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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5/11 16:57:20
Name 쌈등마잉
Subject [일반] [에세이] 심심하기 (<피로사회>를 읽는 중에)
<심심하기>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32쪽. 강조는 인용자)

저는 성공한 자영업자의 아들입니다. 남들 잘 때 깨어 일을 시작했고 남들 쉴 때 한 번 더 뛰셨죠. 시대적 흐름도 부모님을 응원했겠지만, 그 수고의 강도는 더 없이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도 이것이죠.

“잠은 잘수록 늘기 마련이다.”

부모님의 수면시간은 여간해서는 5시간을 넘기지 않았고, 저에게 지속적으로 했던 훈육은 이같은 성격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영향 아래서, 그리고 자기계발에의 강요라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서 및 고전 잠언집들을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잠시라도 그냥 허비되는 시간이 생기게 되면 무엇을 해서든 그 공백을 메워야만 안도가 되곤 했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 만족감과 실망감을 결정하는 잣대도 공백의 시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제거했느냐에 달렸었지요. 저는 이러한 성실한 숨죽이기가 창의를 낳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속된 건 오히려 소비였고 창의는 자기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언젠가 작가 박민규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창작의 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심심함’을 답했습니다. 저는 놀랐고, 어이없었고, 무책임한 성의없음을 판결했습니다. 지금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깊은 심심함’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타인들의 세계를 강박적으로 학습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창의가 발생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의 세계를 나의 세계가 어떻게 조작하여 흡수하고 갱신의 계기로 삼는가가 아는가 합니다. 심심함의 강박으로 타인의 세계를 삼키기만해서는 자신의 이름이 모호해지는 경향성을 막을 길이 없죠. 심심함을 견디고 나의 세계에 침잠된 이름들을 건져내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고 싶습니다.



소비의 자리만큼이나 생산의 자리에 가보길 원합니다.
기도 소리를 뒤로, 느닷없이 부모님은 혀를 차며 방문합니다.
“뭐하고 있냐?”
(이럴 때 부모님의 얼굴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꿈에서 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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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들도들
14/05/11 17:3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쌈등마잉
14/05/14 23:38
수정 아이콘
네!
김연우
14/05/11 18:06
수정 아이콘
쌈등마잉님 글을 읽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조적인 일은 재미있게 할때에 제일 좋은 결과를 내는데, 심심하면 심심할수록 '평소에는 재미없었던 일'들이 재미있어지지요. 이게 바로 좋은 방법 중 하나라구요.
물론 일을 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는 경우, 1을 투입하면 1이, 10을 투입하면 10이 나오는 결과라면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공장 돌리는데, 즐겁게 돌린다고 해서 8시간에 물건 8개 나올게 10개 나오진 않으니까요.

세상이 변해가는건가, 싶습니다.
쌈등마잉
14/05/14 23:39
수정 아이콘
그렇긴 하죠.
캐터필러
14/05/11 18:26
수정 아이콘
잡스만큼의 심심함을부여한들 잡스만큼의 성과를 내는자는 극소수,다수는폭망
자영업에 성실함을더하면 대개는 먹고산다는것이 부모세대의 경험칙

심심함을통해 최소 자기부모만큼의 성과를 낸다고 자신할자 또한 극소수일듯
쌈등마잉
14/05/14 23:42
수정 아이콘
그렇겠죠. 사실, 한병철이 '깊은 심심함'을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상실된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니까요. 잡스의 성과는 창의성의 한 발로일 뿐, 꼭 그걸 이룰 필요는 없겠죠. 성실해야 깊은 심심함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하니깐요.
달콤한삼류인생
14/05/11 18:48
수정 아이콘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움직이는 삶의 동력은 자기애와 권태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몇백년전에 권태에서 벗어날려고 하는 욕망이 삶의 원동력이라 이야기 했고...
초기 철학과 과학의 발전은 먹고 살만한 귀족층이나 종교계에서 나왔고 인간이 인간다워진 것은 동물과 같이 생존에 안 매달려도 된 다음 찾아온 권태에서 뭔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서 비롯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생존이 확보된 다음에는 권태가 찾아오죠. 그 권태에서 오는 사색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거죠.
그 권태의 과정중에 변수를 줄여 판단을 해서 행동으로 최대한 빨리 치고 나오는 사람도 있고 무작정 변수를 늘려 행동하지 않고 자기의 성에 갇히는 경우도 생기고 권태도 인생전체에서 찾아오는 큰 권태도 있고 바쁜 와중에 잔잔하게 오는 권태도 있죠.

권태라는 것을 잘 이용하면 자기내부에서 오는 욕망을 잘 이해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이때의 욕망은 잘 살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기내부의 소리라는 거라고 표현해야 되겠죠.
쌈등마잉
14/05/14 23:48
수정 아이콘
권태를 무엇으로 해소할 것인가도 중요한 숙제인듯해요. 돌이켜 보면 그동안 무언가를 사는 것(소비)으로 풀었던 듯 한데, 깊은 심심함을 통해 좀 더 주체적인 무언가를 잡아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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