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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06 00:53:00
Name 토스희망봉사
Subject [일반] 만약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 수군을 맡았다면
많은 사람들의 임진왜란 이야기 중에서 난중일기가 제일 유명하지만 사실 가장 자세하고 전쟁의 상황이 잘 기록된 것은
유성룡의 "징비록"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징비란 잘못을 반성 한다는 뜻으로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잘못을 후세가
반복 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남긴 통렬한 자신과 조선에 대한 비판서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제 의견은 이순이 장군이 경상도 수군을 맡았다면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 입니다

징비록에 따르면 유성룡은 제승방략 체재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으며, 전쟁 반발 약 1년전에 진관체제로의
전환을 촉구 하지만 김수등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유성룡이 제승방략의 문제점으로 생각한것은 주요 방어에 중요한 지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 단위 병력이
집결하는 방식은 기동 방어이기 때문에 지형의 이점을 살리기 힘들고
소규모 병력을 막을수는 있으나 대규모 병력을 상대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전략 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국사에서 제승방략이 대규모 병력을 막기에 유리했다고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르죠

여기서 눈시bb 글에 자주 등장하는 임란대비를 정말 열심히 하셨던 경상감사 김수님이 등장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김수는 백성을 부역해 동원해 얼마나 열심히 성을 증축하고 내지에 성을 지었던지 전쟁전에 죽겠다는 상소가 빗발치죠

경상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게한것으로 보아 왜란에 대한 대비는 분명 최소한의 정도로는 있었습니다
문제는 김수의 성 짓는 방식에 있는데 김수는 전형적인 일열심히 하는데 잘못된 방향으로만 자꾸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한민족의 고유의 농성전은 산성으로 모두 들어가고 주변의 우물과 식량을 모두 없에 버리고 농성에 들어 가는것이고
이는 전국시대 일본에서도 천혜의 이점을 가진 산성을 쌓습니다 수성의 이점이 많기 때문이죠
왜성의 경구 입구 성문을 미로 처럼 지어서 적이 성 내부로 침입 하더라도 사방에서 협공해 물리치게 설계되어 있으며
성을 2중 3중 겹겹이 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성과 자성을 만들어 서로 지원군을 파견해 응원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성벽 위에는 나무등으로 만든 방벽을 세우고 구멍을 뚫어 조총을 방어 하면서 공격을 할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천혜의 자연요새를 가장 중시 합니다 반드시 성뒤에 강을 끼게 만들어 4면이 포위 되는것을 막아
수군이 포함 되야만 4면을 공격할수 있는 요지를 주로 성의 위치로 삼지요

물런 당시 조선의 축성 기술로 이정도 방어는 되지 않더라도 아쉽지만 무방하지요 권율 장군이 독소산성, 행주산성에서 막은것과 진주성에서 훌륭히 수성을 해낸 사례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징비록에서도 문경세재에서 왜군을 막지 못한것을 두고 두고 아쉬워 하지요

각설하고 김수는 왜란이 일어 나더라도 기존의 해적들이 좀더 큰 규모로 들어올 것으로 판단했던것 같습니다
행정과 거주의 기능을 갖춘 읍성에 넓게 성을 쌓는 실수를 범합니다 바로 평야에다가 그냥 성을 쌓은 것입니다
당시 식자들은 산성이 아니라 평야에 높지도 않은 성을 쌓고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수만 있게 지어 정작 왜군이 오면
막을수가 없을것이다 라는 말도 있었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대규모의 해적이 왔을때나 수성이 가능하지 본격적인 왜군의 침략에는 그냥 쓰잘떼기 없이 성쌓느라
고생만 시킨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성을 쌓는다면 방어가 용이한 산성에 쌓았어야 했지요 김수는 남강을 끼고 있는 진주성에서 외성을 쌓게 하는데
이 외성이 평지에 있어 오히려 산성의 장점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진주성은 원래 언덕에 쌓아서 산성 보다는
방어가 용이 하지 않은데 1차전대 잘막은 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정발이 성문을 굳게 걸고 항전 하지만 부산진성이 약 5~6시간만에 점령 당하고 송상헌이 지키는 동래 산성은 약 2시간만에
점령 당합니다 특히 동래성은 송상헌이 해자를 파고 병사를 단련시키는등 많은 대비를 했지만 오히려 부산 진성 보다
더 쉽게 점령 당하고 맙니다
동래성의 경우 성이 넓어 지킬곳이 많았고 평지에 있어 일본군이 정면에서 일제히 사격하면서 공격해 오면 몸을 지킬곳을 찾기 힘든
조선군은 납작 업드려 피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틈에 병력이 빈 다른쪽 문을 향해 재빨리 타고 넘어와 손쉽게 함락당하고 만것이지요
송상헌은 두꺼운 통나무 방패를 준비 했으나 조총을 막지는 못했던것으로 기록 됩니다
4면이 탁 트힌 평지에 공경당하기 좋은곳에 성을 쌓았으니 수성을 하면 10~14배의 병력도 막을수 있다는
잇점도 무용하게 되어 버린 것이죠

유성룡의 신의 두수라고 평가할만한 이순신과 권률 둘중 한명이라도 경상도에 있었다면 조선을 그때 망하지 않았을까 생각 합니다
동래성이 무너진 마당에 제아무리 이순신 장군이라도 초반 병력을 요격할수 있더라도 육군이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오랜기간 전투를 지속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전라도에는 염초밭과 각종 보급이 준비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시간에 기습 작전으로 각성과 주요항들이 점령당한 상황에서는
일본군의 2군 3군의 육상 진입은 막을수 있어도 그 이후를 장담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 합니다
1군 고니시의 병력은 이미 상륙해서 한양으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의 출격은 타격을 줄수 있을만정 정작 중요한 보급을
끊는 역할을 할수 없었겠지요
권률 장군이 수성에 성공해 호남의 길목을 지키고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한산도를 지켜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지켜 냄으로써
조선은 장기전을 대비할 미래를 내다 볼수 있었습니다 이는 유성룡의 의도는 모르겟지만 7년간의 임진왜란에 조선이 살아 남을수 있는
실로 신의 두수라고 칭할수 있습니다

당시 김수가 쌓은 경상도 일대의 축성은 의미가 없었다는점 제승방략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점, 육군의 지원을 받지 못해
모항을 버려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들어
이순신 장군이 경상 우수영에서 원균의 위치를 대신 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꺼라고 생각 합니다
오히려 원균이 원래 이순신 장군이 있던 전라 좌수영으로 가는 상황이 발생해 상황이 더 악화일로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 여러가지 사료들을 눈시bb님 처럼 들어 가면서 설명해야 하는데 이놈의 자료 찾기가 너무 시간 내기가 힘들고
그래서 제가 기억하는것들로만 추려서 썻기 때문에 사료등의 인용을 전혀 못했네요 부족한 점도 있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서로 보완해 가면서 이야기가 돼었으면 합니다 제가 썻지만 이건 어디 까지나 가정의 글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 자유 게시판이 임진왜란으로 후끈 달아 오르기에 저도 제 지식을 썰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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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해머
11/04/06 01:13
수정 아이콘
경상도 어디수군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경상좌수영이면 기습의 형태로 굴러갈 공산이 크고 경상좌수영 수군기지들 상당수는 육상에서의 공격에 장악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때 이곳에 배치된다면 어느정도 활약이 힘들어보이기도 합니다. 부산포, 동래성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 전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상우수영이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집니다.
경상우수영 관할구역에는 한달여동안 일본군 한명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상도에 일본군이 상륙했다고는 하지만 경상좌우도 경계를 놓고 본다면 경상우도 관할구역은 절반 이상이(대구 근방일대) 일본군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경상우수영 최대의 대읍인 진주성도, 그 동쪽의 진포에도 손을 안댑니다. 즉, 경상우수영을 맡을 경우 거의 한달이란 여유시간이 존재하고, 조선 수군의 행정체계면 한달이 아니라 3~4일이면 관할구역 내의 전 함대를 본영에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 경상우수영의 함대규모는 최소 11관 20포. 5관 5포 판옥선 25척 규모였던 전라우수영의 3배에 육박하는 70~73척에 달하는 판옥선 보유 및 운용규모를 나타냅니다. 전라좌우도 전 수영의 판옥선을 다 모아도 경상우수영 하나와 엇비슷합니다. 총병력 1만이라는 징비록의 기술은 전혀 과장이 아니고 오히려 축소된 걸로 여겨질 정돕니다.(상하번 다 불러모으면 1만 5천여정도 되던가.)

이 전력이 부산포로 나아간다면 일본군은 절대 막을수 없습니다. 일본 수군은 한참 이후에나 도착하고 그나마도 너무 중소영주들 뿐이라 동원병력을 다 모아도 1만이 채 안됩니다. 북상하던 육군이 내려와서 막을수밖엔 없지만 언제 소식을 전하고 언제 내려와서 함대를 꾸려 막을지는 막막해지게 됩니다. 이건 뭐, 게임 끝이죠.
오후의산책
11/04/06 01:16
수정 아이콘
이시기의 이순신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쪽에 있건 저쪽에 있건 뭔가는 했을거 같네요
눈시BB
11/04/06 01:23
수정 아이콘
자세한 건 좀 이따 달기로 하고...
예전에 워포그에서 나왔던 드립들을 모아보도록 하죠.


선조실록 임진년 4월 모일(4월 16일~ 4월 말)
경상우수사 이순신이 부산으로 건너오던 왜선단을 격파하고 왜선 몇십척을 침몰시켰다. 왜 선단은 대마도로 도망가 우리 수군이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다. 왜선은 다시는 부산 앞바다로 나오지 못했고, 부산과 동래를 점령한 소서행장은 며칠만에 항복해 목숨을 구걸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대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왜군을 끝까지 추적해 섬멸하지 못한 이순신을 체차시키고 국문하라고 아뢰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다만 이순신을 백의종군에 처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한갓 무부로서 용렬하고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못해 왜군을 끝까지 추격해 섬멸하지 못하고 다만 몇 안되는 수급으로 전공을 자랑하려 했다. 만약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까지 추격했으면 왜선 상당수를 잡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신은 다만 물길이 익숙하지 않고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핑계를 댔으나, 사실은 싸울 의욕이 없었다. 남왜북로의 병화가 거듭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무부들은 제몸의 안전만 생각하니 남쪽 변방에 장수다운 장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목도하니 뇌가 터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5월 모일
전라좌수사 원균의 장계
제가 경상우수사였으면 왜선들을 끝까지 추격해 대마도를 점령하고 낭고야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감박사마(註 : 감박사마는 일명 관백이라 하고 이름을 평수길이라 하나 실제 성은 풍신이다.)를 추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싸움에 게으른 이순신과 경상우수영 소속 장수들을 처벌하여 일벌백계하소서!

임진년 5월 임금의 비망기
"수군의 일은 수군의 일이고 육군의 일은 육군의 일이다. 과인은 이순신이 왜 땅에 쳐들어가 수길의 목을 베어온다 해도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다."
양정인
11/04/06 01:30
수정 아이콘
확실히 좌냐 우냐에 따라 전략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이순신 장군의 23전을 보면 명량해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리' 했던 전장과 전술을 택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전력을 어떻게 판단했을지는 어느누구도 모릅니다.
그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였으니 말이죠.

막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면 '요격' 을 하러 갔었을 것 같고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면 전력을 온전히 보전해서 다른 수영으로 일단 피신했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원균처럼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이트해머
11/04/06 01:34
수정 아이콘
경상우수영을 통상어른이 잡았다면 동원가능 전력만 1만이 넘어갑니다. 심지어는 한산도에서의 3도수군통제사 시절에도 이정도 병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없었던게 통상어른이죠. 이건 정말 호랑이에게 날개달아주는 격입니다.
눈시BB
11/04/06 03:10
수정 아이콘
일단 제승방략은 제가 맨 처음 한 얘기기도 하고 말씀을 드리자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류성룡의 말이 틀린 겁니다. 그래서 제 글 (조선의 전쟁 준비) 이 류성룡을 좀 까는 식으로 진행됐었죠. 원래 제승방략의 대규모라면 "을묘왜변" 수준이고, 류성룡이 말한 대규모는 "임진왜란" 수준이죠. 의도적인 거면 선조 실드용이고 아니라면 그냥 결과론에 매달린 거죠. 당시 조선에 임진왜란 수준의 대규모 공격을 막을 제도는 없었습니다. 200년 동안 한 게 게릴라전 토벌 뿐이었으니까요. 후의 속오군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구요. 정말 대규모로 맞부딪힐 거라면 훈련도감식의 상비군으로 가야 했지만 임란 전에 상비군 체제를 갖출 거라는 건 기대하기 힘듭니다.

김수가 성을 높게 쌓은 것도 그런 측면에서 봐야죠. 아무리 대대로 산성 방어였다고 하지만 조선시대 200년 동안 적이 서울로 쳐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고구려처럼 시도때도 없이 수도로 밀려올 때도 아니었죠. 고려 역사만 봐도 수도가 털린 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략은 산성-읍성의 조화이지 산성 일변도가 아니었죠. 오히려 발해가 읍성 일변도로 가서 그렇게 쉽게 몰락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아무튼 당시로서는 그게 한계였습니다. 오히려 동래성은 부산진성 등이 방어하는 동안 병력을 모아서 토벌해야 되는 입장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이각, 박홍이 도망간 후에도 송상현 휘하에 남은 게 삼천이었죠. 도망가지 않았다면 육칠천까지는 가능했겠네요. 그리고 부산진성은 최전방 GP나 다름 없어서 "적이 온다! 조국이여 안녕!"하는 위치였구요.
산성 방어 위주라고 하더라도 그 산성 방어에는 청야 작전이 뒤따릅니다. 고구려가 약해진 게 당나라가 여러 차례 소규모(그래도 사오만 단위)로 계속 청야를 강요해서이기도 했죠. 전쟁이 여러 차례 이어진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렇게 만드는 건 무리가 따릅니다. 실제 전쟁 진행 중에서 산성이 큰 활약을 한 것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동래성은 제승방략에 따라 각 군이 집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규모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이 무너진 건 이각과 박홍의 도주 탓이 큽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동래산성, 금정산성은 숙종 대에 가서야 세워집니다.
눈시BB
11/04/06 03:27
수정 아이콘
의병 편에서 언급한 김성일의 장계에 원균이 행동도 나옵니다. 배 한척으로 포구에 숨어 있었죠. 김성일은 이 역시 불러들여 고성을 치게 하는데 갔다가 적 일백명이 오자 다시 후퇴해 버립니다. 이 때가 6월 19일입니다.
난중일기에는 4월 29일에 원균이 "적이 공격해서 아군 진포가 함락됐다. 10척을 분멸했지만 부득이하게 후퇴한다"는 공문을 받습니다. 이른바"원균 10척 분멸설'의 근거가 되죠. 하지만 일본측에서 이걸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애초에 수군이 서쪽으로 가지도 않았죠. 그 전에 거제도가 함락되었다면 이미 수영이고 뭐고 다 불지르고 민가도 다 약탈하든 그냥 접수하든 했을 것인데 옥포 해전에서 적은 막 약탈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김성일의 장계에서 거제현령 김준민에 대해 나오는데 성을 지키다가 근왕할 일로 불려간 후 왜적이 성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이 근왕이 용인 전투인 것을 생각하면 거제도가 함락된 건 빨라야 4월 후반입니다.
혹은 옥포해전 때인 5월 7일 전후로 봐야 될지도 모릅니다. 김성일의 장계는 6월 28일자였으니까요. 아무튼 그 병력은 50여척. 이전에 나이트해머님 말씀 듣고 한 번 일본 수군 규모를 계산해 봤는데 수송 등의 문제를 생각하면 다 모아도 한산도 대첩 때와 그리 차이가 안 납니다. 공격했더라도 한꺼번에 다 가진 않았을테니 아무리 많이 잡아도 100척 정도? 최전방인 경상좌수영이 병력을 제대로 모은 걸 생각하면 경상우수영 역시 병력을 제대로 모았다고 봐야 됩니다. 그 수는 100척입니다.

근데 김성일 장계 날짜감각 잡기 어렵네요. -_-; 원균이 도주한 시점에 대해서는 이 장계 날짜 문제 좀 제대로 정리하고 다시 써야겠습니다.
눈시BB
11/04/06 03:32
수정 아이콘
오히려 연려실기술에는 원균이 적이 너무 많은 걸 보고 휘하 전함을 자침시키고 숨었다, 혹은 어선을 착각해서 숨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임란 초기에 육지의 경상우수영 진포가 함락된 게 어느 정도 있겠지만, 이후 김성일의 대처로 대부분 수복했고 진주성에 참가한 장수들 중에도 수군과 왔다갔다 한 장수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곤양군수 이광악이죠. 덤으로 왜적이 닿을 리가 없는데 후방 진포도 장수가 다 도망가고 없었죠. 결국 이런 창고를 불태우고 갑니다만, 후에 원균과 기효근 등이 "우리는 싸우러 갔었는데 왜 불태움?"이라고 하는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김성일이 쓴 걸 보면 이 때 원균은 숨어 있었죠.

이런 점들을 보면 통상대감이 경상우수사였다면 이 전력을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보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적이 수송선인 걸 생각하면 "부산포왜란"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겠죠. 다만 수송선이래도 300~500척인 이상 쉽게 공격하지 못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김해 서쪽으로 진출하는 건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네요.
토스희망봉사
11/04/06 11:56
수정 아이콘
금정산성의 경우 원래 부터 있었던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숙종은 남북을 나눠 짓고 성곽을 돌로 높게 증축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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