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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3 02:29
빨려들어갈 필요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경계할 필요도 못느낍니다. 말씀하신대로 민주주의의 해악과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성은 상식 안에서도 인정되는 거니까요. 그건 절대 나쁜게 아니고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중용을 이루어야 하는 겁니다.
14/05/13 03:06
'중용'으로 끝날 걸 양쪽이 뻔히 아는 대립은 사실 요식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사회의 평화는 '대립하는 와중에' 이뤄졌다기보단, 오히려 대립이 시작하기도 전에 도래해버린 것이죠. 반대로 이 대립이 진퉁이라 '중용'으로 끝날 보장 같은게 없는 경우, 그 끝이 어떻게 날지는 다른 요인에 토대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페리 앤더슨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런 식의 언급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롤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목표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확고하게 자리잡은 확신과 전통에 내재적인 정치적, 사회적 정의라는 개념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을 할 때 요점은 우리의 최근 정치사에 있는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 그러니까 기본적인 사회제도들이 시민과 인격의 자유와 평등에 순응하려면 그 제도들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동의가 없다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지이다.' 현대 국가가 서술대로 민주적인 확신과 전통이 깊다면 그 시민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 드리워진 교착상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롤스가 빠져있는 이 패러독스는, 본문에서 그저 '상식'이라고만 표현했던 주류적 전통(로크나 밀, 매디슨 같은 사람들이 포함될) 전체에게 소급시킬 수도 있는 패러독스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제에 대해 별로 속편하게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14/05/13 03:06
좋은 글이네요. 아, 좀 편안한 마음으로 잘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커뮤니티는 PGR뿐이라서 여기에 여러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만 저는 엘리트주의, 혹은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개념쌍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였다면 아마도 저 주제만 붙들고 살지 않았을까 (물론 돈벌기 위한 프로젝트는 해야만 했겠지만) 생각합니다. 학계에 있지 않은 지금도 여전히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사회의 모든 문제는 결국 파고들어가다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번역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편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아닌 무언가에서 인간이 된 사람들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열등한 저들과 우월한 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정당한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실제로 동일한 재생산 과정을 거쳐 생산된 동등한 대중이라는 존재는 인류의 역사를 펼쳐놓고 봤을때 극히 짧은 시간동안 존재했을 따름이니까요. 그마저도 다양한 방식으로 도전받고 있는 상황이고 말입니다. 사실 명칭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 같지만 무어라 이름하던 간에 '아래로부터의 아노미'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에 대한 감수성이 핵심적인 경계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기에 많은 수사들이 첨가가 되지요. 요새 사회 지도층들은 '감정적인'이라는 수사 붙이기를 참 좋아하시더라구요. 돼지처럼 울부짖었다던가,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미개하게 행동한다던가... 생각해보면 이제사 사회지도층들은 소위 근대적 이성과 합리성에 익숙해졌는데 대중들은 탈근대적인 감정에 충실하기 따위를 힐링으로 소비하고 있으니 참으로 압축성장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좋은 생각 좋은 책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사이 서구 좌파의 거장들이 한분씩 한분씩 운명을 달리 하시는 걸 보면서 묘한 감상에 젖곤 합니다. 그네들의 시대가 성공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자기 시대를 충실히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항상 묘한 울림을 주는 거 같아요. 시간은 늘 무심하고 말입니다.
14/05/13 03:41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인가' '인간과 세계는 어떤 관계인가' 같습니다. 그 점에서만큼은 레오 스트라우스가 옳은 것 같습니다. 설령 이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본 결과가 '인간은 우주의 먼지일 뿐이다' '인간과 다른 인간은 그저 먹고 먹히는 관계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세계와 맺는 관계같은 건 없다' 일지언정, 해도 없이 망망대해를 헤매듯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에선 언급을 안했지만, 사실 하이에크를 제한 나머지 3명에게 영감을 준 한명의 사상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시민사회와 질서의 기원을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찾았죠. 아마도 '공포', 최소한 '막연한 불안'이 보수의 기반을 이루는 근본 감정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꽤 많은 진보 성향의 사람들이 여기까진 생각을 해보고, 그 다음에 '결국 보수 지지층은 뭐 취향은 존중해줘야겠지만서도 다 비합리적 쫄보다'라는 식의 결론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내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불안과 떨림으로부터 자유로운가요? 인간의 밑바닥은 결국 불안의 바다인 것은 아닐까요? 전 이것도 잘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오늘은 편히 잠자기 틀렸습니다.
14/05/13 03:55
저는 덕분에 편히 잘 수 있게 됐습니다. 냐하하하...;;;
말씀해주신 것처럼 저는 개인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름하는 경계선은 불안과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보수주의자에 대한, 정확히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심리 분석에 관한 책의 서평을 올리면서 그렇게 정리를 했었죠. 그리고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경계선은 '더 가자'와 '일단 좀 다져놓고 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우리나라에서는 큰 의미 없는 이름 붙이기기는 합니다만^^; 어떨까요? 요 근래 제가 봤던 흥미로운 글은 호모 사피엔스의 돌아이성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https://ppt21.com../pb/pb.php?id=freedom&no=50999) 불안을 이기는 돌아이정신이 있는 사람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흥미로운 생각거리네요.
14/05/13 04:53
음.. 뭔가 자꾸 딴지 거는 느낌이지만.. 오해는 말아주세요.. 이론적으론 저도 글쓴분의 의견에 99%동의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역시 글쓴분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들 또한 불안하다] - 이것이 좌파의 한계라고.. 결국 논리로 우파를 비웃어 봤자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거죠..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이런 문제로 글쓴분처럼 괴로워하고 잠 못들고 할겁니다.. 이것이 현실과 팽팽하게 맞서는 힘이고.. 그래서 그것이 중용을 이끌어 낸다면 이건 뻔해보여도 뻔한게 아니고 요식행위는 더더욱 아닌 것이죠..
14/05/13 14:40
불안의 '유형', '인식', '대응' 세가지 모두에서 개인차가 있고, 이 개인차는 생각보다 큽니다.
인간의 밑바닥에 위치한 부분은 사실 다른 '생물'들과 공유하는 영역이라, '불안'으로 지칭되는 어떤 '반응기제'를 포함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 표출은 다른종류의 '기제'들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니까요. 즉 애초에 그 '불안'이라는 것이 개인마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더 크게느끼며, 더 중시하는데 비해, 다른사람들은 불안을 덜 느끼며, 덜 중시하죠.
14/05/13 17:08
결국 '불안의 문제는 정도의 문제다' 라는 취지로 읽힙니다.
사실 이 댓글에서 '불안'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의 의미는,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상가들이 생각했을 법 한 '존재론적 불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여러 심리기제중 하나라든가, 개인차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는 애초에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죠.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 경우에 '불안'이라는 건 결국 인간욕망과 자연자원 간의 함수관계의 한 종류일 따름이고, 그렇다면 엄밀하게 말하면 '불안의 문제'라는 건 잊어버려도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거나 자연을 다스리거나의 문제이니까요. 사실 이 부분은, 많은 점에서 닮은 홉스와 로크가 날카롭게 갈라서는 지점입니다. 홉스는 다른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출발했지만, 로크는 사유재산의 발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홉스의 정치학이 심리학을 전제로 한다면, 로크의 정치학은 경제학을 전제로 합니다. 둘 다 결국 인간, 특히 '개인'의 욕망을 다루는 한 방법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 기본적인 입장 차이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직면한 문제는 결국 '다른 인간'인건가? 아니면 '자연'인건가? 이런 점을 보면 어떤 사람은 불안을 더 크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작게 느낀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14/05/13 21:39
존재론적인 '불안' 자체가 특정한 '불안'에 대한 해석이며,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불안의 문제가 정도의 문제 라는것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개념 자체에 사람마다 부여하는 맥락이 다를 수 있고, 이 맥락 각각은 그 사람이 타고난 사고도구들의 동작과 '삶의 경험'을 통해 구성해낸 서로다른 '기초'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불안의 '차이'는 이 맥락의 '차이'를 간접관찰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요.
14/05/14 14:19
'해석', '부여', '구성해낸 기초'. 거기에 윗 댓글에서 언급된 '불안에 대한 인식과 대응'까지.
이런 것이 바로 '인간 이해'의 한 예입니다.(좀더 첨언하면 로크와 칸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인간이해로 읽힙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일정한 관점입니다. 사실 그 점을 상기시키는게 이 글 및 댓글들의 목적이고, 딱 거기까지만 의의를 찾습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이다'까지 나갈 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14/05/14 18:08
음 사실 저같은 경우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로크와 칸트사이(혹은 다른 부분)을 떠도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있고, 그중 일부와 친숙함을 가지지만 항상 만족할만한(완벽한 것이 아니라) 설명력을 찾거나 만들어내는일에는 실패하고 있지요. 공부를 할때마다 모르는것만 늘어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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