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방금 퇴근길에 겪고 온 실화입니다. 생각나는대로 두드릴 예정이기에 글이 무척 길어질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건'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범행이 입증되지 않았기에 '용의자'라고 호칭하며, 덜 심각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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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성분들의 옷이 얇아지고 짧아지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제겐 늦은 시간 귀가하시는 여성분들은 정말 조심하셔야한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리는 하루였습니다.
오늘 전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했습니다. 야근하는 날은 퇴근길이 바뀝니다. 평소엔 2번의 환승 후 버스를 타고 귀가하지만, 버스가 끊기는 오늘 같은 퇴근 시간에는 15분 정도 추가되는 것을 감안하고 빙 돌아 지하철로만 퇴근하기 때문이죠.
주변에선 저를 가리켜 내추럴 본 오지라퍼 혹은 서브웨이 허슬러라고 부릅니다. 지하철 등 현실에서 민폐 끼치는 사람들을 두고 보지 않는 성격 때문입니다. 나대는 아기를 방관하는 아기 엄마, 주정뱅이, 민폐 노인, 에스컬레이터 뜀박질꾼 등 종류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라가스 못지 않은 물뱃살이지만 키도 평균은 되고 타고난 떡대와 퉁명스럽게 타고난 얼굴(슬프군요) 덕에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신경전에선 크게 꿀리지 않습니다.
제가 방관하지 않는 행동 중에는 '치한'도 포함됩니다. 실제로 치한의 희롱에 시달리는 여성을 구해준 적이 3-4번 됩니다. 제 이상형임에도 전화번호조차 묻지 못한 채(전차남은 꿈...) 여성 분의 눈물어린, 진심 가득한 감사만 받고 보낸 경험, 저는 치한을 붙잡고 내렸는데 출근길이 급하다며 피해자가 가버린 경험 등이 포함됩니다.
각설하고, 용의자(이하 X)와 피해자(편의상 A)를 만난 것은 제가 환승 후 집으로 돌아오는 약 20분 가량의 지하철 구간이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막차다보니 사람이 제법 있어서 빈 자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운좋게 자리에 앉았지만요.
맞은편에 제게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는 여성분이 있었습니다. A는 흔히 말하는 '지하철 복도 건너편으로 우연히 마주친 아리따운 여성'이었습니다. 키는 160 정도, 교복 느낌의 작은 마이를 입고, 벨벳 느낌의 미니스커트가 매우 짧은, 귀여운 미모의 여성분이었습니다. 나이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계란 한 판을 넘어선 저보다야 훨씬 적겠죠. 시간대상 미성년자일 가능성은 높지 않겠지만.
그런데 그 옆에 서있는 키 180cm 정도(저보다는 조금 큰 것 같고 마른) 남성의 행동이 심상치 않습니다. 빈 자리는 없어도 사람이 붐비진 않았는데, 미묘하게 계속 A 옆에 붙어서서 몸을 비비는(?) 겁니다. 더 수상한 것은 앞에 자리가 난 A가 앉자 무릎이 닿을 양, 아니 무릎 사이에 파고들어 설 기세로 바짝 붙어서더군요.
솔직히 말해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뭘 생각하기엔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럼에도 장시간 서서 왔기 때문에 갑자기 앉자 급졸음이 쏟아지기도 했고, 이 남자 때문에 A의 귀여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약간 짜증났을 뿐이죠. 하지만 우연찮게도 A의 옆 자리가 비었고, 남자는 바로 옆에 바짝 붙어앉습니다. 그리고 A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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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의 행동은 노골적이진 않았지만(손으로 더듬는 등의 눈에 띄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팔이나 허벅지 등의 부비부비가 이뤄지는 것 자체는 명백했습니다. X의 체구를 감안했을 때 가능성은 낮지만, 우연찮게 충분히 가능한 행동입니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X가 A에게 단순히 행동만이 아닌 뭔가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상황을 감안하면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 옆자리엔 몹시 소란스런 술취한 남자 노인 셋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은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됐든 A의 얼굴에는 제가 보기엔 두려움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둘이 연인일 수도 있고(가능성은 낮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불법적인 요소가 없었습니다. 여성분이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한 것도 아니었고, 저는 무척 피로했으며, 이 지하철은 막차였습니다. 게다가 저는 오지라퍼일지는 몰라도 경찰이나 정의의 용사도 아니잖아요. 그럴 권한도 없고. 때문에 그냥 지켜보기로 합니다. 잠은 싹 달아났습니다.
이 와중에 열차는 제 목적지보다 한 정거장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A가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가방을 집어들더니 내렸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X 역시 다소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뒤따라 내렸다는 것이죠. 자기 가방을 새삼 살핀다거나, 목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등.
잠시 고민한 끝에 저도 내리기로 합니다. 저는 내일 휴일이었고, 이제 집까지는 까짓 거 20여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A가 진짜로 걱정이 됐습니다.
쓰다보니 너무 피곤하여 이쯤해서 절단신공을 쓰고 싶지만, 내일은 이렇게 글을 쓸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으므로 계속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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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묘한 추격전이 펼쳐집니다. A가 빠르게 걸으려는 듯 했지만, 굽이 낮지 않은데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몸동작은 굼떴습니다. 그 뒤를 X가 느긋하게(묘사하자면 만만디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더욱 위험을 느꼈습니다) 걸어갔고, 저는 그런 X를 다시 비슷한 속도로 뒤따랐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 도달하자 A는 멈춰섭니다. 숨이 찼을 수도 있고, X를 먼저 보내려는(어쨌든 본인은 서둘러 걸었기 때문에) 생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때까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A의 치마는 정말 짧아서 제가 있는 위치에서는 꽤 아슬아슬할 정도였습니다만, X는 약 3-4칸 정도 뒤까지 올라간 뒤 마치 뒷사람의 시야를 막기라도 하듯 멈춰섭니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중간을 넘어선 A가 걷기 시작하자, X도 곧바로 걸어올라갑니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 후반부란 서서 올라가던 사람도 걷게 만드는 마력(?)이 있으니까요.
출구는 계단이었습니다. 이때부터 X와 A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먼저 X는 A에게 좀더 가깝게 따라붙습니다. 위치도 뒤쪽이 아닌 왼팔 팔꿈치 두 발짝 뒤 정도로 바뀝니다. 그리고 X는 들고 있던 일수가방처럼 생긴 손가방을 오른손에 쥔 채 일직선으로 내뻗었습니다. 이미 의심이 극에 달한 제 눈에는 명백한 업스커트 몰카 행위였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의 행동도 둘 간의 거리를 감안할 때 몰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X를 그 자리에서 붙들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진짜 몰카라면야 상관없겠지만, 설령 X가 진짜 치한이더라도 이 행동은 몰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쯤 해서 저는 X가 A에게 어떤 육체적인 해를 끼치려 할 때만 개입한다는 방침을 확고히 합니다. 저로선 어쩔 수 없었어요. 전 참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다소 귀찮아질 것을 감안하며 추궁하고 따져묻는 사람이지, 위험에 뛰어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X가 품안에 칼이라도 품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이때 처음으로 A는 뒤를 흘깃 돌아보곤, 치마 뒤를 가리기보다는 적극적인 회피 기동을 시작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A는 X와 저를 똑같은 치한 혹은 한 패거리(...)로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외모는 전술했다시피 대충 험악합니다. X는 좀더 힘아리없이? 조다 같이? 지질스럽게? 생겼습니다.
A는 걸음을 늦췄다 다시 빨리하고, 빨리 하다 다시 늦췄습니다. 하지만 X는 크게 변함없는 속도로 뒤따랐습니다. 다리가 훨씬 긴 X가 간격과 리듬을 조절하며 A를 뒤따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윽고 지상으로 올라선 A는 출구 방향의 반대편(그러니까 뒤로 돌아)으로 잠깐 걸어갑니다. 그 사이 X는 또다시 목을 휘저으며 멈춰섰고, 저는 그냥 걸어올라간 속도 그대로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걸어갔습니다. 저로선 이게 집에 가는 방향이기도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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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뒤에서 탁탁탁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A가 반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절 지나쳐갔습니다. 그리고 소름끼치게도 좌우를 살피며 어슬렁거리던 X의 걸음도 재차 속도를 가해 저를 앞질렀습니다. 저는 일단 제 속도를 유지하며 이들을 뒤따르기로 했습니다. 전술했듯이 저로선 집에 가는 방향이었습니다.
이때 A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어 이미 깜박거리고 있는 횡단보도(왕복 8차선)로 뛰어듭니다. A로선 뛰지 않으면 건너기 힘들 정도의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X 역시 약간 망설이는 듯한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넌 A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잽싸게 뒤쪽을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제법 따라붙었던 X는 고개와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그 눈길을 피하는 듯한 동작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예상대로, A가 돌아서는 순간 X는 다시 몸을 왼쪽으로 돌려 따라붙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타이밍에 건너는 건 모양새도 거시기할 뿐더러,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넓은 길이고, 밤시간대 차들은 엄청나게 쌩쌩 달리니까요. 저는 결국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넓은 길 건너편에서 A와 X의 행동을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A는 다시 한번 뒤쪽을 후려보지만, X는 놀랍게도! 신호등 컨트롤러 뒤로 몸을 피해 시야를 벗어납니다. 이때도 X의 시선은 명백하게 A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소름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A는 제 생각보다 훨씬 영리한 사람이더군요. 길을 건넌 A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버스정류장이었습니다. 말하자면, A는 X의 의중을 확신하고, 자신의 집을 지나친 곳까지 지하철을 타고 온 뒤, 자기가 온 방향으로 되돌아간 겁니다. 건너편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저로선 다행스럽게, A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떠났습니다. X는 차마 버스까진 뒤따라 타진 못했죠. 닭쫓던 개마냥 정류장에서 약간 떨어진 신호등 컨트롤러 뒤에 서 있던 X는 결국 입고 있던 얇은 점퍼 깃을 세우며 돌아섰습니다. A는 X의 손아귀를 마침내 벗어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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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적이지 않은 우연적 상황으로 한정해서, 타고난 치한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남성 분들 중 짧은 치마 입은 여성에 대한 음흉한 관음증의 욕망을 가져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행동'이 간접적인 것(도촬, 언어적 희롱 등)에서 직접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것 또한 한 순간입니다.
검거되지 않은 치한 혹은 변태 a.k.a 밝혀지지 않은 범죄자는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A와 X는 혹시 피지알러였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X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난 당신 얼굴도 행동거지도 모조리 자세히 봤습니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길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 나와 마주칠지 모르니까요. 물론 당신도 내 얼굴을 기억한면야 그런 행동을 안하겠지만.
그리고 A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전 그런 사람 아니니 오해 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지혜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면, 민망해지거나 혹은 곤란해질 수 있는 것을 각오하고 지하철에서 강하게 불쾌감을 표함으로써 상황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나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없어서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복잡한 상황까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