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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4/03 00:01:51
Name 이상 그 막연함
Subject [일반] 궂은 하루

"어서 가자 시간 다 됐다"

자꾸 재촉한다

아내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거슬렸다

가야되는거 누가 모르나

시간 맞춰가야 편한거 누가 모르나

억지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치약을 짜려는데 중간을 눌러짠 흔적이 보인다

참나 이런 식으로 쓰면 치약을 아껴쓰지 못하는데...

몇 번을 알려줘도 이 모양일까

순간 쓸때없는 걱정과 한숨이 나온다



"양치질 하는거야?"

아내는 기다리질 못하나보다

그래도 양치질을 마저한다

다시 와서 자리에 앉는다

숨을 몰아 쉬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시 화장실

소변을 본다

오늘따라 오줌줄기가 힘이 없다

나와서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양말을 신는데 왠지 잘 되지 않는다

오늘따라 바지는 왜 이렇게 맘에 안들까

모든 준비는 끝이다 이제 나가면 된다

집을 나와 차앞에 섰다

왠지 우리집 자동차가 처량해 보인다

그래도 구입한지 얼마 안되는데.......

순간 고민하지만 그래도 운전석에 앉는다



"괜찮겠어요?"

걱정이 되나보다

그러나 걱정 말아라

내가 이래보여도 50 년 이상 운전한 베테랑이다

운전석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본다

차가 낯설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 그럴거야.....

날씨도 오늘따라 구질구질하네....

뭐 시간이 시간이라 막히지는 않는다

드디어 도착

그런데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

왜 이렇게 차가 많은지

그래도 구석에 한 자리를 보고 주차를 한다

흠...... 비가 올려면 쉬원하게 올 것이지....

건물을 돌아서 복도를 지나

작은 대기실에 들어간다

순번은 금방이다....

아들 녀석은 잠깐 구경을 가나보다

짜식 처음 와보는 놈처럼 저게 뭐하는 건지....

촬영은 신속하고 편하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고 숙달된 촬영기사라서 실수도 없다

나와서 다시 차로 간다

위치가 헷갈렸지만 아들 뒤를 따라가는 척 했다

역시 걸음을 늦게 하면 이런 건 좋다

남들보다 늦어진 걸음이 효과를 낸다

다시 차에 탔다



"물 뜨러 가야지?"

아내는 생각없이 말한다

그래 물 떠야지....

물을 떠놔야지...

한산한 도로를 지나는데 왠지 서글픔이 묻어난다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차에 있을 거죠?"

아들녀석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

내가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

당연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분명히 알려줬는데

남자 냄새가 안나는 녀석

아내와 아들은 물을 뜨러가고 나만의 시간이 왔다

물뜨러 온지도 10 년쯤 된 것 같은데....

오늘따라 이곳이 적막하다

날씨탓이겠지

날씨가 구질구질하잖아....

죄없는 날씨가 오늘의 먹잇감이다

오늘 참 날씨 구질구질하네

구름 끼고 비가 오듯 말듯

저 뒤에 언덕에 올라가면 동상도 있고

벽화처럼 사람 이름이 써져 있을거고

거기에 내 이름도 있을건데

가서 보고 싶기도 하고

갈 힘은 없고

헤헤 다 된거지 뭐

멀리서 아들이 온다

이제 아들도 나이가 찼다

짜식 머리는 나를 닮아서 나쁘지 않은데

성격이 그지같은 녀석

굽힐 줄도 알아야지

남들처럼 검어질 줄도 알아야지

하얗게 세상을 살면 어려운데....

집으로 가는 길도 막히지 않는다

주차를 하고 집으로 들어온다

생각보다 들어가기가 싫다

딱히 할 것도 없고

딱히 가 볼 때도 없지만

왠지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왠지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올 것만 같은 느낌....

힘이 빠진다.....

자리에 앉아서 숨을 쉬어본다

숨 쉬는 게 힘들어 보이면 안되니 나지막히 몰아쉬자

역시 아무도 눈치를 못 챈다



"밥 차려올 게 밥 먹어"

아내는 여전히 밥타령이다

먹을 힘도 없고 마음도 없지만

억지로 한 숟갈 떠본다

역시 밥먹기 싫다

두어 숟갈을 뜨고 자리에 눕는다

티비에 재밌는 것도 안한다

참 슬프다

날씨가 구질구질 하니까

티비도 구질구질 하고

아......

이렇게 하루가 저무나 보다

잠이나 자야겠다



"나 목욕탕 다녀 올테니까 아빠 깨면 먹을 거 챙겨드려"

아내가 나가나 보다

아들은 별로 눈치가 없는 것 같다

건성건성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거실은 온전히 내 차지다

티비는 열심히 쏼라쏼라를 한다

들리지만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솔직히 귀에 들어올 내용도 없다


"아휴 왜케 어두워"

아내가 들어오면서 불을 켠다

평화는 깨졌다

나만의 평화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평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평화

나로 인해 귀찮지 않을 수 있는 평화

평화는 중요한데.....

저녁은 먹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먹을 힘이 없다

목구멍으로 음식 넘기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서 식욕이 없다고 말해야지

밥생각은 없음

멋진 변명이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 변병이다

그래서 잠에 든다

그래야지 아내와 아들이 억지로 밥을 먹으니

나만 굶는게 낫지

나때문에 가족 전부가 굶어서야 되는가

나때문에 가족 전부가 힘들어서야 되는가

나때문에 가족 전부가 끝을 볼 필요는 없다

나만 힘들고

나만 아프고

나만 기다리면 된다

나한테만 찾아올 바로 그 녀석을

흐흐흐

젊어서는 그렇게 내가 찾아다녔는데

이제는 그 녀석이 나를 찾는다

오지 마라

아직은 오지 마라

너가 오면

내가 가야되니까

아직은 오지 마라

나도 준비를 하자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자

나도 가족들과 준비를 하자

너가 오면 반겨히 맞아줄 그 때가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갑자기 겪게될 아픔을

내 가족들은 아직 이겨낼 힘이 없다

조금만 천천히 와라

내 가족들이 이겨낼 수 있을 때

내 너를 크게 웃으며 맞이하겠노라




- 2015년 3월 31일 궂은날




추신1 : (백수 노총각 불효자 게으름뱅이 가난뱅이) 아들이 본 아빠의 궂은 하루

아버지는 폐암 말기구요 오늘 어머니께서 의사한테 3개월 소리를 들었어요

실패한 제가 여러분께 성공의 열쇠 하나를 드립니다

"부모님은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추신2 : 제 욕은 해도 되지만 부모님 욕은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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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de laf Heaven
15/04/03 00:26
수정 아이콘
어쩌면 부모님 앞에서 우리 자식들 모두는 실패자가 될 수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 하는 수 밖에는 없겠죠...

먼 길을 떠나려는 분과 남겨지게 될 분들 중 어느 쪽이 더 아플까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이상 그 막연함'님과 부모님들이 되도록 많은 시간을 정말 행복하게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널 원해
15/04/03 01:03
수정 아이콘
어떤 형태로의 이별도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아픈 것 같아요. 작년 한 해 사촌이네 친지 중 두분을 멀리 보내드렸는데,
이상 그 막연함님의 글을 보니까 맘 한구석이 미어지네요.
저에겐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2달 밖에 주어지지 않았었는데 다들 전 할만큼 했다고들 했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모자란것만 같았네요.
이별은 몇번을 해봐도 적응이 되질 않네요.
글을 읽고 필력에 놀라고 마지막 추신을 읽고나니 뭔가 아련한 슬픔이 파고드네요. 힘내시길 바랄게요.
Jon Snow
15/04/03 01:16
수정 아이콘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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