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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5/24 05:05:22
Name 팟저
Subject [일반] <암흑의 핵심>이 사이드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은 이유
[“최근 경제사 연구들은 무역과 자본 투자, 그리고 제국운영에 소요된 비용 등을 조사한 결과 제국이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제국이 가져다 주는 상상 속의 이득과 실제로 실현된 이익 간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박지향 집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제국주의 : 신화와 현실’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열강의 제국 운영의 경제적 실효성이 상상과 현실 간 차가 상당하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운영은, 원료 생산지로서든, 잉여 상품/자본의 수출/시장으로서든 열강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석탄이나 금속과 같은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원료의 경우 유럽은 1950년대까지 대부분 유럽 간 무역에 의존했으며, 또한 열강들의 해외 무역 대상은 대개 다른 열강들이거나 아니면 독립 국가이기 마련이었다구요.

[“191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수출품의 10%만이 식민지로 향하였다. 식민지들은 인구가 너무 희박했고 시장 기능을 하기에는 너무 가난했던 것이다…… 독일 제품의 가장 큰 해외 구매자는 영국이었고 영국에게도 독일은 가장 큰 시장의 하나였으며, 프랑스도 영국과 독일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던 것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제국의 경제적 가치가 당연시되었다. 제국주의에 적대적이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조차 제국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흥미롭죠. 식민주의가 정작 열강에게 별다른 이익을 담보하지 못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경제적 가치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니요. 음, 가장 바람직한 건 해당 저서에서 식민주의가 언급된 맥락에 철저히 입각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본시 인문돌이다보니 책을 읽으며(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포스트 식민주의를 접했을 적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암흑의 핵심>이었습니다. 말론 블랜도가 나오는 <지옥의 묵시록> 원작이요.

대강 줄거리를 읊어본다면... 소설 배경은 19세기구요. 선원 말로가 상아 운반배의 선장으로 일하기 위해 처음 아프리카에 발을 디디던 때부터 시작하여 내륙의 상아 수집상 커츠에게 이르러, 다시 유럽으로 복귀하며 끝납니다. 아프리카에 도착한 말로는 식민주의의 이상과 그 현실 사이의 이물감을 느끼는데 이는 마침 ‘암흑의 핵심’에 선 커츠란 개인에게 집약되어있지요. 식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는 자로서 자신에게 도취된 그는, 심연 속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야만인들로 하여금 상아를 수송할 배를 공격할 정도로 미쳐버립니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밀림에서 죽죠. 커츠에게 강렬한 동질감을 느꼈던 말로는 임종을 지키며, 유럽으로 돌아와선 그의 사후 뒤처리까지 맡구요.

19세기 말 소설로 시대 배경과 내용 보시면 짐작하시겠지만 문학사, 문화사에 있어 ‘오리엔탈리즘’과 ‘식민주의’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전입니다. 실제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 역시 식민주의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며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상당히 중요한 맥락에서 언급하구요. 뭐, 극복하지 못한 게 한계가 되려면 최소한 그럴 깜냥은 되었단 말이니까요. 이하에 펼쳐질 이야기는 그런 깜냥이 있었음에도 극복하지 못했다는 콘래드를 위한 변입니다.

아, 들어가기 앞서 한 가지 챙길 준비물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인데요...

이놈은 또 헤겔이냐며 벌써부터 지겨우실 분들을 위해 몇 마디 변을 붙여보면,

당대에 있어서야 다른 이야기까지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날 우리가 헤겔을 읽는다고 할 때 그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아주 거칠게 말할 때, 인간이 지닌 심리의 일정한 양상일 겁니다. 이 썰이 그럴듯하게 느껴지다 못해 저처럼 그 안에서 나름의 미감까지 찾아낸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도 헤겔, 저걸 보면서도 헤겔이라며 덕지덕지 이름 붙이는 거죠. 그래도 오늘 이야기할 부분에 있어선 주가 되는 소재도 아니거니와 직접적인 인용은 최대한 피하려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더 한 가지 첨언할게요. 뭐 적어놓은 꼴을 보며 대강 짐작할 분도 계시겠지만, 이하에 제가 기재할 이야기들은 당대 모든 서구인들의 보편적인 사고 패턴에 대한 사실적 진술이 아닙니다. 그저 당시에 그러했을 것 같은 임의의 서구인에 대한 제 자의적 추상일 분이죠. 그럼에도 이 짓거리를 왜 하냐에 대한 첫째 이유는 제 개인적인 재미고, 둘째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제 개인적인 재미에 마찬가지로 흥미를 느낄법한 분들이며, 셋째는 이보단 좀 더 많을 것 같은, <암흑의 핵심>에 관심 갖는 여러 분들을 위함입니다.

그럼 잡설은 이만 그치고 그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무언지에 대해 대강, 정말 아주 대강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서로 다른 자기의식 간의 인정투쟁과 주인의 지배와 노예의 예속, 그리고 이것의 변증법적 지양 과정을 이릅니다. 헤겔에게 있어 자기의식이란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부정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데 이를 만족치 못한 자기의식이란 다만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달리 말하자면 안정적인(주인 된) 자기의식은 내 안의 또 다른 자기의식을 요구하며, 그 다른 자기의식을 투쟁을 통해 억누를 때 성립합니다. 이때 승리한 쪽이 주인, 패배한 쪽이 노예가 되는데, 주인은 노예의 노동을 통해서 자기 밖의 사물을 접하게 됩니다. 노예의 자기의식은 사물을 지양하며, 부정된 사물은 비자립성을 띄기 때문에 주인이 자신의 자립성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게 되구요. 그러나 이 도식은 불변이 아닙니다. 그럼 변증법일 리가 없죠. 주인의 소비와 노예의 노동은, 노예가 스스로의 자립성을 깨닫는 단초를 제공한하며, 그 끝에 또 다른 인정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인데요. 한편 이는 자기의식 사이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자기의식 간 빈번한 전도와 대립의 교착은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야기합니다.

알기 쉽게 많은 분들이 보셨을 <아바타>와 <디스트릭트9>이란 영화를 비교하며 사례로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식민주의(혹은 오리엔탈리즘)과 이를 벗어나려는 시도 각각을, 타자에 대한 서구의 두 가지 자기의식이라고 상정해봅시다. 디스트릭트9에선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난 자기의식은 주인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소재를 노예로 부려 주인의 자기의식을 다집니다. 영화에서 혐오스러운 외계인의 묘사는 노예의 노동으로서, 그러한 외계인을 바라보는 지구인의 경멸어린 시선을 극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죠. 한편 아바타에선 이 둘 사이의 전도를 찾아볼 수 있는데, 언뜻 보기에 디스트릭트9과 같은 도식을 따라가지만 나비족의 고귀한 여성을 얻고, 나비족이 정복하지 못한 토루크 막토 위에 오르고, 나비족의 기원에 답하지 않았던 행성의 의지 에이와를 설득하는 게 지구인인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디스트릭트9에서 나타난 노예와 주인 사이의 변증법적 지양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오리엔탈리즘은 주인이 되며, 노예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난 자기의식이 될 것이고, 지구인을 파괴적으로 묘사하고 나비족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노예의 노동이 되어, 나비족의 진수를 얻어내고 그들을 구원하는 지구인이란 오리엔탈리즘적 자기의식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할테죠.

그럼 이제 정말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실 <암흑의 핵심>을 막 읽었던 예-전에 저 혼자 보기 편하라고 마구잡이로 갈겨놓은 글이라 이것저것 들먹일 게 많았네요. 발췌는 민음사본입니다.








[“그들은 30대5의 비율로 백인보다는 수적으로 우세했으니 우리 백인들에게 덤벼들어 한바탕 잔치를 벌였을 법도 한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야…… 게다가 그 검둥이 녀석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망설여야 할 현세적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 나는 검둥이들이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과 마주 서서…… 눈부시게 바라보고 있었네.”](P.93-95)
[“아마도 자네들은…… 한 야만인에 대해서 내가 왜 그토록 섭섭해 하는지 지독히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겠지…… (그와 나 사이에)일종의 유대 관계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가 창에 찔린 후 내게 던졌던 그 친밀하고 심오한 눈초리는 마치 어떤 지고한 순간에 확인된 먼 친척 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오늘날까지 내게 생생히 남아 있어.”](P.115)
[“나는 기적을 울리는 손잡이를 당겼어. 갑판 위에서 백인들이 한바탕 즐거운 장난을 해야겠다는 태도로 소총을 끄집어내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었지…… <기적을 울리지 말아요. 그걸 울리면 저자들이 놀라서 도망간다구요.> 누군가가 갑판 위에서 불만스럽다는 듯이 소리치더군. 나는 여러 차례 계속해서 기적을 울렸지.”](P.153)

P.93-95의 인용에서 말로는 야만인들에게 낯섦을 느끼며, P.115에서 조타수의 죽음을 통해 그 야만인의 존재 및 자신과의 관계를 (재)인식하고, P.153에서 백인들이 재미삼아 그들을 죽이려는 것을 막는다. 이전까지, 손에 익은 도구마냥 의식조차 없이 대하던 것들이 낯설게 다가온 것이며, 그 부재를 계기로 자신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인식은 또한 기적을 울리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으로 드러나 (이야기 속 말로에서 이야기 밖 말로에게 이르기 위한)성찰을 보여준다.
이처럼 분명 콘래드는 피식민지 야만인을 하나의 타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폭력을 정당케 하는 제국주의의 실체를 작가가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그 종말의 당위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인데, 사이드는 이를 해당 작품의 한계라고 규정하며 콘래드를 비판한다.

[“<원주민들은 커츠가 떠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P.122)

이 부분에서부터 우리는 콘래드가 제국주의의 종말을 당위로 내세우지 않은 이유를 찾아나갈 수 있다. 먼저, 피식민지 야만인이 도리어 제국주의 지배자인 커츠의 억압을 갈구한다는 러시아인의 말이 눈에 띤다. 해당 발화가 야만인 자신의 발화가 아닌, 커츠의 추종자를 경유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독해할 때, 우리에게 쥐어지는 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굳이 해당 개념으로 해당 문장에 접근해야하는 이유를 우리는 (소설 속에 묘사된 바로는)커츠가 아니라 커츠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말로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꼬마 시절에 나는 열성적으로 지도를 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거든. 여러 시간 동안 남아메리카니, 아프리카니 또는 호주니 하는 지역을 살펴보면서 그곳을 탐험한 모든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이야기에 몰두했었어. 당시만 해도 지구상에는 많은 빈 공간이 있었다구.”](P.17)
[“왜, 있잖은가. 빛을 전달하는 밀사라고 할까…… 그녀는 <수백만에 달하는 무지한 원주민들을 그네들의 그 무시무시한 풍습으로부터 떼어내야 한다.>고 떠들었는데, 결국은 그런 말을 듣다가 보니 정말이지 내 마음이 그만 불편해지고 말더군. 그래서 나는 회사라는 곳은 무엇보다 이윤을 위해서 운영되고 있다는 암시를 해보이기도 했지.”](P.29)

P.17의 인용문과 P.29의 인용문을 나란히 할 때, 어린 시절 계몽적 탐험가로서 자기의식을 갖고 있던 말로가, 그러한 계몽적 탐험가를 말하는 숙모에게 회사의 이윤을 추구하는 사원으로서 또 다른 자기의식을 말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젊은 말로는 이 둘을 구분하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이물감마저 느끼지 않기에 둘을 자기의식이라고 말하는 건 오류가 있으나 이후 커츠를 통해서든 말로 자신의 구술을 통해서든 양자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 나타나기에 이 발제문 안에선 편의상 그리 지칭하겠다.). 그리고 다음 인용들은 서로 다른 자기의식 사이의 갈등이 암흑의 핵심 속 커츠에게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말해준다.

[“<그분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인물이지요.>……<그 고장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그분은 다른 모든 교역소에서 수집한 상아를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상아를 보내오고 있지요>……<머지 않아서 그분은 회사의 행정처에서 상당한 인물이 되실 겁니다. 회사의 윗분들이, 왜 있지 않습니까, 유럽에 있는 회사의 이사회에서 그분을 요직에 앉히려고 하지요.>”](P.42-43)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나에게 커츠 씨야말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가장 귀한 직원이며 비범한 사람이므로 회사를 위해서는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장담하더군.”](P.51)

위 두 진술은 유럽 식민회사의 상아 수집상으로서 커츠를 말해주며,

[“그러나 그의 정신 상태가 잘못된 결과 그로 하여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의식으로 끝나는 모종의 심야 무도회를 주관하게 하던 시절 이전에 그 보고서가 작성되었음에 틀림 없어.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내가 여러 경우에 듣게 된 바를 근거로 해서 추측하건대, 그 의식은 원주민들이 그에게 바치는 것이었어, 알겠는가? 커츠 씨 자신에게 바친 의식이었다구.”](P.112-113)
[“원주민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어. 커츠 씨가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원주민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원주민들에 대한 커츠의 지배적 우위는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대.”](P.132)

여기선 야만인을 억압하는 지배자로서 그들의 식인 의식도 기꺼이 치르는 커츠를 말하고 있다. 헤겔의 논리에 따라 갈 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설명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바라보는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상으로 비치는 분열적인 커츠를 그 내부에서의 서로 다른 자기의식 간 인정투쟁으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고, 그 흔적은 다음 인용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겁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했던 겁니다. 그분은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비쳤던 거지요…… 그분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이곳 생활을 싫어했다구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떠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는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있던 거예요.>”](P.128-129)
[“러시아인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더군. <동료 선원으로서...... 커츠 씨의 명성을 저해할 사실이 있음을....... 감추기 어렵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더듬더듬 중얼거리고 있었어…… <그분은 기선을 공격하면 당신네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여기며 포기하리라 생각했죠.>”](P.143)

서로 다른 자기의식 사이의 대립과 그 교착은 커츠를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으로 이끌었다. 결국 두 자기의식 간의 극단적인 대립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소멸시켜야하는 방향으로 추동되며, 식민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 자신을 끝없이 환기케 하는 식민회사의 수송선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드러난다. 유럽 세계의 뻗친 손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자기의식을 찍어 누르려 한 것인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러한 부정은 일방향에 그치지 않고

[“예외가 있었다면 그건 마지막 페이지의 밑부분에 써둔 일종의 노트였는데, 훗날 떨리는 손으로 갈겨썼음이 분명한 이 노트는 하나의 방안을 밝힌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지. 그 내용은 단순했어. 온갖 종류의 이타적 감정을 향해 감동적으로 호소하던 글이 끝나는 대목에서 그 노트는 마치 맑은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처럼 나를 향해 그 휘황하고 무서운 빛을 발하면서 <모든 야만인들을 말살하라!>고 부르짖고 있었어.”](P.113)

그 반대로도 작용했음을, 즉 야만인의 지배자로서 커츠도 부정하려 했음을 P.113 속 커츠의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자기의식의 전도 속에서 커츠는 굉장히 불안한 상태에 놓이며, 각각 전도 속에서 주인 된 자기의식은 맹렬히 상대를 몰아붙이고 그러면 노예는 굉장한 공포와 두려움의 노동 속에서 각성하여 주인과 대립한다. [“그리하여 이제 자립성을 깨우친 노예적 자기의식에 대한 재발견에 의하여 노동이 지니는 그의 고유한 의미가 살아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성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공포에 못 이겨서 사역에 종사한다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실과 또한 사물의 형성이라고 하는 이 두 계기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야한다.”](정신현상학)

[“우리 백인들은 그간 이루어놓은 발전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네들 야만인들에게는 마땅히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하느님 같은 힘을 과시하면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등등의 내용이 바로 그거야.”](P.113)
[“바로 그 순간에 커튼 뒤에서는 커츠의 깊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 <나를 구원하겠다구? 상아를 구해 내자는 뜻이겠지. 말 말라구! 나를 구원하겠다니…… 나는 아직도 내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니까. 그러므로 돌아올거요.>”](P.140)

첫 번째 인용문을 통해 우리는 둘 사이에서 그의 자기의식이 전도를 겪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식민회사의 이득 확보란 목적(주인)을 위한 수단(노예)으로서 야만인 통치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야만인의 통치자라는 자기의식이 실제 암흑의 핵심에서 야만인이란 사물을 대하면서 자립성을 깨우치고, 식민회사의 고용인이라는 자기의식을 지양해낸 것이다. 이건 P.140에서 커츠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커츠 자신이 정말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상아를 확보하여 식민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 게 아니다. 그는 위대한 이념을 말하고 있으며,

[“<하지만…… 커츠 씨는 회사에 이익을 준 것보다 더 많은 손해를 입혔다구요.>”](P.141)

이때 위대한 이념이란 이익과 무관하게 야만인들을 지배하는 것이고 그들을 계몽케 하는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지배인의 발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좋아한다구. 그건 자아 발견을 할 수 있는 기회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아는 것인데, 이 실체야말로 다른 사람들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해. 다른 사람들로서는 외양만을 볼 수 있을 뿐 그 외양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법이야.”](P. 66)

P.66에서 말로의 이야기는 상기 언급한 것들을 집약한다. 이탤릭체로 강조된 부분은 노동을 통한 변증법적 자아 발견을 말하는 동시에, 이러한 발견으로서 노동이, ‘다른 사람들’, 즉, 커츠를 기준으로 식민회사를 위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렇다면 자연히 커츠를 어찌 규정해야할지 의문이 생긴다. 앞서 언급한 부분을 좀 더 발전시켜본다면, (자본주의의 극단이란 의미의)제국주의적 식민통치의 수단으로서 식민주의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커츠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 서양보다도 약했기 때문에 동양 위를 억누른,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교의이고, 그것은 동양이 갖는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라던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에서 우선 벗어난다. 즉, 커츠가 상아수집상으로서 자신을 부정한 이상,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한 오리엔탈리즘과는 분명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식민주의란 (사이드가 강조하는 근대적인 맥락에서)오리엔탈리즘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기에 오리엔탈리즘에 회의를 품었다고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커츠가 야만인들에 대한 지배를 자신의 위대한 이념이라 칭하는 순간,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이때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그의 이념이란 것이, 그 자체로 합목적적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식민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비단 커츠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최근 경제사 연구들은 무역과 자본 투자,  제국운영에 소요된 비용 등을 조사한 결과 제국이 수지가 맞는 사업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제국이 가져다 주는 상상 속의 이득과 실제로 실현된 이익 간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로선 이러한 사실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제국의 경제적 가치가 당연시되었다. 제국주의에 적대적이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조차 제국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대 여러 서구 열강들이 식민주의를 고수했던 추동이 있었다는 진술이 될 뿐, 커츠와 당대의 식민주의를 어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한다. 식민주의는 그에 대한 득실을 고려하기 이전에 당대 서구인들에게 이미 각인되어 있었으며, 이를 다시 풀어본다면, 서구인들에게 식민주의란 그 자체로 합목적적인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암흑의 핵심 속 커츠는 그 자신의 광기로 말미암은 식민주의가 아니라 당시 서구 열강들에게 만연해 있던 식민주의란 이념을 집약한 인물이 된다.

최근의 경제사적 연구를 알았을 리 없는 콘래드지만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모호한 상이나마 식민주의의 본질을 직시했다고 난 생각한다. 그가 식민주의의 균열을 보았음은 분명하다. 당대 식민주의자들 중엔 그 효용성을 찬양한 세실 로즈와 같은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이가 탐험가 리빙스턴이고, 작품 속 주인공의 숙모가 하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도덕적 열의와 계몽적 신념에서 비롯한 식민주의는 사람들 사이에 만연했다. 익히 알만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서 식민주의의 화신 격으로 제시된 커츠가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고 나이든 말로가 배에 앉아 선원들과 화자에게 이야기를 풀어내기 전부터 커츠는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의 균열은 말로가 야만인과 느끼는 유대감이나, 그 무리를 향해 울리는 기적 소리 따위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바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커츠 자신의 신념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커츠는 식민회사의 피고용인으로서 자신과 야만인들의 지배자로서 자신의 뚜렷한 경계 사이에 서 있다. 그가 서로 다른 자기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야만인을 계몽시키겠다는 위대한 이념을 상정한다고 해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유럽에는 그를 기다리는 약혼녀가 있고, 그를 대중적 정치인이나 사내 고위직에 배치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이들을 물리치고 그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해도, [“<참으로 그들에게 이익이 될 그 어떤 자질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무한정하게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커츠의 말은 강력한 동질감을 느끼는 말로에게조차 [“경멸할 정도로 유치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가 상정한 식민주의의 위대한 이념은 유럽에서 설 자리가 없다. 반대로 실제로 커츠가 시도한 대로 야만인 사이에 남아 유럽과 결별하고자 한다면 그는 다만 야만인 몇몇을 거느린 족장이 될 뿐, 그들을 근대적으로 계몽시킬 방법은 없어진다. 때문에 커츠의 위대한 이념은 다만 커츠 자신만이 바라볼 수 있는 공상 속에서 그 찬란한 휘황을 내뿜을 따름이다. 그야말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인, 자기만의 미적인 향유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콘래드는 커츠를 죽여야만한다. 암흑의 핵심 속에서 커츠는 자기의식과 자기의식의 인정 투쟁 중에서, 자신의 위대한 이념을 상정해가는 변증법적 지양 과정에서, 식민주의의 틀을 깨버렸기 때문이다. 세실 로즈와 같은 이들이 말하는 식민주의와, 당대의 탐험가 리빙스턴이나 소설 속 주인공의 숙모가 말하는 이상적인 식민주의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현격하다. 그리고 커츠는 이 모두를 포괄하는 인물이며, 둘 사이의 극심한 이질성은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대립과, 극단적인 인정투쟁과, 극단적인 지배와 예속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근대적 유럽인의 시각에서 견딜 수 없는 야만인을 말살하라는 커츠와, 전근대의 극치인 식인 의식을 기꺼이 향유하는 커츠의 공존이 비롯된다. 이 둘 모두를 지양하는 방법은 식민주의의 화신인 커츠가 식민주의의 틀을 깨는 방법 밖에 없다. 사이드의 바람대로. 하지만 콘래드는 가장 활발한 식민주의를 펼쳤던 영국인인 커츠가, 식민통치가 가장 활발히 벌어졌던 아프리카, 암흑의 핵심 속에서 식민주의를 벗어날 무언가를 상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아니, 가능했냐, 가능하지 않았냐, 콘래드가 그리 생각했냐,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PC는 잠시 접어두자. 정말 중요한 건 콘래드가 그려낸 건 가능치 않은 커츠란 사실이고, 이쪽이 당대의 식민주의를 집약하기 훨씬 더 적합하단 것이다. 지배자로서의 커츠건, 이방인으로서의 커츠건 모두 식민주의에서 비롯한다. 식민주의자가 식민지에서 바라보는 야만인은, 억압적 지배나 계몽적 선도의 대상이 될 순 있어도, 식민주의를 지양해줄 무언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커츠는 말로에게 죽기 전 자신의 위대한 이념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가 떠드는 위대한 이념이 지시하는 방향을 소설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극단적으로 다른 두 자기의식을 지양한 듯 말하는 커츠지만, 정작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커츠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에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커츠에게 각각 자신이 바라는 상을 투사한다. 식민회사 최고의 상아 수집상을, 위대한 사상가를, 대중적 정치인을, 훌륭한 음악가를, 죽기 직전 약혼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로맨티스트를,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할 신의 사도를……. 사람들이 커츠에 대해 하는 말들은 커츠를 설화적 인물로 만들며 그의 실체는 굉장히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를 거칠게 추상한다면 스스로 상정한 믿음에 자신을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이념적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커츠는 암흑의 핵심 속에서 이념의 불꽃으로 야만인이 아닌 스스로만 부단히 비춘 것이다. 마치(란 표현이 적절할진 모르겠지만) 콘래드가 커츠를 주목할 수밖에 없던 것처럼.

시간이 흐른 후 탬즈 강 위에서 고대 로마의 식민지였을 런던을 굽어보는 말로의 시선은, 분명 식민주의의 균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잡이의 죽음을 한숨으로 토로하는 말로는, 식민주의 바깥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말로는, 말로를 써내려가는 콘래드는 전자를 주목했을 뿐이다. 당대를 살아가는 이로서, 당대(정확히는 헤겔)의 논리에 따라, 그 시대가 낳은 체제에 균열이 가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소재의 희소성으로 보나 저자가 서 있는 지점으로 보나 <암흑의 핵심>은 그야말로 콘래드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었다. 구체화되지 않은 이념 속에서도 지시하는 바는 분명히 보이며 앞서 언급한 수많은 맥락과 함께 놓일 때, 이 소설은 다른 방식으론 되풀이되기 어려운 고유한 울림을 갖는다.

그리고 이것이 콘래드가 사이드가 말했던 비극적 한계([“콘래드의 비극적 한계는, 설령 그가 어떤 차원에서는 제국주의를 본질적으로 순수한 지배였고 땅뺏기였다고 명확하게 인식했다고 해도, 거기서 ‘원주민’이 유럽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도록 제국주의는 끝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점이다.”])를 넘어서지 못한 이유이며, 넘어서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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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주룩주룩
14/05/24 10:07
수정 아이콘
영문학 비평시간에 배웠던 작품인데
배울 당시엔 재미 없다고 원성이 자자했던 그 작품이네요
저는 정신분석 조에 속했었는데, 아무래도 작품 특성상 제국주의분석조에 가장 인원이 많이 몰렸었던 기억이 나네요!
요정 칼괴기
14/05/24 10:24
수정 아이콘
조셉 콘래드의 대단함이겠죠. 사실 1870년대 부터 시작된 식민주의적 열정은 흔히 설명되는 경제적 이익 때문이 분명 아니었으니까요.

세실 로즈조차도 이런 부분에서 부차적이고 엄밀히 말해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고양, 이를 통한 대공황으로 시작된 민심 수습,
대중에 낭만적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식민주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세계에 문명을 전파는 영국(혹은 프랑스, 독일), 대부분이 쓸모 없는 땅이지만 지도의 영토 색깔을 보면서 느낄 뿌듯함.
경쟁자를 이기고 어떤 땅에 붉은색, 혹은 푸른색, 회색을 칠하는 스포츠적 열정 같은거 말이죠.

여기에서 국가 주의를 삭제하고 나면 도대체 뭘하고자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유럽인들만 남을 테니 말이죠.
endogeneity
14/05/24 11:52
수정 아이콘
주인 - 노예
유럽 - 아프리카
본국 식민회사 - 피용자 커츠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그저 암시만 된 '야만인의 지배자 커츠 - 그를 섬기는 야만인'
이 작품이 커츠가 겪었던 자의식의 전도과정이 야만인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데까지 나가지 못했다는 점이
'사이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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