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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13 16:55
중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는데, '기술적인' 물건에 대해서는 쓸모가 있으면 의외로 쉽게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조선조의 몇몇 사례같은 걸 봐도(안경, 총포...) 쓸모가 있으니 쓰지요. 그러나 본질적인 요소, 특히 정치관, 세계관, 사회관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고 결국 그 차이가 수입과 체화의 차이로 이어진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14/08/13 17:01
일단 가톨릭 문제부터.. 얘기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가톨릭은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학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서학인거구요. 학문으로 생각하다보니 지식층 사이에서 어느정도 퍼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겁니다. 황사영백서로 나가리되긴 했지만..
그리고 조선시대는 의외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술은 쉽게 받아들입니다. 나선정벌때 싸운 러시아 군은 당시 플린트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노획 후 조선에서 다시 만들어 봤으나 당시 기술력으로는 만드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서 만드는걸 포기하고 조총을 계속해서 만들었습니다. (아마 스프링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들어온 나라가 거의 청나라이고, 그것을 하나의 기술과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전혀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지요. 물론 서학은 좀 특이케이스이긴 하지만..
14/08/13 17:05
황사영 백서는 한국 카톨릭에서는 순교의 정점으로까지 생각한다고 하던데(...) 종교를 위해 모든 걸 바친...
하지만 뒤집어놓고 보면 역대 최악의 역적질이죠. 그것도 종교에 빠져...
14/08/13 17:16
제가 카톨릭이지만.. 그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이번에 교황성하 오면서 하는 시복식에도 황사영은 빠졌죠.. 앞으로도 아마 그정도만 유지할 겁니다.
14/08/13 17:29
그렇군요. 저도 카톨릭 신자한테 들은 내용이라... 제가 황사영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를 했더니 정색하더라구요.
카톨릭 신자에게 종교란 무엇보다 중요한 거고, 황사영은 순교자의 표본이라고... 그렇지 않다고 하니 잘못 알고 있던 부분 바로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종교 정착기 혹은 전파기 성인이라는 게 참 애매한 부분이 많다보니... 가령 제사 안 지내다가 죽은(윤유일 베드로? 한국천주교회사 공부하던 게 몇년 전이라...) 사람들은 시복되죠? 이런 부분도 사실 논란이라면 논란인데 말이죠.
14/08/13 17:32
윤지충 베드로.. 입니다. 아마 이번 시복에 들어갈겁니다.
그리고 카톨릭에서는 제사에 관해 큰 문제가 없습니다. 저도 카톨릭집안이지만 제사 지냅니다. 당시 상황상 그렇게 된 거니까 아마 이번 시복에 들어갔을겁니다. 사실 논란될것도 없는게.. 이미 기독교 집안들 중에 제사 안지내는 집안은 많으니까요 그거보다는.. 사실 교황성하가 직접 와서 시복식을 집전하는게 영광인거지요. 우리나라만의 유일한 특혜거든요... 103위 시복식때도 요한바오로2세께서 직접 와서 시복식을 했는데(그때도 교황성하가 강짜를 부리셨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원래 시복식은 항상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집전하는게 관례입니다.
14/08/13 17:37
찾아보니 윤유일은 지황과 함께 주문모 신부 대피에 관련된 사람이었군요.
한국 카톨릭은 초기 카톨릭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보니 바티칸에서도 상당히 인정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무려 자연발생(까진 아니지만)적 속성에 초창기 박해에... 배론 성지 같은 곳을 만들어낸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선구자격인 이벽 세례자 요한이나 이승훈 베드로는 좀 이상한 사람이었으니 이것도 참;;
14/08/13 17:41
사실.. 배론성지가 그 황사영이 백서 쓴 곳이라.. 좀 애매 합니다.. 그만큼 숨기 좋았다는 뜻도 되지만요.
조금 찾아보니 황사영과 그를 도와준 두명도 이번 시복때 제외됐는데.. 이유가 '순교자임은 확실하지만 나라의 위해를 끼칠수도 있었던 사건의 주모자라' 제외한듯 하네요. 한국 카톨릭의 황사영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이정도로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14/08/13 19:04
황사영 건은 황사영 백서를 원본을 교황한테 전달하고 불역한 뮈텔 주교도 90년 전에 '극형을 받을만하다'라고 평한지라... 우리나라가 천주교 국가가 되지 않는한 시복도 안될 겁니다.
14/08/13 17:35
가톨리계에서 황사영은 뭐 흑역사라고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좀 이해는 갑니다. 우리 같은 근대 민족주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야, 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고 또 일제시대와 제국주의 시대를 겪었기에 그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알 수 있지만... 그의 인식적인 면에서는 조선은 기독교 초창기의 교인들을 박해하는 로마 같은 외부인으로 밖에 안보였을 테니까요. 물론 그덕에 조선에서 가톨릭의 이미지는 바닥을 향했지만요.
14/08/13 17:04
문제는 지배층이겠죠. 조선에도 서학문물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주류가 되지못하고 지배층이 되지 못한게 조선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14/08/13 17:05
읽어보니 재미있긴 한데 가독성이 떨어져서ㅠㅠ
혹시 이분 글 책으로 나온 건 없나요? 유명 블로거들 글(분야를 가리지 않고... 초록불님이라던가 슈타인호프님 글 예전에 많이 읽었었는데) 책으로 나온 게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
14/08/13 17:09
닫힌 나라고 열린 나라를 어떤 기준에서 판단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일본과 비교한다면 닫힌 나라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쨋든 일본은 진통을 겪으면서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면 반면에 조선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물론 그 닫히고 열린 정도가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는 유일한 변수는 아니었겠습니다만.... 그리고 소수 일부 지식인이 서구권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는 게 그 국가가 열린 국가라고 볼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여부도 의문이네요. 1930년대 국세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문해율은 22% 정도고 1800-1900년대 10-15%정도로 추정되는데 서구 열강은 말할 것도 없고 동시대의 중국 일본에 비하면 꽤나 낮은 수치죠. 글 자체를 못 읽는 사람이 국민 대다수인데 극소수의 지식인이 서구권에 대해 알았다는 것이 열린 국가였다는 근거가 될런지는...
14/08/13 18:23
문해율이 낮은 것과 열린 국가의 상관관계는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문해율이 낮은 거야 문자와 언어간의 괴리 때문인데 이게 국가의 폐쇄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08/13 17:09
네덜란드에서 표류한 하멜을 감금하고 청나라에서 넓은 세상을 보고온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국제적 판세변화와는 무관하게 명나라짱만 외치고 있었던 조선이 열린나라라고 보기엔....
언급하신 정보들은 자연스럽게 들어오는게 어찌보면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위쪽으로는 명나라 청나라가 있고 옆나라 일본도 있었고요 조선이 닫힌나라라는건 문물과 정보가 "들어왔다 들어오지 않았다"가 아니라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되야 하지 않을지...
14/08/13 17:13
실패한 나라라고 한적 없습니다 단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해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나라지요 국민들의 마인드가 열려있든지 천주교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든지간에 쇄국정책만으로도 닫힌나라로 불리기에 충분하죠 근대화에 국민들이 120%열망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예외적인 정보 몇개로 그 사실이 바뀌진 않습니다
14/08/13 17:23
일본과 비교하다보니 처음에는 상대적으로라는 의미가 점차 극단적인 것인양 되어간게 아닌가 합니다.
솔직히 조선 후기의 혼란상을 생각하면 근대화의 실패가 단순히 개화 안해서라고만 생각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고...
14/08/13 17:31
옆나라 일본 중국 베트남 비교 하면 닫힌나라였고 세계사적으로 봐도 동시대에 가장 닫힌나라였습니다.
우리한테는 이러이러한 열린면이 있다고 말하는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그건 그냥 우물안 개구리 입니다. 동시대에 다른나라하고 비교하면 답이 나옵니다. 먼나라도 필요 없습니다 같은 문화권 나라랑 비교 해봐도 조선은 당시 가장 패쇄적인 나라였습니다
14/08/13 17:33
생각보다 동도서기의 기는 모든 나라가 쉽게 받아 들이더군요. 심지어 극보수의 아프간인들도 극도로 외부 문물은 싫어하지만
대장간에서 ak를 만들 정도로 적극적... 하지만 나머지는 정말 신경 안 씁니다. 중국 같은 나라 같이 그나마 서양과 교류가 있었던 나라도 아편 전쟁 때 얼마나 현실에 어두었겠습니다. 심지어 임칙서는 국제법 책까지 공부할 정도 열렸는데도 세상 돌아가는 것과 당시 상대 역량을 그렇게 잘 알지 못했지 않습니까?
14/08/13 17:46
빠른 서양화를 할 필요가 없었죠. 당시 정권을 가지고 있던 세도가들에게는..
기술은 ok 하지만 정권을 넘보려고 하는 사문난적에게는 철퇴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서양화가 전부가 아닙니다. 기존 정권을 가지고 있던 막부를 뒤집어 업는 뜻을 이루기 위한 사쓰마번, 조슈 번을 중심으로 벌어전 정변의 결과가 (어쩌다 보니... ??) 개화를 해서 서양화를 하자.. 였던 것입니다. 즉 메이지 유신도 정변이 없었다면 개화도 없습니다. 19세기 조선도 당시 세계적인 흐름을 주변국을 통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큰 관심이 없었을 뿐이죠. 일본이 메이지 유신 시절을 보내면서 나라가 쪼개져서 내전을 벌일때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져서 나라가 둘로 쪼개져서 내란에 들어갑니다. 조선의 입장에서 개화를 하면 양놈들이 와서 깽판을 치거나, 민란이 일어나거나, 정변이 일어나거나 하겠구나.. 정도 밖에 생각할 수 가 없습니다.
14/08/13 18:11
제 의견은, 메이지유신이 개화를 하기 위해서 시작된 정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변을 하고 보니, 정변 주도한 세력이(유신3걸) 개화파더라.. 였던거지요. 메이지 유신의 계기가 된것이 에도막부가 미국, 네덜란드, 영국등과 맺은 불평등조약 맺은것에 반발해서 막부를 타도하고 덴노를 중심으로 한 왕정으로 복고하자.. 입니다. 그 막부 타도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정권을 잡은게 (우연히도) 개화파.. 였기 때문에, 서양화를 한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빠른 서양화 및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빠르게 발전했다는것도 사실입니다.
14/08/13 18:05
이런류의 논쟁에서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본이 난학을 받아들이고 일찍 서양 국가들과의 무역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 문물 수입의 질적 측면에서는 조선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부분입니다. 기술적 측면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선도 크게 저항감이 없었고 중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본이 데지마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도 정치체제는 여전히 봉건적인 막부체제 였습니다. 일본이 근대화라는 측면에서 서구 문물을 200년 넘게 받아들여 왔었으면 흑선내항 했다고 나라가 뒤집어 지지는 않았겠죠.
근대국가로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적 체제로의 방향전환유무라고 봐야 하고, 이것도 운도 따라줘서 가능했었고요.
14/08/13 18:11
그 당시 조선은 중앙집권체제였고, 일본은 봉건영주제였기 때문에 조정의 힘의 차이가 있어서, 정권을 바꾸는 게 조선보다는 용이했습니다. 비교하자면 지금의 북한이 조선이고, 남한이 일본인 셈이죠.
14/08/13 18:26
조선은 닫힌 나라가 맞지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과 달리 일본도 닫힌 나라였습니다.
일본 나가사키 무역항의 운영을 보면 조선이 왜관을 운영한 것과 흡사합니다. 철저하게 구획을 나눈 무역창구, 무역 대상의 제한, 무역량의 제한과 같은 부분들이 매우 닮았지요. 조선도 서양 국가들이 찾아오고 무역을 요구한 시기가 더 빨랐다면 비슷한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대양 항해 루트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렇게 꼼꼼히 작성한 실록이라는 기록이 있음에도 서양인과의 조우는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죠. 이런 상황에서 개방과 무역에 대한 생각을 갖는 쪽이 더 무리입니다. 전혀 필요가 없는데요. 중국이나 일본이라고 개방과 기술, 진보에 대해 뭔가 더 앞선 생각을 하고 있어서 외국과 교류한 게 아닙니다. 서양인들이 찾아왔고, 그들과의 무역이 이익이 되니까 한거죠. 조선은 애초에 누가 오질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방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쪽에서 먼저 찾아가려면 얼마나 엄청난 통찰력이 필요한 걸까요. 조선이 폐쇄적이어서 망했다라는 것은 현대에 와서 결과적으로 볼 때 가능한 주장입니다.
14/08/13 18:52
왜 그런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식근론과 그에대한 반대 주장 모두는 통상 '근대'와 '근대화'라는 현상을 '모호하게' 정의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근대라는 것이 '애매한' 개념이기도 하고, 꼭 긍정적인 물건인 것도 아니라서 ㅡㅡ; 그 진행인 근대화라는 것도 '애매'한 과정이며, '긍정적'이기만 한 과정이 아닙니다. 애초에 근대화라고 불리는 '사회변화'자체가 시공간적(지리적)편차가 크고, 그 진행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아마 불가능 할 겁니다. 더욱이 근대화가 늦었기 때문에 '식민지'가 되었다는 주장은, 다른 공동체를 능력만 되면 '침해'해도 된다는 '전제'하에 있는 주장이기도 하고요.
14/08/14 01:27
쇄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세계정세를 못따라가서 열강들에게 개발살 난 뒤에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죠. 일본이라는 훌륭한 반면교사는 전범국+패전국의 멍에를 쓰고도 그때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라는 두쪽이 났고 반백년 혹은 그 이상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쇄국을 부정적으로만 볼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나는 좀 더 배워서 이런점도 알고 저런점도 알지롱'하는거랑 똑같아보입니다.
14/08/14 06:35
제가 쓴 원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쇄국에 대해 옳다고 쓰지도 않았고, 쇄국에 대해 변호할 취지도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은 서양문명에 대해 무지했다" 이런 고정관념에 대해 버리자 라고 쓴 취지입니다.
14/08/14 08:49
[제 생각이지만 근대화를 생각할때 당시 서양의 기술과 사상을 빨리 받아들이는 나라가 성공한 국가였고
다른 나라보다 늦게 받아들인 나라는 실패한 국가라는 식의 주장은 옳지못하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단순히 서양중심적이고 서양우월주의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지도층, 기득권층만 조선인것도 아니고 한반도의 사람들이 오랜시간 고통받은걸 실패한게 아니라고 생각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어의 민감성 문제가 아니라요.
14/08/14 14:20
전범국+패전국의 멍에가 있는 나라를 보고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보여주는 것' 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칩니다. 차라리 태국을 예시로 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14/08/14 08:57
청나라도 아편전쟁에서 깨박살이 났는데 조선이 뭘 제대로 알고 있었으면 쇄국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정책이고 열강의 패권을 따라갈 방법은 개화뿐이란걸 깨달았겠죠. 기득권층이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는게 아니고 그냥 뭘 몰랐던겁니다. 테크놀러지의 파편 몇개가 전파되었다고 해서, 천주교가 전파되었다고 그게 서양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고 하는건 코끼리 코가 길대 하는 정보를 주워듣고 코끼리를 안다고 이야기 하는거랑 다를바 없는, 지나친 과장 (호의) 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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