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에서 장료와 이전, 악진에게 철저하게 두들겨 맞은 손권은 유수구로 철수합니다. 장료와 이전이 손권의 중군을 말 그대로 패 두들기고 중군의 대장기까지 적장에게 내주고 거기다 대장은 인근의 무덤으로 도망가기까지 했죠. 10만의 적군을 8백명의 기병과 보병 결사대로 뚫어냈고, 포위당한 병력까지 구해가면서요. 오군의 피해는 장수 2명과 중군의 병사 수십 정도의 경미한 피해였죠. 그러나 장료와 이전(참 의아한게, 이전 역시도 장료와 같이 손권군을 두들겼고, 조조나 조비 역시 계속 이를 언급하는데 주로 장료만 언급되죠. 왜지?)이 적에게 압도적인 공포를 주는 바람에 이후의 합비성 공략을 저지하고 이후 퇴각하는 오군의 뒤를 후려쳤죠. 손권이 진교를 건너 도망가도록 여몽,감녕,능통,반장,서성 등의 오의 맹장들이 겨우겨우 장료를 저지했다는 점은...거기다 능통은 자신의 정예 300이 전멸당하고 자신은 큰 상처를 입었고, 여몽과 서성 역시 부상, 반장의 경우 탈주병들을 죽이면서 겨우겨우 병사들의 붕괴를 막는 정도였죠.
이제 조조 입장에서는 한중 평정에 나선 사이에 일격을 먹이려던 손권에게 갚아줘야죠. Give&Take 랄까요?
파군의 이민족 수령인 박호, 호족인 두호, 한중의 지배자였던 장로가 항복해오자 박호는 파동, 두호를 파서태수에 임명하고 그 둘과 장로의 다섯 아들까지 전부 열후로 봉한 뒤, 남정에는 하후연을, 파중에는 장합을 남겨 유비의 침입에 대비케 하고 업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헌제는 조조를 위왕에 봉했고, 조조의 딸을 공주로 삼고 탕목읍을 식읍으로 주죠. 조조는 북방의 대군 오환과 남흉노 선우 호주천등이 복종함을 표하면서 북방이 안정되자 받은 것을 갚아주러 가게 됩니다.
8월 승상 대리였던 종요를 상국으로 임명해 내정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10월까지 조련하던 군사를 데리고 남진해 11월에 남방사령부인 초현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217년 2월 유수구를 목표로 진격하여 학계현에 진채를 설치하고 유수구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장료군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은 오군의 문제는 위군에 가진 공포심을 씻어내는 일. 손권은 감녕을 전부 선봉으로 삼고 적의 진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감녕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쌀과 술, 푸짐한 안주를 하사해 병사들에게 내려 사기를 올리게 합니다. 감녕은 결사대 1백을 뽑아 부하들을 푸짐히 먹입니다. 그리고 결사대를 모은 자리에서 자신이 은 술잔에 거푸 두잔을 마시고 결사대를 따를 장수 하나에게 가득 채운 잔을 줍니다. 그러나 도독은 잔을 받지 않죠.
감녕 : 너 손권님한테 인정받았다고는 해도 너 누구랑 군생활 오래할거 같냐? 야, 난 까라고 해서 까는데 넌 까라고 해도 안까냐?
감녕은 칼을 뽑아 결사대에게 호통을 치자, 결사대는 감녕의 잔을 받아 마십니다.
(감녕 흥패, 무법자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지만, 엄정함과 어른을 우대하는 행동은 여몽과의 관계에서도 많이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이경 무렵, 매를 물고 조조의 진영으로 접근합니다. 강표전에 따르면 조조는 아군을 보병과 기병을 합쳐 40만이라고 말하죠. 그러나 실제로 40만은 아니고 약 15~20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런 대군이 도사린 진채로 다가간 감녕과 결사대 1백은 위군의 진채를 넘어 들어가 수십명을 죽여 위군에 자중지란을 일으킵니다. 위군은 서둘러 북을 치고 불을 밝혔지만 이미 감녕과 1백 결사대는 임무를 마치고 유유히 아군 진영으로 돌아와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불렀죠. 손권은 감녕을 불러들입니다.
손권 : 조조 늙은이를 너무 놀래킨거 아니야? 난 오로지 감 장군의 담력만 지켜봤소이다.
그리고 그에게 비단 1천필과 칼 1백 자루를 하사하면서 또 큰소리를 탕탕 칩니다.
손권 : 맹덕에게 장료가 있으나 나에겐 흥패가 있으니 맞짱 떠볼만 하지!
이 기록은 215년의 합비전투 이전의 1차 유수구 전투때라고 나오지만, 장료가 운운되는것을 보니 2차 유수구전투로 봐야할듯 합니다. 당시 손권은 장료가 누군지도 몰랐죠.
이렇게 선빵을 날렸지만 손권은 손권대로 병력 우위의 조조를 칠 엄두가 나지도 않았고, 조조는 조조대로 강력한 유수구의 방어력에 공격할 수도 없었죠. 만일 여기에서 또 패하면 어찌 될지 몰랐죠. 보복의 기치를 걸고 남진해오긴 했지만 일단 졌을 경우엔 적벽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어서 조조나 손권이나 노려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 유수구 전투 때 폭풍이 불어와 동습이 익사하고 서성역시 조조군에 포위당했다가 겨우 뚫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험이 있는 손권은 먼저 치고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방어로 일관하다 역습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손권은 먼저 숙이고 들어갑니다. 도위 서상을 파견해 조조와 화평을 맺은 것이죠. 그리고 조조는 화의에 동의하고 하후돈을 학계에, 조인은 번성에, 장료는 합비에 남겨 손권을 막도록 하고 다시 업으로 돌아갑니다.
손권은 여몽을 하구로 보내고 공석이 된 유수독의 자리에 주태를 임명합니다. 주태가 유수독이 되고 주연과 서성은 주태 아래로 소속되었는데 주연과 서성은 주태의 출신이 한미하다고 업신여기죠. 실제로 주태는 주로 손권의 경호대장 역할을 자주했었죠. 이러한 소식을 들은 손권은 특별감찰을 나와 성에서 연회를 엽니다. 그 자리에서 주태를 불러올리죠. 그리고 장수들에게 직접 술을 따라줍니다. 그 차례가 주태 앞으로 오자, 손권은 특별히 주태에게 옷을 벗도록 하고 주태의 몸에 있는 상처자국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어디서 입은 상처인지 묻습니다.
이미 이전에도 손책 아래로 들어갔을때, 손권은 주태를 자신에게 달라고 형에게 부탁했고, 주태는 손권 아래로 들어간 이후 선성에서 적의 습격에 손권을 지키려다가 칼과 화살에 심하게 다쳤죠.
주태는 손권의 물음에 옛 전투의 여러장소를 기억하여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손권은 주태에게 다시 의관을 정제하게 합니다.
손권 : 유평(주태의 자), 경이 내 형을 위해 싸울때는 곰과 범같으며, 자신을 아끼지 않아 상처자국이 수십곳이며 입고다닌 갑옷은 그림을 새긴것가 같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경을 골육의 은혜로 대하여 병마의 중임을 맡기려 하오. 나는 경과 영화와 오욕을 같이하여, 기쁨과 근심을 같이할 것이오. 유평은 흔쾌히 이를 하고, 한미한 가문이라 하여 스스로 물러나지 마시오
그리고 자기가 쓰던 어책(머리쓰개)와 푸른 비단 일산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해 노숙이 사망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손권은 애도를 표하며 장례식에 참석했고, 제갈량 역시 애도를 표합니다.
(노숙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친촉파(라 쓰고 용유파라고 읽지만)의 거두이자 대도독이었던 노숙이 사망하자, 그 후임은 유수구의 방어책임자로서 조조를 막는데 큰 공을 세웠던 여몽을 한창태수에 배수하고 하준,유양,한창,주릉을 식읍으로 줍니다. 그리고 노숙 휘하의 1만 여명의 병마가 모두 여몽에게 귀속됩니다.
그리고 전임자 노숙과는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촉과 형주를 오가 집어삼켜야 한다는 의미였죠. 그리고 지리한 형주 영유권 문제에 대한 외교전에 진절머리를 낸 손권 역시 이러한 여몽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러나 형주에는 여몽이나 다른 오의 장수들이 함부로 맞설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신(武神),신장(神將). 조조가 평생토록 자신의 아래로 넣고 싶어했고, 가장 두려워했던 장군.
그리고 당시에 어느 누구도 맞서길 두려워했던 사람.
그렇습니다. 관우(關羽)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