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당시 공군에는 단 한 기의 전투기도 폭격기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폭탄을 들고 타서 손으로 떨어뜨리거나 바주카포를 쏘거나 하는 수준이었죠.
미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한국에 와서 전투기 원조문제를 의논합니다. 그는 F-51을 훈련 없이 탈 수 있는 인원을 물었고, 겨우 10명이라는 답을 들었죠. 이들로 전세를 바꾸거나 할 순 없었지만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6일 급히 10명이 선정돼 일본으로 향합니다.
이들은 하필 5일 동안 비가 내리면서 제대로 훈련도 못 해보고 30분씩 비행을 해 본 다음 바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한편 딘 헤스 소령은 공군을 훈련시키는 부대를 맡게 됩니다. Bout-1,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한판 승부라는 뜻이었습니다. 뭐 그래봐야 미군은 크게 신경써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럴 여유도 없긴 했죠. 한국 공군을 키워주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더 힘을 모아서 직접 북한 공군을 상대하는 게 나았으니까요.
그와는 별개로 미 공군은 개전 즉시 작전을 시작합니다. 당시 미 극동공군은 44개 편대 675기의 항공기와 3만 3천여명의 장병을 보유하고 있었죠.
대표적으로 F-51 머스탱 불꽃의 연금전폭기와
미 공군이 최초로 채택한 제트전투기 F-80 슈팅스타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투입하려 했으나 그 전에 전투가 끝나버렸죠. 보시다시피 마지막 프로펠러기와 최초의 제트기가 공존하는, 세대가 바뀌는 때였습니다.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리고 명불허전 초공요새 B-29도 있었죠.
하지만 한국 지형에 숙달돼 있지도 않고 작전 협조도 제대로 준비돼 있지 않았으며, 전선의 상황이 극히 유동적이었습니다. 거기다 역시 명중률이 좋을 때가 아니었죠. 한강의 다리를 파괴하는데만 엄청난 소티(출격 횟수)를 써야 했고, 인천상륙작전에서 46개의 표적을 파괴하기 위해 1주일간 3257개의 소티를 써야 될 정도였습니다. 아군은 물론 민간인에 대한 오폭도 너무 잦았죠.
이후 작전권을 합친 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고, 겨우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봐야 오폭은 잦았지만요. 아무튼 이렇게 북한 공군은 순식간에 전멸, 하늘은 UN군의 차지가 됩니다. 이들은 38선 이북까지 작전을 하며 북한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고, 북한 자체에도 큰 타격을 줬죠. 계속되는 작전으로 평양에는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압록강 이북으로는 가지 말라는 확실한 제한이 있었고, 북한을 상대하는데는 그나마 나았지만 중공군 개입 이후 이게 큰 문제가 됩니다.
그 동안 국군 공군은 7월 3일부터 작전을 개시합니다. 이 날이 조종사의 날로 지정됐죠. 첫 날 작전은 무리 없이 진행됐지만 다음 날에는 이근석 대령이 첫 전사자로 기록됩니다. 이후 전선이 밀림에 따라 대구에서 진해로 가게 됐고, 미군은 한국 공군을 따로둬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느껴 미 공군에 흡수하려 했습니다.
이를 막은 것이 헤스였습니다. 대신 그는 바우트원 대대원들과 함께 국군 공군과 함께 행동합니다. 당연히 국제법 위반이었죠. 해체 소식을 들은 공군이 육군에 재입대해 싸우겠다고 맞섰고, 그에 감명받아서 한 것이라고 회고합니다.
그와 함께 유명한 것이 그의 애기인 신념의 조인기입니다.
이 때 그가 원한 건 라틴어 Per Fidem Volo였죠. 영어로는 I fly by faith였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이를 번역해서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나온 말이 바로 신념의 조인(鳥人)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 정도 번역이 한계였겠죠. 하긴 지금은 번역할 필요 없이 멋지다고 영어나 라틴어를 그대로 그릴 것 같습니다만.
이승만이 딘 헤스에게 감사하며 직접 지어줬다는 설도 있지만 헤스는 그의 회고에서 자기가 직접 부탁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얘기가 있는데, 서울 수복 후 영등포에 있을 때, 간판 그리는 집에 부탁해서 그린 거라고 합니다. 이후 평양 미림기지로 갔을 때 반대편에도 그려달라고 했는데, 거기에서는 똑같은 글자체로 할 수 없다고 해서 좌우에 다른 글자체를 가진 신념의 조인기가 탄생했죠. 이후 그을음 때문에 더러워지자 흰색으로 배경을 만들었습니다. 총 세가지 버전이 있는 셈이죠.
이렇게 공군의 산파 역할을 했던 헤스는 1년 후 돌아갑니다. 1.4 후퇴 때는 천여명의 전쟁 고아를 제주도로 피난시키기도 했죠. 이후 그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영화가 나왔는데 Battle Hymn, 전송가입니다. 이 영화와 자서전의 수익금을 모두 한국의 전쟁 고아를 위해 썼다고 합니다.
이후 신념의 조인기는 최초로 100회 출격을 한 걸로 유명한 김두만 대위가 몰게 됩니다. 헌데 51년 8월 21일에 다른 비행기가 착륙 중 기체를 긁어버렸고, 살리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 (고증이 맞지도 않는 -.-;) 복제품이죠. 어쨌든 여러모로 빨간 마후라와 함께 공군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그 동안 공군은 조금씩이나마 성장, 20기 정도의 머스탱을 몰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에겐 제대로 된 작전명령 없이 그냥 필요할 때 부르는 정도의 임무만 맡겨졌을 뿐이었죠. 공군이 계획하에 단독작전을 벌일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51년 9월 1일이 돼서야 공군의 작전운용능력이 인정받았고, 1개월 정도의 준비로 제 10전투비행전대가 창설됩니다. 최초의 독립 전투비행단이었죠.
미그 15였죠. 거의 쓰이지 않은 MIG-9에 이어 소련이 두번째로 채택한 제트 전투기였습니다. 10월 23~4일부터 만주에서 발진한 적과 공중전이 벌어집니다. 중공군이 소련에게서 받은 것도 많았지만, 실제 소련군이 중공군인 척 탄 것도 있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이를 비밀로 했고, UN군 역시 알면서도 확전을 피하기 위해 무시합니다.
처음에는 프로펠러기인 머스탱도 이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조종사의 기량 역시 중요했고, 중공군의 경우 이게 약했으니까요. 하지만 곧 성능에서 머스탱은 물론 F-80 슈팅스타보다도 강하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를 상대하기 위해 약속된 승리의 전투기 (...) F-86 세이버가 본격적으로 투입됩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중전이 벌어졌고, 결과는 나름 놀라웠습니다. 거의 10:1 수준의 격추비를 올렸거든요.
세이버의 경우도 초기에는 성능면에서 달렸다고 합니다. 이를 넘은 건 역시 기량 차이였죠. 소련군이야 잘 싸웠지만 역시 다수는 중공군이었으니까요. 거기다 초기형도 조준기의 경우 성능이 더 좋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면 성능 면에서도 압도할 수 있게 됐구요.
하지만 현재에는 격추 비율 역시 너무 과장됐다는 평을 받습니다. 만주까지 추적할 수 없었고, 격추했다고 기록된 적은 대부분 살아 돌아갔거든요. 적도 아군을 기만하기 위해 격추된 척 했구요. 애초에 제트기의 시대가 막 열렸고, 기관총 정도로는 완전히 격추하기 힘들 때였습니다. 실제론 2.3:1 정도로 보죠
어찌됐든 공중우세야 여전했지만, 마음놓고 하늘을 날기 힘들어져 갔습니다. 공중에서도 그렇고 지상에서도 강력한 대공포화가 강해져 갔거든요. 특히 적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다녀야 했죠.
거기다 중공군은 특이한 전술도 보여줍니다. 밤에 갑작스레 폭격을 가해오는 것이었죠. 헌데 적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레이더로도 부족했고, 소리도 작았으며,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었죠. 이것으로 꾸준히 피해가 누적됩니다.
그 주인공은 PO-2, 이들이 저공비행을 하면서 폭격을 가해온 것이었습니다. 별명은 강냉이 (...) 별명답게 이 싸구려 폭격기가 세이버의 강냉이를 털어버립니다. ( - -); 한 방에 세이버 5기를 잃기도 했죠.
중공군은 아예 폭격 예고까지 하면서 폭격을 해 왔지만, 아군은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천천히 왔고, 소리도 작아서 발견하기도 힘들었으며, 아군의 전투기는 너무 빨랐거든요. 제트기 대신 프로펠러기들을 동원했지만 이들도 너무 저공비행을 하다 사고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해병대가 쓰던 커세어를 다시 데리고 와서야 좀 나았죠. 하지만 다 막을 순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승만의 숙소에서 불과 300m 떨어진 곳을 폭격하기도 했고, 인천항을 공격해 석유 20만리터를 한 큐에 날리기도 했습니다.
참 역발상이랄까요. -_-a 이걸 만든 소련도 독일군에게 이런 기습을 가해 '밤의 마녀'라 불렸고, 베트남전에서도 그 유명한 안둘이가 미군의 잠을 방해했죠.
괜히 군대에서 안둘안둘 하는 게 아닌 겁니다. '-')
미 극동공군은 전쟁 동안 무려 1466기나 되는 항공기를 잃습니다. 그 외의 UN군에게서도 152기를, 미 해병대에서는 368기를 잃어 총 피해는 1986대에 달하죠. 이 중 945기는 사고로, 1041기는 전투 중 격추됩니다. 공중전에서 잃은 수가 147기였고 대공포 등 지상화기에 잃은 수가 816기, 기타 78기 등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