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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14 18:41
<b>길이가 너무 긴가 봅니다. 댓글로 이어서 씁니다 </b>
하지만 이런 급진적 ‘좌빨’ 주의는 현대 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상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권 교회는 이런 이야기들을 ‘개인적 청빈’ 에 대한 권장 정도로 축소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는 탄압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강력한 권력 집단이 되었고, 사회 제도에 대한 급진주의적 접근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워렌 버핏이니 빌 게이츠가 개인 자격으로 기부할 때에는 다들 침이 마르게 칭찬하다가, 그들이 부유층 증세를 주장하니까 빨갱이라고 욕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요) 물론 급진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나쁜 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꽤 보수적인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저렇게 욕도 많이 먹지만 결국 자선 단체들의 대부분이 종교 단체들의 후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니 말입니다. 다만, 기독교회의 초기 정신은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포함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초기 기독교의 정신과 현대 기독교의 개인적 청빈에 대한 강조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도는 사실로 보입니다. Gary Wills 는 현대 교회가 좌빨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예를 두 가지 드는데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노동 사제단’ 이나 20세기 후반의 남미 ‘바닥 공동체’ 각각 교황 피오 12세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폐쇄된 것이 그것입니다. <b>종교인이 아닌 예수</b>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말들을 하나하나 인용하기에는 공간이 모자라니, 그 모든 말들을 요약한 Gary Wills 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예배의 식에 있어 정결 예식, 희생제, 형식적인 기도와 규범, 안식일과 식사 규례, 성직자, 성전 등의 모든 형식주의를 반대했다.’ ‘그는 이런 외형적인 것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근본적인 마음의 정화를 요구했다’ 실제로 신약 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제사장이라는 직함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제자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12 사도에 등장하는 사도라는 말의 어원은 사절 같은 개념에 가깝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이라는 개념이지, 성직자/제사장 등의 개념이 아니지요. 예수는 꽤 노골적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백성 위에 군림해선 안 된다’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지 말라’ 라고 말했습니다. 초기 교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바울과 베드로는 그 뜻을 이어받아서 교회의 지도 그룹에 대해서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 사도,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 장로 등의 호칭을 사용했지, 종교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제사장이라는 호칭은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Marcus Borg 는 여기에 더욱 추가하여 예수는 사후 천국/지옥의 교리를 설파하러 온 것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일단 <b>구약 성경에서는 내세의 개념 자체가 아예 없고!!!</b> (다니엘 서에서 아주 짧게 언급이 나오긴 하지만, 문맥이 일반적인 내세와는 좀 다릅니다), 예수 탄생 직전 즈음에 이르러서야 유대교 성직자들 간에 내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자 그렇다면 신이 아브라함부터 모세를 거쳐 최소한 1500년, 최대한 수천 년의 이스라엘 역사 동안에는 사후 세계의 존재를 유대인들에게 숨겼다가 예수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짜잔~!! 하고 가르쳐주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까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면, 예수 역시 천국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을 뿐, 그 천국이 사후 세계라고 확언해준 것은 별로 없습니다 (난 니가 이쁜 여자를 만날 거라고 했지 니가 그 여자랑 사귈 거라고 하진 않았다?). 한국어 성경에서 천국에 해당하는 단어인 Heaven 은 성경에서 굉장히 여러 가지 문맥에서 등장하는데, 그 중 대부분은 잘 보면 인간 영혼이 사후에 가는 좋은 곳(?) 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 기도문에 등장하는 Our Father in heaven 의 heaven 은 신의 영역을 의미하고, Kingdom of heaven 에서의 heaven 은 신과 동의어입니다. 물론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이 기독교 교리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천당 불신지옥’ 의 프레임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위에 적었던 대속 개념의 등장과 더불어서 11세기부터입니다.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여기까지는 Gary Wills 의 입장, 이후는 Marcus Borg 의 입장)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러 온 것도 아니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도 아니라면 예수는 도대체 무엇을 하러 온 것이었을까요? 예수는 일견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남겼는데, 이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지녔던 의미들을 추적함으로써 Borg 는 예수의 이야기가 당시로써는 굉장히 일관된 메시지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 현세의 지배자들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말고 애초에 너희에게 삶을 준 절대자가 너희에게 원하는 삶을 살아라. 절대자에게 돌아가라 (고대어의 회개/repent 는 어원이 귀향/return). ‘신과 이웃을 사랑해라. 이것이 모든 율법의 정신이다’ –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며 정의롭게 사는 것이다. ‘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빚을 용서해주소서’ 라고 기도해라. – 신이 바라는 정의롭고 사랑하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 이루어지소서. 죄/불완전함/혹은 문자 그대로의 경제적인 빚 등으로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할 테니 우리의 죄/불완전함 등을 용서해주소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 Borg 는 이 말을 정말로 예수가 했다기보다는 해당 구절을 적은 요한의 상징적인 창작물로 봅니다. 그리고 Borg 가 추정하는 요한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의 삶을 (이정도로 정의와 사랑에 대한 노골적인 갈망을 드러낸 사람도 드물지요) 통해서 신에게 이르는 길과 진리, 그리고 진실로 충실한 삶을 볼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이미 신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 이미 신의 뜻대로 정의롭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신의 나라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 신이 바라는 그런 세상이 언제 이루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Borg 는 현대어의 believe (믿다) 와 faith (신앙) 에 해당하는 성경의 단어가 당대의 유대 사회에서는 belove (사랑하다) 와 be faithful to (~에게 충실하다) 의 의미로 사용되었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체계 자체 역시 예수가 요구했던 신앙이 아니었음을 지적합니다. 이 밖에도 의미가 변화된 단어들이 제법 있는데,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성경의 몇몇 유명한 문장들을 다시 써보면: 나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신을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나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성령을 사랑합니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메시아여 자비를 베푸소서. -> 신이시여 나와 공감해주소서. 메시아여 나와 공감해주소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저로서는 사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라는 말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말도 드문데, 믿고 안 믿고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말은 '키가 180 넘으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와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말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천국 갑니다', 조금 더 풀어서 쓰면 '이러저러한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당신이 사랑하고 따른다면 당신의 삶은 신이 원하는 삶에 접근하게 됩니다.' 라는 뜻이 된다면 얘기가 많이 다르지요. 꼭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해볼 여지는 주어지게 됩니다. 결국 Borg 는, 예수가 하려 했던 일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참혹하게 나뉘어있던 당시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사랑하되,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평등과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기를 바랐고, 그런 세상을 폭력 없이 이루기를 바랐으며, 그 꿈을 위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도 강렬한 메시지를 그의 사도들에게 남겼으며, 12명의 사도 중 (가롯 유다가 빠진 후에 신규 멤버를 한 명 충원했지요) 11 명이 순교할 정도로 그의 후계자들은 예수의 뜻을 오롯이 따랐습니다. 저는 여전히 부활을 믿지 않기에, 예수 사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초기 기독교 운동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이후 그의 오랜 친구였던 Samuel Kyles 목사가 추도회에서 남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b>You can kill a dreamer but you can’t kill the dream. Dream lives on, dream lives on. 비록 꿈꾸는 자는 죽일 수 있지만 꿈은 죽일 수 없습니다. 꿈은 계속 이어지며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b> 참고 문헌 – Gary Wills, What Jesus meant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Gary Wills, What Paul meant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Marcus Borg, Reading the bible again, for the first time Marcus Borg, Speaking Christian
12/08/14 19:22
우와.... 대단한 글입니다
과문한 저로서는 신선한 기독교 해석이기도 하구요 막연하게 "예수님"이 이런저런 분이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는데.... 그런 바램이 망상이 아니니 반갑기도 합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한번 더 읽어야 겠습니다
12/08/14 19:35
어차피 종교적 신앙이야 개인 내부의 절대적 영역입니다만, 종교적 제도로 왔을 때는 사회의 한 부분이니 그와 같이 절대적일 수 없고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쌓임에 따라 그 내포와 외연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고 어떠한 절대적인 모습을 고수하려 하였다면, 이렇게 긴 세월동안 그렇게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요. 또 예수의 존재는 지극히 오래전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그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정도이니 실제 예수의 모습을 밟는다는 것도 추정이긴 합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사실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것처럼 성경 혹은 기독교에서의 예수도 이미 긴 기독교의 역사를 거친 지금에서는 어떠한 상징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상징이 의미하는 바 역시 시대에 따라 변천하여 온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시각은 지극히 근본적인 시각의 기독교와는 배치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고로 저는 불교도입니다) 저는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시각만 버린다면 반대로 이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지금의 교리와 다른 모습에 대한 고찰은 현재의 기독교의 주류적 가르침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도 더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는 재료이자 자양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의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12/08/14 22:19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게리 윌스 책은 번역되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글을 읽고 생각나는데로 적어보면,
== 요한계시록과 공포마케팅.. 완전 공감합니다. ==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주교 뿐만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처음부터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고 보완되고 구축되어 왔다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초기 기독교 삼위일체 정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교부들도 있으나 나중에 이단으로 정죄 받기도 하고... 사실 삼위일체라는 거 자체가 예수 이후 기독교의 최대 성과죠. 결국 기독교 교리란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렇고, 안셀무스나 아퀴나스도 그렇고, 이런 학자 집단에 의해 오랫동안 정립되어 온 교리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기독교 교리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이 있었다라고 믿는 거고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냥 이런 식으로 정립되어 왔다고 생각하면 될 듯.. == 출애굽기에서 야곱이 자기 식솔 70여명을 이끌고 애굽으로 갔을 때는 유대인이라는 민족 개념 자체가 없었죠. 400년 후 탈출할 때 그들은 거의 이집트인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종교나 풍습이 다 이집트인들의 그것을 따르고 있었죠.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신의 언약을 기억해내고 민족의 정체성을 정립한 인물이 모세입니다. 구약에는 이 언약을 기억해내는 게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를 되찾는 장면, 유다왕국 말기의 요시야왕이 잃어버린 두루마기를 찾아 언약을 기억하는 장면 등 구약의 중요한 인물들은 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신과의 언약 중요시 여깁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는데 결국 이 언약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던 것이죠. 글에서 적으신 것처럼 신이 주셨다는 유대공동체의 율법은 지금 봐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빨갱이적(?)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보수 목사들이 보기에 상당히 불손한 사상일 겁니다. 가장 소외되기 쉬운 고아와 과부를 굶어죽지 않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땅을 공평하게 나누며, 심지어 구약에는 딸들이 땅을 상속받는 장면도 나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의 신분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인상적이죠. 율법에는 도피성을 만들어 고의가 아니라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몸을 피신할 수 있게 하는 제도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굶지 않게 추수 때 네 모퉁이를 남겨놓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전쟁 때는 적 여자를 강간하지 말라거나 남편이 아내를 불륜으로 몰아세울 때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가장 압권은 희년 제도인데 7x7년의 다음 해, 즉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고 빚을 탕감해주고 땅을 돌려주게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년 때까지만 버티면 자기 선조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돌려받을 수 있고 다시 새출발하게 되는 거죠. 절대로 빈곤이 되물림되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물론 희년이 제대로 실행된 적은 없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분열되고 북쪽 이스라엘왕국보다 더 북쪽으로부터 다른 민족의 신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성경에서 보여주는 게 아합과 이세벨이죠.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 왕은 엣바알 왕과 사돈을 맺고 엣바알의 딸 이세발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결혼합니다. 아합은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악한왕인데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사건이 가장 상징적입니다. 아합이 별장을 짓는다고 나봇에게 포도원 땅을 팔라고 하는데 나봇이 선조들의 유업이라고 거절하자 그냥 죽이고 빼앗은 겁니다. 어찌보면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유대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죠. 이후 유대공동체도 여느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부가 부를 낳고 빈곤이 빈곤을 낳는 사회로 전락해 버립니다. 어쩌면 희년제도는 유대공동체의 이상향이고 그 이상향 자체를 무너뜨린 거겠죠.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토지공개념이고 이게 현대적으로 개조되어서 종합부동산세로 우리나라에 잠시 도입된 적이 있는 개념입니다. 간단히 말해 토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회공동체원들에게 땅에 대한 사용료를 내라는 겁니다. 그래서 토지세를 매기게 된 것이고 아파트가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토지세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 같아 건물에 대한 세금까지 보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합토지세가 아니라 종합부동산세가 된 것이죠. == 예수가 사역 초창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라고 외칠 때,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성경이고 마가,누가복음은 이방인 대상으로 쓴 성경이죠. 즉,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천당, 극락의 개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천국이라고 하면 옥황상제가 계시는 저 하늘을 의미하죠.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천국은 현실에서의 유대왕국의 재건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천국이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이방인들에게 이 단어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마가,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나라라고 했다는게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 영화 '아고라'를 보면 초창기 그 영향력이 날로날로 커져가는 기독교와 헬라 전통 종교와의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파라볼라노는 기독교 초창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어려운 이웃,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돌보던 성자들의 집단을 의미하는데 영화에서는 이 파라볼라노들이 점점 종교 세력의 홍위병이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결론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2천년동안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끊임없이 수정, 보완해왔고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 토론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상당히 재밌고 흥미로운 문화이며 일정부분 받아들일만한 구석도 있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이건 어떻게 믿느냐, 근거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키르케고르가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죠. 그냥 믿든지 말든지, 선택의 문제입니다.
12/08/15 06:48
사랑과 정의, 평등 같은 내용은 사실 기독교에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수있는 보편적인 사상입니다.
저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인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대속" 개념이라고 봤는데 초기 기독교에선 대속 개념이 교리에 있지 아니었다는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군요.
12/08/17 00:44
정독했습니다.
이런 수준 높은 글을 이해하기 편하게 읽을 수 있다니 행복하네요. 토론도 잘 봤습니다. 종교가 없는 제 입장에서는 OrBef 님의 입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네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기독교의 교리도 '이러한 과정이 있었구나' 싶기도 하구요. 신이 존재한다면 대자연... 우주... 자체가 아닐까 생각하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저도 기독교 자체의 그런 힘과 선동력에는 흥미가 있어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런 멋진 글을 읽게 되었네요. '기독교는 잘 모르겠고 예수는 므쪄'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종교에 관해서라면 어설픈 지식으로는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게 정답이더라구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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