 같은 팬들의 마음 속에선 '그래, 수비도 장타도 훌륭하진 않아...'하는 생각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대신 다른
생각이 떡하니 자리를 잡죠. '무어라? 이게 어디서 감히...' 그리고 소매를 걷어붙이곤 키배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외부에서의
공격이 우리의 반성신경을 마취하는 예입니다. 워낙에 인정하고 있던 우리 팀, 우리 선수의 단점도 누가 지적하고 비난하고
나아가 쌍욕까지 퍼부으면 그 반대급부로 어디서 개소리야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가만히 서있던 스프링을 누가 팍
내리치면 푱 하고 튀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스스로의 팬심에 빠져 허우적대다 악질 빠가 되어 성격파탄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반성신경을
마취하고, 나아가 적출해버리는 경우죠. 언뜻 기억나기로는 유명한 우지원 빠순이 한 명과 한때 네이버 해외야구란을 헤집었던
이치로 빠돌이, 레드삭스 빠돌이들이 생각나네요. 아 좋아 너무 좋아 좋아 미치겠어... 이 팀만 좋아 이 팀이 최고야 이 선수가
진리야... 다른 선수 싫어 다른 팀 싫어 다른 팀 쓰레기 다른 선수 쓰레기... 이런 과정이 정말 뻔하게 눈에 보이는 이들... 확실히
미쳤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이들이 분명 있습니다. 정도가 이들만큼 심하지 않아도, 한 팀이나 선수를 너무너무
아끼다보니 그 라이벌, 경쟁자, 혹은 그냥 동종목 팀과 선수 모두를 싫어하고 까게 되는 이들은 여기저기서 자주 나타납니다.
자, 팬이 빠가 되어 그로 인해 다시 까가 되었습니다.
팬-빠-까의 테크트리를 착실하게 밟아서 응원플과 악플을 적금 붓듯이 적립하는 이들은 우리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쪽에도 분명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시대가 좋아져서 이들에게는 인터넷이라는 전장이 눈 앞에 주어졌지요.
엉망진창이 전자레인지에 넣은 인스턴트 식품처럼 바로바로 튀어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 고교때는 쥐어박아주려면
나도 몇대 얻어터질 각오를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냥 키보드로 맘껏 배설하면 됩니다. 어디 다칠 일도 없지요. 내일이면
다시 같은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되고, 고딩 동창이랍시고 쉽게 끊을 인연도 못되어서 신나게 주먹질하다가도 매점 라면 앞에
놓고 어색하게 화해해야 하는 그런 상대도 아닙니다. 어디서 뭐 먹고 사는 지 알지도 못하고 그닥 알고 싶지도 않은 생판
남들에게 우리는 마음껏 화력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겪은 많은 커뮤니티중에 피지알만큼 정돈이 잘 되어있는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팬심을 걸고 벌어지는 격돌은
아수라장이 되기가 퍽 쉽습니다. 이 곳과는 사뭇 다르게 평소에도 퍽이나 자유분방한 커뮤니티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실로 유유히 흐르는 저 시궁창의 구정물이 더럽다 고개를 돌릴 만한 개차반 쌈박질이 자주 벌어집니다.
이 꼴 안보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런 키배, 다툼, 혹은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는 싸움이 무료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신선한 나의 비타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언뜻 보기에 이런 일에 휘말려 있는 사람 모두는 그저
불쾌해보일 뿐입니다. 시비를 거는 이도 불쾌해지고 당하는 이들은 더하고...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 걸까요.
스포츠 팀이든, 선수든, 연예인이든 뭐든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 이외의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되지 않을 겁니다. 라이벌은
이기고 싶은 대상이지 쳐죽일 대상이 아니지요. 넘어야 할 산은 마땅히 넘어야 하는 대상이지 폭탄 터뜨려 평지로 뭉개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제 혼자의 생각이지만, 우리가 팬으로서 명심해야 할 것은 이들이지 싶습니다.
장점은 사랑하고, 단점은 포용하자. 칭찬은 자랑하고 비판은 수용하자.
...욕질은 벽이랑 하고, 남의 집에선 조용하자.
우리 팀의 좋은 면이야 누가 우리만큼 잘 알까요? 우리 주장님의 영광의 스탯들을 누가 더 잘 알까요? 알기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쉽고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연봉을 그렇게 펑펑 쓰면서 최근에는 샌프보다 우승 못하고
있는 것. 부상자명단으로 한 팀 로스터를 꾸려낼 수 있는 능력. 양로원이 부럽지 않은 평균연령. 양키스는 뭐 대강 이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입으론 욕을 해도 손으론 박수를 치기에 팬인 겁니다. 아~ A로드가 약을
빨았습니다. 약쟁이랍니다. 지금 제일 속쓰린게 누굴까요? A로드 팬입니다. 그 다음으로 양키팬, 나아가 므르브 팬, 야구팬...
안그래도 환장할 노릇인데, 거기다가 욕질하는거 참 못할 짓입니다. 불난집에 기름붓는 격이라고 옛 성현들도 잘 묘사해 주신
바로 그 짓이죠. 우리 그거 하지 맙시다. 이승엽이 침묵해서 제일 화나는거 이승엽팬, 삼성팬입니다. 거기다 이승엽 바보똥개라고
왜왜왜 샤우팅합니까. 욕질하고 싶으면 고개를 들어 컴퓨터 모니터 뒤로 굳건히 버티고 선 저 벽에다가 해도 됩니다. 안그래도
심난한 한화팬에게 지나가던 타팀팬이 용용죽겠지 약올리면 안되는 겁니다. 따뜻한 위로를 건네진 못할 망정 말이죠... 남의
집에 가면 댁의 자제분은 참 잘생겼네요.. 댁의 강아지는 너무 똘똘하네요.. 요새 힘드시죠? 힘내세요... 야구 모르는 거잖아요..
우리 이런 훈훈한 말만 주고 받읍시다. 그게 아니면 그냥 조용히 지나치는 게 낫겠지요. 불난 집에 물을 못뿌려 줄 망정 기름을
붓는 악당은 되지 말아야 겠지요.
팬심은 좋은 겁니다. 우리를 열정적이게 하고, 무언가를 보고 배울 수 있게 해줍니다. 태어난 지 50일 된 제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인생교육을 하게 될 때가 오면, 제 과목의 교과서는 야구가 될 겁니다. 훌륭한 선수들과 감독들이,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해주고 배우게 할 겁니다. 하지만 넌 양키스 팬이니 레드삭스팬을
보거들랑 마구 돌을 던지렴이라고 가르치진 않을 겁니다. 누구라도 이런 생각은 안하겠죠.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은
일, 스스로는 마구 저지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야구선수, 야구팀, 나아가 스포츠 선수와 팀,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팬들을 다 응원합니다. 다 이기세요! (...그래도 레드삭스는 4연패 부탁합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15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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