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6/17 22:26:32
Name 신불해
Subject 강희제 이야기(5) ─ 삼번, 진동하다

오삼계 


 

경정충



상가희는 요동을 고향으로 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 상학례는 명나라의 유격이었고, 상가희 역시 명나라의 장수로 활동하던 인물이었으나 1634년 후금에 항복, 청태종으로부터 총병을 제수받고 우대되었습니다. 1636년, 그는 일찌감치 지순왕(智順王)에 봉해졌고 도르곤이 이자성 군대를 격파할 적에도 종군했습니다. 또한 이후 호남 평정에서도 활약했고, 광동과 광서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고 광동의 평남왕(平南王)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경정충은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경계무가 요동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명나라 말기에 활동했던 모문룡 부대 출신으로, 원숭환이 모문룡을 제거하자 다른 장수였던 공유덕과 함께 후금에 투항했습니다. 1636년 회순왕(懷順王)에 봉해졌고, 역시 1644년 도르곤이 이자성 부대를 격파할때 종군했습니다. 이자성이 패배한 후에는 공유덕과 함꼐 호남을 정벌하여 장사와 형주, 무강등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1649년에 정남왕(靖南王)에 임명되었는데 소속 부대가 도망간 죄인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왕작을 박탈당했고 벌금을 냈습니다. 


경중명은 죄가 두려워서 자살했으나 그의 남은 부대는 아들 경계무의 통솔하에 상가희와 협력하여 광저우를 공격했습니다. 1651년, 경중명의 아들 경계무(耿繼茂)는 정남왕의 작위를 세습했고, 이후 여러곳에서 명나라 잔존세력을 물리쳤습니다. 아들 경정충은 숙친왕 호격의 딸과 결혼하여 화석 친왕이 되었고, 이후 병이 들어 경정충이 이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삼대에 걸친 자리였습니다.



이 두명의 인물과 난세의 풍운아였던 오삼계. 이들은 삼번(三藩)이라고 일컫어지는 독특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변발을 했고 청나라에 소속된 세력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독립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청나라의 제도로 따르자면, 황족과 같은 성씨를 쓰는 동성왕이나 성씨가 다른 이성왕 모두 토지를 분봉받지 않고 정사를 관리할 권력도 없습니다. 그저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면 명을 받들어 잠정적인 군사 지휘관 자리를 주는 정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남명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이러한 한족 장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지주 계급의 세력을 빌어야 했음으로, 군사와 정치, 경제 등의 특권을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의 삼번은 군현제도가 확립된 청나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마치 춘추시대의 봉건군주를 연상시키는 세력을 손아귀에 쥔 것입니다.


이 삼대 세력의 군사 실력을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계무 ─ 15좌령
상가희 ─ 15좌령
오삼계 ─ 53좌령 


5정(丁)에서 1갑(甲)을 내고, 갑 200에 1좌령을 둡니다. 그렇다면 15좌령은 갑병 3000명 입니다. 그리고 그 번 휘하에 정구(丁口)를 각각 1만 5000구(口)를 두었습니다. 오삼계의 경우는 갑병이 1만 600명이고, 정구는 5만 3000구입니다. 물론 삼번의 군사력은 실제적으로 그보다 훨씬 강력했습니다. 삼번은 막대한 녹기병(綠旗兵)과 투항병사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력을 다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정충 ─ 6,000 ~ 7,000
상가희 ─ 6,000 ~ 7,000
오삼계 ─ 녹기 병정 수만 명


이를 살펴보면 오삼계는 상시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병력만 하더라도 벌써 수만을 훨씬 넘어가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오삼계의 군사력은 그 성질이 대단히 위험한 면이 있었습니다. 아직 명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숭정제는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에게 "오씨 부자의 군사력은 어느정도나 되는지" 를 물어 보았고, 오양은 "책에는 8만이라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3만 명"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숭정제는 "그들 중 정예병은 어느정도" 인지 되물었고, 이 질문에 오양은 3,000여명 정도만이 용맹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숭정제는 대단히 놀라워하며 어떻게 3,000여명이 수십만의 청나라 대군을 대적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오양의 설명은 이러했습니다.


"이 3000명은 병사가 아니라 신(臣) 양의 자식이고, 신 자식 삼계의 형제입니다. 신이 나라의 은혜를 입은 이래, 먹는것은 거친 음식이나 3000명에게는 모두 맛있는 술과 양고기를 주고, 신이 입는것은 거친 베옷이나 3000여명에게는 비단옷을 입힙니다. 이들 3000명은 각자 수백 무의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웁니다."


즉 이 군단은 단순한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심계의 혈족이나 다름없이 이어진 부대들이었고, 오삼계 역시 자신의 부대원들에게 확실한 경제적 대우를 제공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은혜를 내린 오삼계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걸레짝처럼 내던지고 싸웠으니, 실로 충성스러운 최강의 군단이자 충실한 사병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는 청나라 조정의 명령보다 오삼계의 명령을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청나라 말기의 군벌을 연상케 합니다. 이러한 요소는 상가희와 경씨 집안의 번에도 있었습니다. 


이들 부대의 편제, 그리고 군관의 선택과 발령은 물론 형식상으로는 청나라 조정과 병부의 비준을 받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오로지 번왕이 주관할 뿐이었고, 오삼계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습니다. 그는 운남의 소수민족들을 정벌하면서 그 후의 인사배치를 오로지 자신의 뜻대로 결정했습니다. 강희 5년인 1666년, 병부에서는 조정에 다음과 같이 건의했습니다.


 "운남과 귀주, 두 성의 무직(武職)에 결원이 생기면, (병부의 관리인)신의 부서가 (인재를)추천하여 올립니다. 그러나 관원이 아직 임지에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평서왕 오삼계가 따로 문서를 올려 사람을 선정하므로, 부서에서 천거한 관원은 중도에서 돌아와 큰 곤란을 겪습니다. 이부의 예에 따라, 이 두 성의 무직에 결원이 생기면 해당 번의 추천을 들어주고, 만일 천거할 만한 사람이 없음을 해당 번이 문서로 분명히 할 경우에만, 부서가 다시 추천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는 조정인 병부에서 내린 인사 발령보다도 오삼계의 발령이 더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오삼계가 이런 방식을 통해 임명한 장수들은 모두 그의 최측근이며, 가족들이었습니다. 이는 사실상의 지방 독립 군벌인 셈입니다. 운남과 귀주의 총독과 순무는 오삼계의 통제를 공식적으로 받았으며, 그들이 주둔하는곳 마저 오삼계가 결정하는 형국이었고 심지어 그 영향력이 운남과 귀주 밖으로까지 퍼져, 다른 성의 쓸만한 관원을 오삼계가 자신의 관할로 옮겨오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사천 도어사 양소온은 이에 항의하여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오삼계는 반박 상소를 내어 그를 공격했고, 청나라 정부는 그 압박에 양소온을 해임하고 맙니다. 해임된 양소온은 10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다가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중용되었습니다. 오삼계의 힘은 이처럼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집단의 진정한 힘은 결국 경제력에서 나오는바, 삼번의 경제력도 가공할만 했습니다. 경씨 집안은 복건을 끼고 있었는데, 복건의 생선과 소금은 가히 그 이익이 천하에서 최고이며, 백성들은 이에 의지해서 생활 하였을 정도인데 경정충은 그 이익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하고 상인을 몰래 해외로 파견하여 대단한 부를 누렸습니다. 그는 독자적으로 산을 뚫었고, 광산을 개발했으며, 바닷물을 끓이고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오삼계 역시 이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했고, 티베트와 운남 경계에서 티베트와 몽고의 차와 말을 교역하면서 재미를 보아 이를 기반으로 티베트 및 몽고의 말을 운남으로 들여온 것이 어마어마한 숫자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오삼계의 영향력은 고향인 요동에서도 막대하여, 그는 요동의 약재를 운남에 팔아 큰 이윤을 남겼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남과 귀주의 관리들은 전부 오삼계에게 매수되어 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삼번의 군대를 유지하는 군량은 오로지 청나라 정부의 부담일 뿐입니다. 오삼계의 공이 너무나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호부에서도 재물을 삼번에 퍼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660년의 경우에는, 천하의 토지세와 정은(丁銀) 등이 875만냥이었는데 운남 한 성에만 무려 900여만 냥을 퍼부어야했습니다. 


즉, 청나라 전역의 이익을 쏟아부어도 운남 한성에서 쓰는 쓰임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광동과 복건의 경우는 이를 초월했습니다. 이곳에서의 지출은 무려 2,000만냥이 이르렀고, 국가의 재정은 이미 부족한지 오래이므로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세금을 살인적으로 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나오던 판국입니다.


"천하의 재물과 부는, 삼번에서 그 절반을 소비한다."


삼번은 스스로의 번영이 대단하면서도 그 쓰임세가 독자적인 영역을 넘어섰습니다. 오히려 삼번의 지원을 받아야할 다른 성들은 역으로 말라 비틀어지면서 이 삼번에 지원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삼번이 이상할 정도로 과소비를 하여 무엇을 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삼번은 또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 지독할 정도로 세금을 뜯어내고, 소수민족들도 처참하게 수탈당했습니다. 이제 최후의 농민군 잔여 부대와 남명 정권의 세력이 모조리 사라지고 나자, 청나라 정부는 삼번을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문제는 이들이 너무나 강력해져 손조차 쓰기 힘든 지경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강희제가 이 문제에 뛰어들 당시의 모습이 이러하였습니다. 


삼번을 제압하여야 한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관리들은 이미 많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양소온도 있었고, 왕희, 부홍렬이라는 관리들도 이러한 제안은 올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삼번을 제압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삼번은 청조의 치하에서 가장 부유하였고, 수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조정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삼번 문제를 이야기한 관리들이 처벌을 받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지는 판국이었습니다. 심지어 부홍렬은 사형까지 선고받았지만 강희제가 막판에 특명으로 그를 구원해주었습니다. 삼번의 가공함은 이제 조정까지 주무르려는 판국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조정에서도 그들을 견제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부터 시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최대한 비위를 거스리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순치제와 그 사후 네명의 섭정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 조정에서는 오삼계에게 대장군의 인(印)을 수여했고 평정이 끝나면 반환하도록 했지만 오삼계는 이를 미루면서 반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9살의 강희제는 북경에 머무르고 있는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에게 대신을 보내 이러한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자네의 부친은 이미 운남으로 간 지 몇 해가 지나도록 갖가지 핑계로 아직 인장을 반납하지 않고 있다. 이제 나라가 평온해졌으니, 인장을 반납하는 것이 어떠한가?"


아들을 통해 이 뜻을 전해 들은 오삼계는, 물론 인장을 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딱히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대놓고 언질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대장군의 인장을 조정에 반납했습니다. 또한 강희 4년에 신하들이 이미 남부의 평정도 거의 끝났으니 운남의 병력을 5천명 감축하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강희 6년에 왕회가 군량미 감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자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군량미 1백 석을 감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인 강희 6년 5월, 오삼계는 조정의 반응을 정탐해볼 요량으로 안질에 걸렸다면서 스스로 운남과 귀주를 다스리는 직책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강희제는 이를 윤허했습니다. 


"오랜 세월 변방에 주둔하여, 두 성을 관리하는 공로가 대단하다. 일의 번거로움으로 말미암아 노쇠하고, 두 눈이 혼미하여 정럭이 날로 쇠하는 상황을 적극 배려하겠다."


같은 해 9월, 오삼계의 패거리인 운남 총독 변삼원, 운남 제독 장국주, 귀주 제독 이본섬 등이 운남의 상황이 급박해, 그 통치권을 다시 오삼계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17살의 강희제는 태연하게 이를 받아쳤습니다.


 "오삼계는 몸이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자신의 직무를 내놓았고, 지금 운남과 귀주는 모두 평온하다. 다시 오삼계가 과중한 업무를 맡았다가, 건강에 크게 해가 되면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닌가?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한다면, 그때 가서 짐이 다시 적절한 명령을 내릴 것이다."


물론 명목상의 지위 정도가 없더라도 운남과 귀주에서 오삼계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오삼계의 번이 해체된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후 조정은 오삼계가 계속 군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변방 지역의 난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 조치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잠시나마 견제하는 정도는 되고, 또 부분적인 행정과 군정 대권의 일부분을 중앙에 귀속시킬 수는 있었습니다.


또한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한 이후 삼번의 영역인 운남, 귀주, 광동, 광서, 복건 등의 총독과 순무 자리에 자신의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투하' 했습니다. 


이를테면 운남 및 귀주의 총독으로 임명된 감문혼은 명망이 높고 위엄이 있어, 오삼계에 매수되거나 꼭두각시가 되던 이전의 인물들과는 달리 어느정도는 대적해 볼만 했습니다. 강희제는 감문혼의 어머니가 병사하여 임지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기겁하며 그를 저지했고, 그가 계속해서 장례를 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요청하자 3번째가 되서야 내키치 않지만 상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대신, 조속히 임지로 복귀하라고 전하였습니다. 강희는 이런 인물들이 삼번을 견제 할 수 있을것이라 여겼습니다.




오삼계


물론 조정에서 강경책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강희제는 일부러 삼번에 굽실거리는듯한 모양새를 취해 그들의 경계심을 줄였습니다. 강희 11년인 1672년, 경계무의 인척 범승모가 복건 총독으로 위임되자 범승모는 완곡하게 사의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강희제는 '좋은게 좋은것' 이라는듯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 7월, 범승모는 몸이 안좋아져 건강에 이상이 생겼는데, 강희제는 즉시 어의를 파견하여 그를 진료케 하였습니다. 


또한 오삼계는 오응웅을, 상가희는 셋째 아들 상지륭(尙之隆)을, 경계무는 둘째 아들과 셋쩨 아들을 황제 곁에 두었습니다. 이는 사실상의 조정에서 삼번에게 인질을 잡은 셈입니다. 그러나 조정은 그들을 우대하여 부마로 삼고 작위를 올려주었고, 태자대부 등으로 우대하는가 하면 일부러 감시를 느슨하게 하여 아버지들을 볼 수 있게 하고 심지어 잠시 삼번으로 돌아가 군무를 맡는 일까지 어느정도 허락해주었습니다. 



또한 값비싼 옷이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물품들을 삼번의 수장들에게 선물하는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삼번은 이러한 행위들 때문에 일정 범위 내에서는 어느정도 조정에 권한을 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을 지키려는 술책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황, 서로가 가면을 쓰고 겉으로 웃으면서 보내는 시기가 길어지던 참에, 마침내 화약고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상가희가 은퇴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상가희


삼번의 수장 중 상가희는 다른 두명과는 성향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상가희의 번에서도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지만, 노년의 나이였던 그는 권세에 대한 열망이 오삼계나 경정충보단 덜했고 명예도 있고 재물도 있으니 이제 은퇴하여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순치 시절부터 자신이 피로가 누적되고, 질병이 악화되고, 또한 자녀가 많다는 등 이유로 요동 지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조정에 전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시국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으니,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일을 미루었습니다. 순치 시절에는 명나라의 잔존세력과 바다의 정성공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던 시대였으니, 삼번이 버티고 있는편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일입니다.


본인 말대로 상가희는 늙고 나서 물러나고 싶기도 했고, 또 이렇게 본인이 높은 지위에 있는데 일찍부터 권세가 대단한 개국 공신들에 대해서 탄압을 가하지 않은 왕조가 드문만큼, 청나라 조정이 의심을 품고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제거하려고 마음 먹지 않을까 두려워 했습니다. 강희제 시대에 이르자 상가희는 1673년, 다시 한번 조정에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신의 나이 일흔 살, 정력이 이미 쇠하여 요동의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이전에 내려 주신 지무(地畝), 가옥을 그대로 주신다면, 신은 2좌령 군병을 거느리고 번하의 한정(閑丁), 고과(孤寡 : 고아와 과부), 노약(老若 : 늙고 약한 사람) 약 4394가구, 남부(男婦) 2만 4375명을 데리고 가려 하오니, 돌아가는 길에 필요한 부역(夫役)과 양식을 부에서 발급해 주시길 청합니다. 아울러 장자인 상지신(尙之信)이 번왕의 지위를 세습하여, 광동에 머물러 있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후계자였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가야 하는 부분은, 상가희가 요동으로 떠나려고 한다고 해도 이것이 자신의 번을 없애려는 행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동으로 떠나는건 '상가희' 이지 상가희의 세력이 아닙니다. 상가희의 번은 후계자를 세워 계속 이어지게 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계자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상가희의 장자, 상지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지신은 천성이 무례배였고, 아버지조차 우습게 여기는 불한당이라는 큰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아버지의 아랫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해, 매질을 하거나 심지어 살해하기도 했으며, 매번 자기 아버지에게 사무를 보고하면서도 싫은 기색을 역력하게 보이는 불효자였습니다. 상가희는 아들의 이런 태도에 매우 분개했지만, 그래도 장남인데다 아들이라서 차마 벌을 주진 못했습니다.


상가희는 모사인 김광(金光)과 논의를 했습니다. 평소에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김광과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결정했는데, 본래 김광은 상당히 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은 상가희를 떠나 달아나기도 하였찌만, 상가희는 그를 잡아와서 정강이 근육을 잘라 다리를 못 쓰게 하여 도망치지 못하게 했고, 이후에 김광에 대한 대우를 이전보다 훨씬 좋게 해주었습니다. 일종의 체념인지, 김광은 이후 상가희에게 헌신적으로 충성했습니다.


김광은 상지신이 틀림없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상지신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어서 요동으로 떠나는것이 나을것이라고 충고했습니다.


"조정은 바야흐로 꼬리가 커지는것을 싫어합니다."


한편, 상가희의 상소문을 접수한 강희는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그는 상가희가 그동안 청을 위해 세운 많은 공들을 장황하게 찬양하고 정성이 갸륵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그런데 정작 물밑에서는 의정왕대신회의와 논의를 거듭, 이미 광동은 전부 평정이 된 만큼, 상지신만 따로 남겨두어 좋을것이 없으니, 번을 아예 없애고 상지신을 상가희와 같이 요동으로 보내버리자는 계획을 짜놓은 뒤였습니다. 곧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상가희는 본래 자신이 원하던 일이었기도 했지만, 강희의 손에 떠밀려 엉결에 요등으로 떠나게 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상가희 본인 계획대로라면 자신은 요동으로 가고, 대신에 은퇴의 형식을 취해 아들인 상지신에게 근거지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은 묘하게 돌아가 예정으로 행동을 취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상가희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납득했습니다. 문제는 다른 번들의 반응입니다.


오삼계나 경정충은 아직 상가희처럼 은퇴해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그만 시골의 노망한 늙은이로 나이를 먹는것에 대해선 전혀 고려조차 없었으나, 상가희가 갑자기 이러한 움직임을 보여주자 몹시 당혹스러웠습니다. 


만일 지금 상가희처럼 철번을 하지 않는다면? 
상가희의 번이 없어지는 마당에, 자신들이 철번을 하지 않는다면 해도 조정에서 자신들을 보는 시선은?


조정에서 철번 명령을 내릴 경우, 오삼계와 경정충은 수동적인 상황으로 밀립니다. 이에 응하면 세력을 잃고, 응하지 않으면 반란이 됩니다. 


오삼계와 경정충은 한동안 돌아가는 눈치를 보며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경정충이 버티지 못하고 선수를 쳤습니다. 철번을 원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신이 관작을 세습한 지 2년이 되어, 마음속으로 경사를 그리워했으나, 해안의 분위기가 불안정하여 아직 감히 병력을 해체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평남왕 상가희가 돌아기를 요청하는 주청을 하여 이미 유지를 받들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부하 관병도 남정 한지 20여년, 청컨대 철번을 원합니다." 


이렇게 되자 오삼계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경정충, 상가희가 모두 철번을 해주옵사 하고 엎드려 빌고 있는데, 오삼계만 가만히 있다면 이는 당연히 의심받을 일입니다. 북경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은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 조정에서 이미 왕(오삼계)을 의심하고 있으며 상가희와 경정충이 모두 저렇게 나오는데 오삼꼐만 혼자서 계속 가만히 있게 된다면, 더욱 안좋은 결과만 나올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오삼계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오삼계의 목표는 청 왕조의 목영(沐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명나라 초기의 뛰어난 명장 목영은 위대한 홍무제의 명령으로 운남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특별하게 신뢰를 받으며 운남과 귀주를 통치, 국세를 안정시켰습니다. 목영이 서거한 뒤에 명나라 조정은 그의 아들이 작위를 세습할 수 있게 해주었고, 검국공(黔國公) 목씨 집안은 12대 동안 이 지역을 지켜왔습니다. 오삼계가 꿈꾸고 있는 그림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오삼계가 믿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다는것. 


청나라 조정이 감히 함부로 자신을 자극하여, 최악의 결과를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철번 요청을 한다면 청 조정은 에둘러서 그를 만류할테고, 자신은 번왕의 지위를 지키면서 조정의 의심도 덜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오삼계는 우선 조정에 철번 요청을 하기에 앞서, 그는 참모 유현초(劉玄初)에게 이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유현초는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황제가 왕을 이주시키고 싶어도, 그 말을 입에서 때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왕이 황제에게 이 참에 상소하면 저녁이면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두명의 왕은 스스로 사직한 것이나, 왕은 영원히 운남에 주둔하고 싶어 하므로 경솔하게 두 왕을 따라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오삼계는 대노하여 소리쳤습니다.


 "나의 상소가 황제에게 들어간다고 하여도, 어찌 황제가 감히 나를 이주시키겠는가. 상소를 갖추는 이유, 다만 의심을 풀려고 함이다."


그리하여 7월 3일, 마침내 오삼계의 철번 상소가 강희의 앞으로 올라왔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신이 운남성을 방어한 이래, 신 소속의 관병 가구는 강희 원년부터 이주하기 시작해 강희 3년까지 이주를 완료하였습니다. 비록 가구가 운남에 온 지는 9년이 되었으나, 신이 변방의 험한 지역에 머무른 지는 16년에 이릅니다. 생각건대, 신이 대대로 황제의 은혜를 갚을 길이 어려워, 오직 변방의 울타리에서 분골쇄신하기를 원했는데, 그동안 어찌 감히 편안히 휴식을 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철번을 요청한 평남왕 상가희의 상소가 이미 황제의 은총을 입어 윤허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삼가 철번을 요청하오니, 자애로운 마음으로 널리 해하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청년 시절의 강희제



강희는 젊었고, 또한 의욕에 넘쳤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삼번의 철번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희제가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여주자, 조정 대신들은 서로 의견이 나누어져 매우 격렬하게 다투었습니다.


도해(圖海)를 대표로 하는 대다수 대신들은 운남과 귀주의 묘족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를 예상, 오삼계의 철번 요청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반대파들은 명주를 중심으로 뭉쳤는데, 묘족의 반란이 이미 평정되어 오삼계가 운남에 주둔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어서 번을 옮겨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의정왕대신회의에서도 두 가지 안건이 모두 제출되어, 관병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해당 번을 이주시키자는 쪽과 오삼계가 운남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되었습니다. 조정이나 의정왕대신회의나 명확하게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강희제는 철번 조치를 밀어부쳤습니다. 


사실 경험이 부족한 강희제는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삼계의 아들과 경정충의 동생들이 모두 북경에 머물고 있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라고 여겼고, 사태가 그리 커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났을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삼계에 동조할것이라고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는 반란이 정작 일어난 후에 이를 진압하는데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훗날 그는 이 무렵 자신이 보여준 성급함에 대해 후회했습니다.


강희는 곧바로 삼번 이주에 관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는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했으며, 삼번이 옮기는 필요한 인력과 물자와 수요를 만족시키려고 하면서 동시에 이주된 삼번을 안착시킬 지방을 실지 조사하는등 진짜로 삼번을 옮겨버리려는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강희제가 정말로 모든 손을 다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팔기의 중대단위를 180여명으로 정비하고, 방어지역과 전장에 대한 긴급대책에도 들어섰습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최소한의 가능성에 대비하자는것이었고, 결정적으로 이는 옳은 판단이 되었습니다.


설마설마했던 철번령이 진짜로 내려지자, 삼번 전체가 진동하였습니다. 오삼계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놀라워 했습니다. 그는 십대 후반부터 이자성, 원숭환, 누르하치, 홍타이지, 도르곤, 홍승주, 다이샨 등 수많은 영웅들과 함께 하거나 겨루었고, 그 세월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 피땀흘려 만든 자신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한번에 날아갈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오삼계는 하룻강아지 같은 강희가 자신을 이토록 기만할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오삼계는 대단히 분노했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습니다. 황제의 의지에 순종하여, 철번을 하고 시골에 들어가 노망난 늙은이로 여생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황제의 말을 거절하여,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볼 것인가. 


그것이 영웅의 길이든 치졸한 악당의 길이던간에, 오삼계의 인생은 그동안 항상 극적인 길이었습니다. 오삼계는 이번에도 극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한번 승부를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삼계가 보기에 섬서 제독 왕보신(王輔臣), 사천 총독 오지무 등은 오삼계의 친한 신하들로 자신이 거병하면 따라올 것이며, 강희는 젖비린내 나는 못난 애송이에 불과하고, 동시에 오응웅은 비록 북경에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지킬 만큼 성장" 하였으며, 또한 공주를 맞이했으니 조정이 이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그에게 필승의 불꽃을 가슴속에 내려다 주었습니다. 사실 철번을 원하지 않기는 오삼계보다 오삼계의 측근들이 더했습니다. 그들은 오삼계를 쫒아다니며 이권을 챙겼고, 상당한 토지와 가산, 처자와 자녀들을 거느렸습니다. 이제 근거지를 버리고 요동의 구석으로 밀려간다면, 가업을 다시 일으키는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은 오삼계를 설득했습니다.


"(철번을 하면)그날 조정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화근을 도려내고, 우리는 단지 날랜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왕의 위망(位望), 병력은 천하 제일이므로 거병하면 천지가 진동할 것입니다."


오삼계는 그러나 노회한 무장으로,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사이자 친구이며,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오며 세상사를 논의하던 방광침(方光琛)을 찾아갔습니다. 방광침은 시문을 잘 짓고 바둑을 잘 두었으며, 말솜씨와 계략이 능숙해서 스스로를 관중과 제갈량에 비유했던 인물입니다.


첫째 날, 방광침을 찾은 오삼계는 공공연히 모반의 뜻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방광침은 아무 대꾸도 없었습니다. 

둘째 날, 오삼계는 더욱 분명히 모반 의사를 드러내었지만 방광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삼계는 결국 그냥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 오삼계가 또다시 방문하자 방광침은 아예 누워서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초조해진 오삼계는 방광침의 머릿말에 앉았고, 그 상태에서 다시 한번 모반의 일을 물어보았습니다. 오삼계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방광침은 결국 몸을 일으켜 입을 열었습니다.


 "복건, 광동, 호북, 하남, 섬서, 사천으로 명령이 전해지면 형세를 안정시킬 수 있고, 나머지 전투에서 승리하면 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네."


오삼계는 이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그는 방광침을 학사 중서로 삼고 전략 부서를 운용하도록 했습니다.  누군가가 명나라 조정의 후예를 앞장 세워 명분을 삼자고 주장했으나, 방광침은 오삼계가 일전에 영력제를 살해했는데, 만약 모반의 일이 성공하면, 오히려 당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문에 오삼계는 대리자를 내세우기 보단 스스로 명분을 내세우기로 했습니다. 


또한 동시에 갖가지 핑계로 자신의 번이 이동할 날짜를 약간씩 뒤로 물렸고, 그렇게 생긴 틈을 타 부하 장수들을 모아 술자리를 벌였습니다. 세 차례 술잔이 돌아가자, 오삼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한번 돌아보고는 길게 탄식을 하며 말을 했는데 그 어조가 매우 비통했습니다.


 "나와 그대들이 일을 같이한 지 근 30여년이 되었다. 지금 천하가 평안하여, 우리는 쓸모없게 된 것이다. 현재 황제는 우리를 먼 지방으로 이주시키려고 하고 이으니, 오늘 그대들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옛 정을 나누려고 한다. 이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말이 끝나자 부하 장수들도 비감에 젖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오삼계를 따르며 그와 함께 싸우고 부귀를 누린, 그야말로 생사고락의 전우였던 것입니다. 철번령으로 불안한건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정경을 보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장수들은 모두 일제히 일어나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왕의 지시에 따라, 변란을 일어나길 모두들 기다립니다!"


이러한 반응을 보고, 오삼계는 연회에 모인 장수들에게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결전의 날이 임박했다. 조정의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근래 사신들이 여러 차례 우리를 핍박하여, 제군들을 이주시키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군들은 사신들의 모욕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자 장수들도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갑시다! 갑시다! 어찌 핍박을 당하려 하십니까!" 


"조정의 명령은 분명히 늦출 수 없다. 제군들은 운남에서 이미 가문을 세우고 부귀의 터전을 세웠다. 이 모든 것은 여기에서 나온것이 아닌가!"


"이는 모두 전하의 홍복 덕분입니다!"


 그러자 오삼계는 손을 내저으면서 "아니다" 라고 말 했고, 부하들은 다시 "이는 왕의 은혜 덕분" 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오삼계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또한 완전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 나는 명나라 조정의 후한 은혜를 입어 동쪽 변방의 관리가 되었으나, 마침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자 경사를 지키기 위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청 왕조에 군사를 요청하여 아버지와 황제의 원수를 갚고, 계속하여 운남을 평정하여 마침내 운남을 평화롭게 할 수 있었다. 오늘의 부귀는 모두 명나라 조정 덕분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오삼계는 문득 스스로의 옷차림을 보더니, 자신의 선조 중에 누가 이런 옷과 모자를 쓴 이가 있었는가 라고 하면서, 곧바로 명나라의 의관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또한 살해된 영력제의 무덤에 고별 의식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그 영력제는 오삼계가 죽인 인물입니다. 약속한 그날 장수들은 모두 한족 관리의 옷을 차려입고 영력제의 능묘 앞에 섰습니다. 오삼계는 세 번 술을 따르며 제배했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삼계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급기야 대성통곡을 했고, 모든 병사들이 따라 오열했습니다. 그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습니다. 


공공연한 반란 의사가 확실해지자, 그는 즉시 열병식을 거행했고 스스로 말을 타고 화살을 쏘고 장창, 대검, 화극등을 다루는 솜씨를 보여주며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것을 부하들에게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청나라의 순무로 와 있던 주국치(朱國治)는 즉시 처형되었습니다. 오삼계가 이를 보고 짐짓 놀라는 체하며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구나, 라고 말하자, 병사들은 모두 큰소리로 외치며 부정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오삼계의 부인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울면서 사위와 조카를 질책했습니다.

 
"조정이 너희들을 잘못 대우한 점이 무엇인가. 너희들은 결국 이같이 반란을 일으켰구나!"


이제 오삼계는 귀주, 사천, 호북, 섬서 등에 서신을 보내 연합을 꾀하고, 경정충과 상가희, 심지어 대만의 정경(郑经)에게까지 사람을 보내 연합을 권유했고, 동시에 청왕조 토벌의 격문을 발표하여, 호응해줄것을 천하 사람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아래는 그 전문입니다. 




原鎮甯山海關總兵官,今奉旨總統天下水陸大師興明討虜大將軍吳,檄告天下文武官吏軍民等知悉:本鎮深叨明朝世爵,統鎮山海關。一時李逆倡亂,聚衆百萬,橫行天下,旋寇京師,痛哉毅皇烈後之崩摧,慘矣!東宮定藩乏顛錇,文武瓦解,六宮恣亂,宗廟瞬息丘墟,生靈流離塗炭,臣民側目,莫可誰何。普天之下,竟無仗義興師勤王討賊,傷哉!國遠夫偈可言?


本鎮獨居關外,矢盡兵窮,淚幹有血,心痛無聲,不得已歃血訂盟,許虜藩封,暫借夷兵十萬,身爲前驅,斬將入關,李賊逃遁,痛心君父,重仇冤不共戴,誓必親擒賊帥,斬首太廟,以謝先帝之靈。幸而賊遁冰消,渠魁授首,正欲擇立嗣君,更承宗社封藩,割地以謝夷人。


不意狡虜遂再逆天背盟,乘我內虛,雄據燕都,竊我先朝神器,變我中國冠裳,方知拒虎進狼之非,莫挽抱薪救火之誤。本鎮刺心嘔血,追悔無及,將欲反戈北逐,掃蕩腥氣,適值周,田二皇帝,密會太監王奉抱先皇三太子,年甫三歲,刺股爲記,記名托孤,宗社是賴。姑飲泣忍隱,未敢輕舉,以故避居窮壤,養晦待時,選將練兵,密圖恢復,枕戈聽漏,束馬瞻星,磨礪警惕者,蓋三十年矣!


茲彼夷君無道,奸邪高漲,道義之儒,悉處下僚;鬥霄之輩,咸居顯職。君昏臣暗,吏酷官貪,水慘山悲,婦號子洋以至彗星流隕,天怨於上,山崩土震,地怨於下,官賣爵,仁怨於朝,苛政橫征,民怨於鄉,關稅重征,商怨于塗,徭役頻興,工怨於肆。


本鎮仰觀俯察,正當伐暴救民,順天應人之日也。爰率文武臣工,共襄義舉,蔔取甲寅年正月元旦寅刻,推封三太子,郊天祭地,恭登大寶,建元周啓,檄示布間,告廟興師,克期進發。移會總統兵馬上將耿(精忠),招討大將軍總統使世子鄭(經),調集水陸官兵三百六十萬員,直搗燕山。長驅潞水,出銅鴕於荊棘,奠玉灼于金湯,義旗一舉,回應萬方,大快臣民之心,共雪天人之憤。


振我神武,剪彼囂氛,宏啓中興之略,踴躍風雷,建劃萬全之策,嘯歌雨露,倘能洞悉時宜,望風歸順,則草木不損,雞犬無驚;敢有背順從逆,戀目前之私恩,忘中原之故主,據險扼隘,抗我王師,即督鐵騎,親征蹈巢覆穴,老稚不留,男女皆誅,若有生儒,精習兵法,奪拔瘓穀,不妨獻策軍前,以佐股肱, 自當量材優翟,無靳高爵厚封,起各省官員,果有潔己愛民,清廉素著者,仍單仕;所催征糧谷,封儲倉庫,印信冊籍, 解軍前,其有未盡事,宜另頒條約,各宜凜遵告誡,毋致血染刀頭,本鎮幸甚,天下幸甚!




 원래 산해관을 방어하는 총병관으로서, 지금 지(旨)를 받들어, 천하의 수륙 군대를 통솔하여 명나라를 부흥시키고 오랑캐를 토벌하려는 대장군 오삼계는, 천하의 문무 관리와 군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리노라.


 본인은 외람되이 대대로 명나라의 작위를 차지하여 산해관을 통솔했다. 그러나 갑자기 역적 이자성이 난을 일으켜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했다. 이어서 경사를 노략질하니 아프도다, 숭정 황제와 황후의 서거여, 참담하도다. 황태자와 여러 황자의 고꾸라짐이여, 문무가 와해되고 육궁(六宮)이 약탈되었으며 종묘가 순식간에 파괴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 신민은 두려워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니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다. 천하에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황제를 보위하여 적을 토벌할 자가 없었으니 슬프다.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산해관 밖에 머물면서 화살과 병력을 다 써 버려, 피눈물을 흘리고 마음속으로 애통해하면서도 어쩔 수없이 오랑캐와 혈맹을 맺고 번봉(藩封)을 허가했으며, 그 병사 10만을 잠시 빌려 스스로 앞장서서 입관했다. 이적(이자성)이 도망쳤으나, 돌아가신 선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불구대천의 원수를 값이 위해 반드시 스스로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아 태묘(太廟)에서 머리를 베어 선제의 영혼에 사죄할 것을 맹세했다. 


 다행이 도적은 도망가고, 괴수의 머리를 베어, 황실의 후사를 세워 종사(宗社)를 계승하고 영토를 할양하여 오랑캐에게 사례하고자 했으나, 교활한 오랑캐가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동맹을 어기고, 우리 내부가 허술한 틈을 타 연도(燕都 : 북경)을 점령하여 우리 선조의 황제의 자리를 도둑질하고, 우리 중국의 풍속을 바꾸었다.


 바야흐로 호랑이를 막기 위해 승냥이를 끌어들인 잘못으로, 땔나무를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오류를 범했으니, 본인은 심장을 도려내고 피를 토하며 끝없는 후회를 했노라. 이에 병사들을 일으켜 북벌, 오랑캐들을 소탕하고자 한다. 마침 주규, 전홍우 두 황친이 왕(王) 태감에게 비밀 명령을 내려, 선제의 세 명의 황자를 안고 도망하도록 했다. 


 나이 겨우 세 살로 넓적다리에 흔적을 내어 표시를 하고 목숨을 맡겨 종사를 잇도록 했다. 그러므로 눈물을 삼키고 인내하여 경거망동하지 않고 벽지의 빈궁한 곳에서 생활하며, 떄를 기다려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은밀히 회복을 기대했다. 창을 베개 삼아 빗소리를 듣고, 말을 단속하여 별을 바라보고, 조심하고 또 신중한 것이 30년이 되었다.


 저들 오랑캐의 군주는 무도하고 간사함이 넘쳐서 도의의 유가들은 모두 하급 관직에 있고, 어리석은 무리들은 모두 높은 관직에 있다. 군주는 혼미하고 신하는 몽매하며, 서리는 혹독하고 관리는 탐욕스러워, 산하는 비통해하고 부녀와 자제가 눈물을 흘린다. 혜성이 떨어지니 위로는 하늘이 원망하고, 산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니 아래로는 땅이 원망한다. 관리가 관직을 매매하니 조정에는 사신이 원망한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니 향촌에서 백성이 원망한다. 관세를 무겁게 물리니 길에서 상인이 원망한다. 요역을 빈번히 일으키니 점포에서 공인(工人)이 원망한다.


 본인은 위를 바라보고 아래를 굽어보니, 폭정을 벌하고 백성을 구하며 하늘에 순응하고 여망에 부응하는 날이 이제야 이르렀음을 알았다. 문무신공을 이끌고 모두 의거에 참여하여 갑인년 정월 원단 인각에 세 명의 황제를 추봉하여,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삼가 대보에 올라 주계(周啓)라는 연호를 세우고 격문을 반포하도록 했다. 종묘에 고하고 군대를 일으켜 길일을 택해 출병했다. 총통 병마 상장 경(경정충)과 초토 대장군 총통 세자 정(정경)에게 서신을 보내, 수륙 관병 360만 명을 모아 연산을 공격하게 하고, 노수로 말을 달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했다. 


 의로운 깃발을 올리니 사방에서 호응하여 신민의 마음이 크게 통쾌해하며, 천인(天人)의 분노를 같이 설욕하고자 했다. 우리의 신무(神武)를 진작하여 저들의 기운을 없애고, 증훙의 전략을 개발하여 맹위를 떨치며, 만전의 책략을 세워서 은택을 노래할 것이다. 시의를 잘 알고 있다면 바람이 불어도 순풍이 불고, 초목이 손상되지 않고 닭과 개도 놀라지 않는다. 감히 순리를 어기고 역적을 따르거나, 목전의 사사로운 은혜에 연연해하고, 중원의 원래 주인을 잊고 요충지에 거하여 우리 왕사에 저항하면, 철기를 독려하여 친히 소굴을 정복하고, 노유(老幼)를 남기지 않고 남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다.


 만일 병법에 정통한 유학자가 있어 암곡에서 분발하고 우리 군에 책략을 제시하면, 재주를 헤아려서 우대 발탁하고 고관의 직과 높은 봉작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각 성의 관원들은 백성을 사랑하고 청렴이 두드러진 자는 그대로 임명한다. 징수한 양곡을 창고에 넣어 두고 인신과 책적(호적 및 토지장부)을 우리 군에게 내놓으라. 아직 다 밝히지 못한 사항은 따로 조약을 낼 것이니 각기 조심하고 경계하여 피를 흘리지 않게 된다면 본인에게도 매우 다행이고, 천하도 매우 다행일 것이다.



오삼계가 마침내 일어섰습니다. 천하가 따라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23 23:27)
* 관리사유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난멸치가싫다
13/06/17 22:37
수정 아이콘
진한 글이군요. 제가 다 두근거릴 지경입니다.
Je ne sais quoi
13/06/17 22:43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3/06/17 22:45
수정 아이콘
과연 53계의 앞날은?!
13/06/17 22:51
수정 아이콘
전 삼번의 난이라고 해서 그냥 세개 성 정도 되는 규모의 반란인 줄 알았는데
그 수준이 아니었군요 '';;
파르티타
13/06/17 22:57
수정 아이콘
빨리 다음편 써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13/06/17 22:59
수정 아이콘
좋은글 매우 잘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상황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했던 오삼계의 인생이 정말 파란만장 하군요.
그런데 삼번이 과소비 하면서 무엇을 했는지 상상에 맡긴다고 쓰셨는데
뭘 했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전쟁준비 인가요?
13/06/17 23:42
수정 아이콘
주지육림은 아니겠죠..?!
13/06/17 23:55
수정 아이콘
아.. 좋네요~ 응? 저도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2200만냥을 쓰면서 주지육림 했다기엔 액수가 넘 크지 않나 싶어서요~
테페리안
13/06/17 23:01
수정 아이콘
올라왔네요. 왠지 오늘 안에 올라올것 같아서 몇번이고 자게에 들어왔었습니다. 선추천선리플하고 읽으러 갑니다.
항상 글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퀄라이져
13/06/17 23:11
수정 아이콘
정말 제 심장이 오랫만에 진동하는 글이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Fantasystar.
13/06/17 23:44
수정 아이콘
이걸 진압한 강희제는 도대체...허허허
고딩어참치
13/06/18 00:53
수정 아이콘
제가 요새 이 시리즈 보는맛에 매일 피지알 들리는거같아요 흐흐
13/06/18 02:30
수정 아이콘
드디어 오삼계가 일어났습니다!! 크크크.
감사합니다 신불해님.

내용을 대충은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글로 설명해 주는 분들이 없었고....
이렇게 몰입할수 있게 글을 써주신 분도 없으셨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꾸준히 좋은 글들 많이 올려 주세요~ ^^

+) 물론 눈시님 빼고......흐흐
Jealousy
13/06/18 03:30
수정 아이콘
되게재밌네요
가만히 손을 잡으
13/06/18 08:50
수정 아이콘
저기 도르곤 도르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냥 그닥 중요하지 않은 건가요?
Siriuslee
13/06/18 13:54
수정 아이콘
황제에 오르진 못했지만, 생전에는 황제처럼 살다가
죽은후 부관 참시 당햇습니다(..)
13/06/18 09:06
수정 아이콘
중국의 반란을 볼 때마다 그 영토의 규모에 놀라게 됩니다. 지역에 할거한 개개의 세력이 현 대한민국쯤은 꿀꺽 삼키고도 남을 만한 거대한 땅을 점유하고
그 땅에서 작은 황제와도 같은 위세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죠. 말이 쉬워 삼번이지, 운남 귀주 복건이면 그야말로 거대한 땅 아닌가요. 그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중국사에서 그 허다했던 반란들이 어쩌면 필연적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367 [LOL] Olympus LOL Champions Spring 결승전 경기 보고서 #1 [35] 노틸러스11204 13/06/16 11204
2366 강희제 이야기(6) ─ 오삼계 vs 강희제 [13] 신불해10029 13/06/18 10029
2365 강희제 이야기(5) ─ 삼번, 진동하다 [17] 신불해9766 13/06/17 9766
2364 [LOL] 오존은 어떻게 블레이즈를 이길 수 있었나 [68] 레몬커피11562 13/06/16 11562
2363 강희제 이야기(4) ─ 오삼계 [13] 신불해10307 13/06/16 10307
2362 강희제 이야기(3) ─ 제국의 황혼 [11] 신불해10347 13/06/16 10347
2361 오늘도 글로써 여자를 배워봅시다.-생리 편- [68] 돌고래다26477 13/06/15 26477
2360 sexual talk. [46] Love&Hate20037 13/06/15 20037
2359 병인양요와 신미 양요 때 썼을 서양 총기 [5] swordfish8381 13/06/14 8381
2358 신미양요 - 조선군 전멸, 그리고... [18] 눈시BBbr9346 13/06/16 9346
2357 신미양요 - 작은 전쟁의 시작 [6] 눈시BBbr7306 13/06/14 7306
2356 내 생애 최고의 순간 [12] tyro8877 13/06/14 8877
2355 [LOL] MVP오존이 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인 'Dade' 배어진 선수 [24] 백학10422 13/06/16 10422
2354 강희제 이야기(2) ─ 만주 제일의 용사, 무너지다 [15] 신불해10563 13/06/14 10563
2353 강희제 이야기(1) ─ 평화의 조화를 위한 소년 황제 [15] 신불해9635 13/06/13 9635
2352 병인양요 - 프랑스군 철수 [8] 눈시BBbr5733 13/06/14 5733
2351 병인양요 - 양헌수, 강화에 상륙하다 [8] 눈시BBbr9594 13/06/11 9594
2350 병인양요 - 강화도 실함 [6] 눈시BBbr5378 13/04/05 5378
2349 병인양요 - 1차 침입 [4] 눈시BBbr7883 13/03/21 7883
2348 올바른 팬심이란 무엇일까. [12] No.426809 13/06/12 6809
2347 [LOL] 참을 수 없는 LOL의 즐거움 [35] 쎌라비10093 13/06/13 10093
2346 인생이 즉흥, 쿨가이 이븐 바투타 선생 [22] 신불해17068 13/06/12 17068
2345 PGR에 고마웠던 점 2가지 [52] possible9555 13/06/11 955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