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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17 19:35:21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고료는 부조로 넣어두게- 교지관악편집위원회의 종간에.
고료는 부조로 넣어두게 - 교지관악편집위원회 종간에.

죽음에 대한 추도사를 청탁받는다는 건 기쁜 일일까 슬픈 일일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인 건 명확하다. 죽음은 역시 멀리 있는 것이 좋다. 물론 죽음이라는 녀석이 밀어낸다고 밀려날 친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지난 주였나, 두어 개의 유쾌한 술자리가 잡힌 어느 날, 불쾌한 일이라고는 조지 오웰의 책을 신발가게에 두고 온 것 밖에 없었던 어느 날, 전화를 통해 죽음을 하나 건네받았다. 그렇게 교지관악편집위원회의 교지 <관악>의 종간호에 실릴 원고청탁요청이 왔다. 며칠 미뤄 두었다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마음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귀찮은 마음으로 오늘 쓴다. 연세편집위원회 전 편집장, 이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름으로.

한 문장으로 기분을 요약한다면 이런 느낌이다. 오랜 동지가 힘겨운 암투병 생활을 잘 버티다가, 머리도 빠지고 이도 빠지고 힘도 빠졌지만 어쨌건 그런대로 암을 극복해냈는데, 어이쿠 이런 그만 차에 치어 뒈져버렸네. 이렇게 긴 한 문장은 반칙인가.

허나 당신이 죽는 것도 반칙이다.

오랜 동지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신 교지관악편집위원회는 연세편집위원회의 가장 강고한 동지 중 하나였다. 우리는 2002년에 다른 언론단체와 함께 대학언론연대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창립총회였던가, 굉장히 무의미한 논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언론연대는 4천만 남한 민중을 위한 무엇이어야 하는가, 7천만 반도 민중을 위한 무엇이어야 하는가. 벼락이 치는 날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무의미한 것들이나 마법적인 것들은 이리도 쉽게 기억된다.

04년인가, 일군의 연세대 학생들이 기습적이고 전투적인 교육투쟁 활동을 전개했고, 연세편집위원회는 이를 지지하는 광고를 게재하며 연대투쟁했다. 그전부터 연세편집위원회의 편집기조를 탐탁치 않아하던 연세대학교 당국은 이것과 다른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편집위원회의 편집권에 개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05년인가 06년인가, 학교 당국은 매우 구체적으로 편집권 개입의 플랜을 밝혔고, 편집위원회는 수많은 학내 단체와 타 캠퍼스 편집실과 연대했다. 내 무의미한 기억이 정확하다면, 교지관악편집위원회는 가장 강고한 연대를 보여주었다. 수많은 연대 세력들과 함께 한 첫 회의에서, 연세대학교 학생처 담당자는 우리의 기세에 당황하며 ‘아. 저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라며 편집권 개입을 포기했다. 그렇게 연세편집위원회의 투쟁은 승리하였고, 함께한 오랜 동지는 이제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나는 추도사를 쓴다.

2000년대 초반의 학생 사회는 일종의 암투병 생활 같은 무엇이었다. 무수한 동아리가, 학생 사회가, 학내 언론이 암을 견디지 못하고 사멸했다. 나의 학생 사회는 건강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생은 고기처럼 질겼다. 꽤 많은 우리는 죽었으나 꽤 많은 우리는 살아남았다. 꽤 많은 것들이 새로이 태어났고. 교지관악은 그렇게 2000년대 초반을 버텨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머리도 빠지고, 이도 빠지고, 힘도 빠졌지만 그렇게 힘든 세월에 살아남았으니, 이제 더 살겠지 했는데 이게 뭔가. 뜬금없는 종간이라니. 제기랄. 하.

언젠가 교지관악편집위원회의 편집장이 썼던 문장을 하나 빌려본다. ‘우리는 십만 년 전의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10년 전의 대학 축제가 어땠는지, 대학 사회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10년 전의 연세편집위원회 편집권 투쟁의 역사는 겨우 내 무의미한 기억에나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금번의 장례식에 초대받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교지관악, 에 대하여 기억하지도 추억하지도 않을 것이다. 안녕, 기록되지 않을 죽음이여. 당신의 삶은 역사가 아니었고, 당신의 뒈짐은 그저 개죽음일 뿐이라네. 안녕. 동지여. 고료는 부조로 넣어두게. 줄 돈도 줄 생각도 없었겠지만.


언젠가 함께 깃발을 들었던, 연세편집위원회의 무수한 전 편집장 중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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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無嶋
13/12/17 19:37
수정 아이콘
R.I.P
市民 OUTIS
13/12/17 19:47
수정 아이콘
대학시절 모 대학 교지에 몸 담았던 사람으로서.... 씁쓸하군요. 그때는 서울대는 단대 교지까지 받고 싶었는데...
항즐이
13/12/17 20:01
수정 아이콘
관악이? 관악이!

... 하, 이것 참.
치탄다 에루
13/12/17 20:08
수정 아이콘
관악이요? 정말요?!
삼공파일
13/12/17 20:13
수정 아이콘
10만 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20년 전, 30년 전은 기억하지만, 10년 전만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개죽음이라니 정말 맥을 꿰뚫는 표현이네요. 있지도 않았던 부조 받고 좋은 곳으로 떠나길 명복을 빕니다.
왜때문에그래
13/12/17 20:16
수정 아이콘
종간이라.. 올핸가 작년부터 등록금과 잡부가 한 명세서에 청구되던게 불공정거래인가로 걸려서 잡부금은 자율경비로 선택해서 내고있죠. 그 결과 연세지비, 연세춘추비(애널스 와이비에스 포함) 납부 선택을 안하는 학생이 많아서 광고 싣고 했는데, 아직까지는 버틸만 한 것 같습니다. 광고도 싣고 하니까요. 저는 상대 교지에 몸담았었는데, 운영비를 상경 경영대로부터 배당받아서 그리 힘들지 않게 임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컨텐츠 부재도 그렇고 출판비 조달도 힘들고 대학언론이 죽어가네요.
치탄다 에루
13/12/17 20:19
수정 아이콘
혹시 그 기성회비 관련...이 그거였나요?
왜때문에그래
13/12/17 20:37
수정 아이콘
기성회비 관련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등록금과 등록금 외의 비용 학생회비, 교지비, 의료공제비 등은 자율선택으로 바뀌었고, 이와 더불어 기숙사비용도 거주비와 식권을 포함해서 청구하던게 따로 청구하도록 시정명령이 있어, 변경되었습니다.
치탄다 에루
13/12/17 20:38
수정 아이콘
호오... 그랬군요. 학교랑 잠깐 멀어졌다보니(....) 이런일이 있었군요.
왜때문에그래
13/12/17 20:41
수정 아이콘
위의 시정명령의 결과는 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회비든 교지든 뭐든 반토막 이하로 뚝 떨어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삼공파일
13/12/17 20:20
수정 아이콘
본문에 써 있는 것처럼 시한부 선고는 진작에 받고 담담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단계죠. 당연한 죽음이지만, 죽는 건 슬프고 당황스럽고 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별 일 아닌 그런 거니까요.
감모여재
13/12/17 20:31
수정 아이콘
관악을 왜...?
市民 OUTIS
13/12/17 20:34
수정 아이콘
우리 때, 우리 학교는 등록금과 자치회비를 따로 걷었지만, 자치회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사실상 등록금을 접수하지 못해서 학생들의 교비지원은 사실상 강제였죠. 또 그전에 70년대 학생회는 아마도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테지만, 학군단(rotc)이 총학을 대신 했죠. 그리고 그 학군단에서 교지도 만들었었고... 그래서 학생자치운동을 벌여서 지금의 자치적 총학생회가 됐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 학교는, 총학에서 교지편집실이 따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건 nl-pd 대립과도 연계되었는데...피디계열 선배들이 총학의 nl계열에서 독립하기 위해 싸웠는데... 우리 때는 운동의 방편으로 교지가 있었던 게 사실이어서 스스로도 반성을 많이 했었는데... 교비지원이 끊기는 문제는 상상도 못하는 거네요. 많이 힘들었겠군요. 흠...
삼공파일
13/12/17 20:47
수정 아이콘
추측하건데, 지원이 끊기는 문제가 아니라 대(?)가 끊기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왜때문에그래
13/12/17 20:56
수정 아이콘
학보사들은 학생들이 지원을 많이해서 자기소개서도 받고, 면접도 보는데 교지들은 대를 잇는 것이 쉽지가 않더군요. 저희도 몇년째 신입생이 안들어오고, 노령화된 복학생들이나 고학번(?)들이 졸업직전에 들어와서 글쓰고 도망가는 지라.. 곧 망할 것이란 말을 쭈욱 해오고 있지만 근근히 버티고 있습니다.
삼공파일
13/12/17 21:18
수정 아이콘
아마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겠죠.
13/12/17 21:05
수정 아이콘
대학 분위기 자체가 동아리활동 오래 하기 힘든 쪽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학보사들은 그나마 언론사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이 들어가는 편인데, 교지는 딱히 스펙에 도움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밴드나 연극동아리처럼 활동 자체가 재밌지도 않으니 뭐. 그나마 과거엔 (학보사=대학소속=보수적)vs(교지=자치언론=진보적) 정도의 프레임이 있어서 적당히 나눠먹기라도 했었는데 요즘은 학보사들도 거진 어느정도씩 다 진보적이라 경쟁력도 없고요.
삼공파일
13/12/17 21:16
수정 아이콘
그렇다기보다도 원래 학보사는 학내 이슈, 교지는 사회 이슈로 분야가 다르죠. 한 때 학내 이슈가 그 어떤 이슈보다도 사회적이었을 때가 있었고, 점차 분리되면서 MB 때 쯤에 이르러서는 총학과 함께 학보사에서도 보수화가 일어났고 지금은 총학도 학보사도 양극화가 심해졌고요.

학생 운동이 위기를 맞이하면서, 당연하게도 대학생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말해주던 교지 역시 쓸 말도 없고 존재의 이유도 사라진 셈이죠.
13/12/17 21:27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쓸 말이 없어진 게 가장 중요합니다. 쓸 말이 없다는 건 1)쓸 내용이 없다 2)굳이 교지에 쓸 필요가 없다의 두 가지 의미고요. 대부분의 대학 교지는 사회과학서적(80년대)->정치 팸플릿(90년대)->한겨레21 하위호환(00년대) 테크트리를 탔는데 이 세 번째 시기가 학생운동의 소멸 시기와 일치하고, 동시에 인터넷의 대중 보급 시점과도 일치합니다. 종이 매체 같은 거 돈들이고 공들여서 만들 이유가 별로 없죠. 힘들게 교지 만들어서 오천 부 뽑아봐야 대부분은 시간때우기+라면받침으로 쓰일 게 뻔한데, 피지알만 해도 적당히 공들여 글 쓰면 조회수 오천은 금방이니까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데 이걸 지속할 동인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13/12/17 22:59
수정 아이콘
10년전에도 교지 쓰려는 사람이 없어서 학교 신문사 애들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나네요. 제 생각에도 대가 끊기는 문제 같습니다.

그래도 나름 한국 최고학교 교지인데...안타깝네요.
13/12/17 21:31
수정 아이콘
그래도 대학신문에 자긍심 가지던 친구가 기억나네요.
지금뭐하고있니
13/12/17 21:33
수정 아이콘
교지 관악이 끝나는 건가요??
아...
13/12/17 21:55
수정 아이콘
성대도 학내언론이 학교랑 배틀중인데 관악이라...관악...
ilo움움
13/12/17 23:58
수정 아이콘
죽지마 바보야
13/12/18 00:13
수정 아이콘
허...... 뭔가 허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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