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학창 시절 통틀어 좌절을 안겨주었던 말들 중 하나입니다.
아마 가장 많이 들었을 때는 조례 때였던 거 같네요.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례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이었죠.
초등학교 때 그 집중력 부족한 애들이 어떻게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냈겠습니까. 열중쉬어 자세로 어찌됐든 지루함을 달랠 방법을 열심히 찾았죠. 발로 모래흙을 모으거나 발자국 그림을 찍거나 주변 친구랑 몰래 얘기하거나. 어찌됐건 그런 식으로 지루함을 조금씩 달래고 이제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 들어갈 수 있겠다는 희망에 빠져있을 무렵 그 희망을 산산조각내는 한마디.
"에...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아마 그렇게 간신히 훈화 말씀시간이 끝나고 마지막에 교가부를 때 목소리가 처음 애국가 부를 때보다 크게 들린다고 느껴지는 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그리고 단체로 육상선수라도 빙의 된듯 교실로 뛰어가는 아이들...더 있으면 교장선생님이 붙잡을 거 같다고 느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한번은 그렇게 들어가는 아이들에게 밀려서 넘어져 짓밟힌 적이 있습니다. 무릎만 깨져서 다행이었죠.)
하지만 제게 조례시간 한 번만 더의 위력을 알려준 건 초등학교 중학교 때의 운동장 조례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어지간한 조례는 방송으로 했지만 뭔 행사가 있을 때는 체육관 강당에서 조례를 했죠. 그리고 내빈이 오시면 교장선생님 훈화가 끝나고 내빈이 말씀하시곤 했는데 한번은 그 내빈분이 저희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으셨던 듯했습니다. 한마디 더, 한마디 더 몇번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문에 저는 그저 서있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쥐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의 위력은 조례시간에서만 나타나지 않았죠. 수련회때나 혹은 체육시간 PT 체조나 토끼 뜀뛰기를 할 때, 아이들이 이제 지쳐가기 시작할 무렵 이런 말이 나오죠.
"자,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마지막에는 구령 안 붙이고(왜 하나 둘 셋 하나 하나 둘 셋 둘 이런 식으로 구령붙여가며 체조하잖아요.)."
하지만 꼭 한명씩은 마지막에 외치는 사람이 있었고 마지막에 소리 안 날 때까지 그 '한 번 더'를 계속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의 위력을 처음으로 뼛 속 깊이 새기게 해줬던 때가 따로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운동회를 준비할 때였죠. 저희 학년은 소찬휘 씨의 tears에 맞춰 무용을 하기로 했고(선생님들이 결정하셨겠죠), 그에 맞춰 연습을 했습니다.
초가을 오후 햇볕은 여름 때의 것 못지 않게 따가웠고 저희는 연습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지쳐갔습니다. 목구멍으로 피냄새가 올라오더라구요. 어린 저는 그런 느낌이 처음이라 제가 뭔 큰 병에 걸린 줄 알고 걱정했었죠.
저희들은 점점 독기에 차서 연습했습니다. '이 정도까지 하는데 이젠 좀 집에 보내주죠?' 이런 느낌으로요. 그러다가 소찬휘 씨의 고음에 맞춰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무렵 강단에서 시범을 보이던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고 마칩시다."
그래서 저희는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는 일념으로 죽어라 무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나고 난 후.
"음...한 번 만 더."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라는 가사가 12,3살 짜리 소년 소녀들에게 그렇게 절절하게 박히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한 1년 정도 tears를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들으면 그 때의 고생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라서요.(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이야 들을 수는 있지만 들으면 아직도 그 잔인한 한 마디가 떠오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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