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복도, 복도, 복도.
이 미로같이 얽힌 복도는 톰 리건의 여러 갈래로 분열된 의식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또 어느 회원분이 언급하신대로 라캉의 ‘구조화 된 무의식’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도 그 자체가 영화상에서 가지는 기술적인 역할은 컷과 컷 사이, 즉 장소와 장소사이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간벌기용으로 짜인 심시티죠. 그래서 이런 단순히 장소A에서 장소B로 이동하는 시간은 필연적으로 지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냐리투 감독은 이 복도를 아주 센스 있게 활용합니다. 앞서 말한 소품이라는 사물이 가지는 한계와 복도라는 장소가 가지는 한계를 짬뽕시킴으로서 영화에서 아주 감칠맛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복도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그 소품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복도에 붙어 있는 EXIT 표지판입니다. 복도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장면들 속에 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죠. 위의 네 사진은 극의 초반 톰슨 리건이 처음으로 방에서 무대로 향하는 첫 복도인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첫 사진에서 바로 옆에 EXIT 표지가 붙어있는데 채 몇 걸음도 가기 전에 또 EXIT 표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또 EXIT 표지가 나타나죠. 이렇게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붙어있는 EXIT 표지는 단순히 필요한 표지판의 수량을 잘못 계산해 왕창 사버린,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모두 사용해버린 감독의 실수일까요? 단연코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다 못해 통뼈가 되어버린 이냐리투 감독의 철저한 의도이자 설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전체의 흐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인 EXIT 표지를 피할 수 없는 배경인 복도에 어떻게 배치했는지, 감독의 설계를 한 번 살펴볼까요?
3. 반복
영화의 처음 장면은 리건이 딸 샘과 화상통화를 마치고 무대로 내려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리건은 샘의 일방적인 짜증에 지쳐 보입니다. 리건은 딸과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다시 한 번 위의 사진을 보시죠. 시각적 단서로써 EXIT 표지가 나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상황은 프리뷰의 리허설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그 다음 리허설 장면에서 연기노답은 리건이 날린 정의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무대는 개판이 되버렸고, 상황 자체가 짜증나는 이 상황에서 리건은 또다시 벗어나고 싶어하죠.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시각적 단서는? 또 EXIT입니다.
EXIT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출구 2) (배우의) 퇴장
. 아시다시피 버드맨은 '연극'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고, 영화 자체를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기위해 롱테이크 연출을 사용한 것 역시 다들 아실겁니다. 따라서 컷 구분이 어려운 버드맨에서 버드맨의 '흐름'을 구분하기 위해 EXIT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주 재치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1번의 '출구' 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EXIT는 바로 리건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을 때 주로 나타나는 시각적 단서입니다. 리건의 생각을 글로 옮기자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리건은 이 모든 상황을 경멸했다. 연기를 못하는 연기자와, 그걸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걸 알면서도 연기를 못하는 연기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는 제작자. 리건은 그저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빠져 나가고 싶다’ 는 생각이 드는 리건. 도대체 이 문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감독 역시 이 문구를 어떻게 하면 시각적으로 표현 할수 있을까 고민 했을 겁니다. 동시에 이것은 롱테이크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합니다. 여기서 감독은 놀라운 연출력을 보여줍니다.
이 연출력은 위의 컷들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이 경우 빨간색 EXIT 표지가 왼쪽 상단에서 중앙의 주인공의 머리를 스쳐지나가게 됩니다. 즉 ‘리건은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라는 문장을 단어 EXIT와 놀라운 연출력으로 멋지게 뽑아낸 것이죠!
저는 영화관에서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뱉어버렸습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놀라울 게 없는 장면인데, 그건 이게 놀라운 장면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감독이 놀랍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EXIT의 기능을 관객의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서죠.
이것이 바로 이냐리투 감독의 설계입니다. 완벽한 킬각을 위해서 가랑비에 옷 젖듯 뎀딜을 넣는 것이죠.
또 하나 재밌는 부분은 바로 이런 표지가 무대와 관련이 없는 상황에서도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동료 배우 로라는 리건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지만 리건은 오히려 당황해 합니다. 여기서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죠. 따라서 뒤에 EXIT가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건너 뛰어서 EXIT가 더 강렬하게 기능하는 장면으로 가보도록 하죠. 바로 마이크 샤이너가 프리뷰 무대에서 음주연기를 펼치며 또 다시 무대는 개판이 되는 장면입니다.
이 상황에서 리건의 심정은 어떨까요? 처음에는 당혹스러움, 창피함, 그러다 분노, 더 격렬한 분노 등 리건의 마음속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리건은 그저 이 아수라장 속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따라서 감독은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리건의 당혹과 분노가 섞인 표정, 평소보다 더 요동치는 핸드헬드 샷, 리건의 빠른 걸음에서 나오는 속도감, 그리고 EXIT라는 문구가 주는 텍스트적 암시입니다. 리건의 상징색이자 리건의 심정을 표출하는 강렬한 빨간색이지만 요란하지는 않은 EXIT 표지는 자연스럽게 화면에 녹아들고 있습니다. 또 표지는 정면이 아닌 주변에서 균형과 비례, 조화의 미를 아주 잘 살리고 있죠.
따라서 이런 센스 덕에 관객은 EXIT라는 글자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암시’를 보게 됩니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합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암시’의 생명은 반복이니까요.
4. 대비
다들 초등학교 때 ‘조형의 원리’에 대해 배우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조형의 원리에는 통일, 변화, 반복, 균형, 비례, 조화, 대비 등이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의 EXIT 표지는 통일, 균형, 반복, 비례, 조화 등으로 이 조형원리를 그런대로 잘 지켜 왔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단조롭다는 것이죠. 변화와 대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감독은 또 이 표지를 어떻게 극적으로 활용하는지 살펴봐야겠군요.
이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우리는 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리건의 캐릭터를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리건은 주변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류에 있어서 굉장히 무딘 사람입니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딸은 약쟁이가 되었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동료도 결국 마음이 떠나버리고 말았죠. 어떻게 보면 리건은 굉장히 무책임한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감독은 최선을 다해 리건을 변호합니다. 리건 역시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을 포함한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받고있음을 절절히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The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이라는 문구에서 드러나는 것 처럼 리건은 세상과의 평가와 싸우고 있습니다. 평론가, 기자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리건에게 날 선 비판을 날립니다. 리건은 이에 맞서 싸우지만 주변과 마찰을 빚는 게 아니라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통제하고 수양합니다. 그래서 분노는 속으로 삭히고, 명상을 하고, 술과 흡연은 최대한 자제합니다. 특히 마이크와 술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레이먼드 카버가 준 냅킨을 마이크가 엄청나게 폄하하는 장면에서도 리건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극의 초중반부 정도에 해당하는 40분 (마이크와 술집에 가서 이야기 하는 장면)까지 이런 행동들을 보이지만, 이러한 리건의 행보는 점점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회피하지 않습니다. ( 놀랍게도 40분 시점부터 EXIT의 출현율이 극도로 낮아집니다. ) 딸 샘에게 소리치기도 하고, 대마나 담배에 손을 대기도 하고, 마이크에게서 묵묵히 쓴 소리를 듣다가도 이제는 완 빤치를 벌이기도 하고, 독한 술을 마시고 나자빠지기도 합니다. 고통은 리건을 통제와 비통제 사이에서 갈등하게 합니다. 이는 극 중에서 보이는,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부수는 자기파괴적인 행동들로 잘 나타납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부르던 변화는 어떤 최고점에 다다르자 또 한 번 격변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 장면이죠.
평론가 타비사에게 폭언을 듣고 난 후 리건은 이때까지의 모든 행동들은 부질없었음을 느낍니다. 자신에게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들을 모면하고 도망치기 위한 ‘출구’를 찾기보다는 자신의 고단한 인생 그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궁극적 출구’를 찾게 됩니다. 이때부터 리건은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결심이 섰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또 복도에서 더 이상 ‘상황의 출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리건은 마침내 ‘궁극적 출구’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죠. 리건이 처음 무대로 향하는 장면과 마지막으로 무대로 향하는 장면을 비교해보면
‘대비‘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리건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초탈한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앞서 보여준 불교적 상징물에 대한 암시는 모두 이 장면을 위해 달려온 것이죠.
끝.
이 아닙니다. 감독은 여기서도 리건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감독의 장난인지 리건은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지만, 리건은 여전히 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출구는 기레기들과 평론가들에 의해 이미 막혀있습니다.
이 장면 다음에 나오는 리건은 마치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저 출구가 막혀있지 않았더라면 , 기자들과 평론가들과 대중들이 리건 스스로도 괴로워 할 만큼 리건의 인생을 토막 내고 잘라 붙여 활자들로 나열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리건은 자살이라는 ‘궁극적인 탈출구‘에 까지 이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건은 창문으로 향합니다. 유일하게 남은 출구입니다. 리건은 출구를 향해 뛰어들고, 막이 내립니다.
4. 탈출의 욕망
그런데 저는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드디어 매트릭스 이야기를 꺼내게 되네요.) 네오가 요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창문으로 향하는 바로 그 장면이요.
(재밌게도 리건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지만 네오의 시선은 땅을 향하고 있네요.)
이 장면 외에도 꽤나 유사한 시각적 요소들이 더 있습니다. 우선 네오가 가장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출구를 기자들 처럼 요원들이 이미 가로막고 있다거나, 탈출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헤매게 되는 비좁고 복잡한 미로 같은 통로라든지, 그 성격은 다르지만 창문을 향해 가라고 부추기는 주변 인물들 말이죠.
(또 재밌게도 마지막 사진을 보면 여기서도 EXIT 표지가 네오의 머리위에 걸려있군요. 한 번 확대 해보겠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워쇼스키 자매는 영화에서 텍스트 암시를 잘 활용하는 편입니다. 이는 다음 번 '매트릭스 다시보기'에서 다뤄볼 내용중 하나입니다.)
이 같은 시각적 요소들 역시 매트릭스를 구상한 워쇼스키 자매의 불교적 상상력과 관련이 깊습니다. 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매트릭스를 성서적 접근으로만 국한 짓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매트릭스는 기독교만큼이나 불교적 메시지가 깊게 녹아있습니다. 1)
1999년 시나리오를 쓴 워쇼스키 자매는 인터뷰에서 불교가 그들의 사상과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받고 “예스!”라고 대답했습니다. “불교와 수학, 특히 양자물리학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고 그 둘이 접합하는 지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오래 전부터 불교에 매혹되었습니다.” 2)
불교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중생들이 수행을 통해 열반에 이르러 삶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Nirvana, 즉 ‘욕망의 불길이 다 불어서 꺼진 상태’를 이야기 하며 한국어로 자유·해방·해탈 등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네오는 매트릭스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깨달음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깨달음은 다르게 말해 ‘자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오가 해야 했던 첫 번째 자각은 바로 자신이 있는 곳이 진짜 현실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네오는 자각을 위해 자신이 현실에서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빨간 약을 선택합니다.
빨간 약을 선택하는 것 외에 보다 현실적인 방법은 바로 명상을 통한 자각입니다. 비파사나라고 하는 불교의 수행법은 숙련자에게 자신의 정신적 과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해줍니다. 의식적인 앎과 무의식사이에 세워진 장벽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즉 네오와 리건은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자신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네오는 결국 모피어스와 함께 매트릭스의 바깥으로 나갔지만 리건은 그게 드러나있지 않다는 점이죠. 또 리건은 죽었지만 결국 네오는 끝까지 살았다는 점도 있겠네요. 역시 될놈될 인가요(...).
그렇다면 리건은 스미스 요원 같은 평론가·기자·대중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한 패배적인 인물일까요?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나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실 버드맨의 결말은 결국 리건이 열반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냈냐는 물음에 대해서 의문을 자아낸다는 것입니다. 그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자살을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오는 자신을 둘러싼 적대자인 스미스 요원과 대립해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게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리건은 이 점에서도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고 할까요. 영웅주의적 성격과 현실주의적 성격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모호함은 모호함으로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리건이 택한 죽음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출구’라고 본다면 리건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죽음으로 결론을 맺은 것이겠고, 그게 아니라 리건이 택한 죽음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출구’라고 본다면 리건은 끝내 자기 자신과 현실사회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한 셈이 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1) 이은비 기자 <매트릭스에 나타나는 불교적 상징>, <불교평론>
2) 현각 스님 〈매트릭스-리로디드〉 관람기, 〈한겨레신문〉
+ 여담으로 제가 본문에서 ‘열반’ 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이는 올바르지 못한 표현입니다. 불교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불교계에서 오히려 열반이 죽음과 가지는 관련성은 없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기에, 생전의 부귀영화나 자식의 성공 같은 살아생전의 자신이 가진 모습들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입적’ 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듯합니다.
++ 이번 버드맨 편이 호응이 좋으면 다음 주제가 ‘버드맨에 담겨진 다른 트리비아들’ (EXIT 표지만큼 자주 보이는 금연 표지라든지, 리건의 대기실문의 명패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점, 또 타비사와 리건의 독설전을 감독이 어떻게 연출했는지 등) 이 될 것 같습니다. 반응 없이 묻히면(흑흑..) ‘매트릭스 다시 보기‘를 주제로 삼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