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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12 03:12:55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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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후삼국 이야기 - 5. 용 사냥꾼




제목은 뭔가 산으로. 지도는 이제 더 복잡해져 갑니다. 영어로 드래곤 헌터라고 할랬지만 역시 한국 얘기 하는데 동양식이 낫겠죠? 이번 주인공은 견훤입니다.

1. 그 시각, 견훤은
저번 편에서 궁예는 전략가로서의 능력이 컸고, 견훤과 신라를 압박하는 상황까지 도달했었다고 적었죠. 실제 황산 코 앞까지 밀린 견훤은 백제가 멸망할 때처럼 단 한 번 결전으로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신라 쪽으로 가도 궁예는 상주의 상당수를 차지하면서 상주와 명주 두 곳에서 신라를 압박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이 때까지 견훤은 대야성 하나도 먹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복습해보죠. 궁예가 왕을 칭한 후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나주를 향한 뒷치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 견훤은 뭘 했을까요?
대야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궁예의 진격이 멈춘 건 내부의 혼란 때문이었을 겁니다. 태봉의 국내가 혼란했을 때 견훤은 뭘 했을까요?
대야성을 치고 있었죠.
왕건이 쿠테타를 성공한 후 내부와 북부의 반란을 잠재우고 있었을 때는요?
대야성을 결국 점령했죠.

... 궁예가 한창 상주를 공략해서 낙동강 상류를 차지하고 나주를 경유해 수군으로 낙동강 하류에 영향을 미쳤을 때 견훤도 그에 따라 대야성 동쪽으로 가서 중류를 차지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완산주에 도읍한 후 세력 확장이라 할 만한 건 이 정도였죠. 특히 백제 계승의 명분상 반드시 차지해야 하며 궁예가 계속 밀고 내려오고 있던 웅주에서는 전혀 움직임이 보이지 않죠.
이번 편은 견훤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해석을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보면서 판단해 주셨으면 하네요.

2. 견훤의 영역은 어디까지였을까?
889년 미다부리정에서 거병 -> 892년 무진주 -> 900년 완산주
여기까지가 견훤의 후백제 건국 과정에 나오는 전부입니다. 궁예가 어디를 치고 어디를 깨뜨리고 어디를 어떻게 했다느니 하는 나름 자세한 기록이 있고 건국 후에도 왕건을 시켜 어디 어디 어디를 쳤다 하는 기록이 있는 거에 비해 차이가 크죠. 이전 글들을 통해 전주의 전부, 무주의 나주 인근 10여 군현을 뺀 전부 정도로 추측했습니다. 견훤이 무진주에 사위 지훤을, 순천에 사위 박영규를 (애초에 이 쪽 호족이었겠죠) 배치했고, 전주는 직접 다스리며 통치를 공고히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문제는 웅주죠. 웅주에서 견훤이 뭘 어떻게 했느냐에 대한 기록이 전무합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견훤이 승리해서 전주, 웅주로 북진한 걸 일부러 적지 않았거나 궁예처럼 병력을 보내 진군한 게 아니라 최대한 하나하나를 설득하면서 했다는 거죠. 아예 웅주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기엔 전설 하나가 걸리죠. 충남 당진에 있는 합덕 방죽입니다. 이 곳은 견훤이 둔전을 설치하면서 병사 만이천과 군마 육천필을 주둔하게 했다고 하죠. 이 둔전의 설치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가 문제인데, 일이년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건국 초기, 혹은 왕건의 쿠테타 무렵일 겁니다.

실마리는 전주를 차지할 때입니다. 견훤은 완산주에 도읍하면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고 하죠. 백제 계승 명분의 힘일 겁니다. 백제 제 2의 지역이었던 전주-익산 부근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제 1의 지역이던 부여-공주 부근은 어땠을까요? 아예 견훤이 승전한 기록을 숨겼다면 (왕건에게 패한 기록과 신라를 핍박한 기록이 대부분인 걸 생각하면 이 가능성도 무척 높습니다)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는 식의 기록도 하지 않았겠죠. 견훤은 철저히 준비한 겁니다. 힘이 아니라 호족 및 백성들의 지지 속에서 영토를 넓히는 것을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해상세력이라서 무정부적이고 백제 떡밥도 통하지 않는 나주는 자신에게 협력하거나 최대 중립을 지키는 선에서 만족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신 견훤이 공을 들인 곳은 무진주, 순천 등 다른 무주의 영토들과(나주가 뺏기고 무진주가 습격당하는 상황에서도 무주의 다른 군현이 항복하거나 뺏겼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전주 전체, 그리고 웅주겠죠.
하지만 웅주의 경우 완전 점령보다는 호족들의 협조 속에서 그저 궁예군을 막기 위한 방어벽 정도로 생각한 듯 하네요. 그 증거가 합덕 방죽의 둔전이고, 왕건 시대에도 웅주를 통한 북진을 하지 않은 이유일 겁니다. 웅주, 현재의 충청도에는 차령 산맥이 있죠. 보통 국경선은 산 아니면 강으로 나눠지구요. 견훤은 차령 산맥 이남만 확실하게 지키고 그 이북으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견훤은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렸습니다. 양길과 직접 맞붙은 궁예와는 방식이 다르고, 그걸 통해 한반도 중부에 영향권을 미치려고 한 거겠죠. 하지만 비뇌성 전투로 양길이 몰락하면서 수세에 몰렸고, 합덕 방죽의 둔전이 궁예 시대에 한 거라면 이흔암의 남진 등의 기간에 이 중앙군이 전멸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웅주에서 수세에 몰렸겠죠. 반면 왕건의 역성 혁명 이후 만든 거라면 이 때 웅주에 영향을 크게 미치면서 이 중앙군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한 것일 거구요.

즉 견훤은 궁예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탔다는 겁니다. 영토는 최대 전주, 무주로 제한하고, 웅주, 상주는 궁예에 대한 방어선을 치며 힘으로 치지 않고 최대한 협조를 노리면서 조금씩 중앙집권을 꾀한 거죠. 각 지역을 사위들에게 맡긴 것, 후에 아들들을 도독으로 앉힌 것 등에서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이구요.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저번 편들에서 조금씩 말했던 견훤 무능론을 낼 수밖에 없죠. -_-; 궁예가 한창 확장하는데도 백제의 중심지였던 웅주는 손도 못 대보고 나주는 먹히고, 내부로 혼란해서 궁예를 막지도 못 하고, 신라밖에 모르는 바보라서 고려를 칠 좋은 기회에도 신라만 노렸다... 이런 결론이 나오거든요.

3. 대야성의 가치
이런 가운데에서도 궁예의 전진이 계속되면서 중원경, 서원경이 있던 충주, 청주도 궁예싀 손으로 가고 공주, 웅주까지도 궁예에게 넘어 갑니다. 역시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밀려도 웅주는 방어벽으로 최대한 둔 것이거나(그 방어벽에 금이 가고 있던 거지만요) 밀려도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경우. -_-; 과연 무엇일까요?

자, 그럼 대체 그렇게 밀리면서까지 얻어내려 했던 대야성은 대체 무슨 성이길래 그런 걸까요? 젖과 꿀이라도 흐르는 건지...
여기서는 맨 첫 글에 소개했던 길공구님의 말씀을 빌리겠습니다.
http://blog.naver.com/gil092003
이 글의 마지막 8부에 나옵니다만... 요약하자면,

대야성은 산성으로 후방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전면에는 현재의 합천 시내에 해당하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평야가 있으며 그 북쪽으로 합천천이 흐르고 있죠. 성 근처엔 적당한 수군 거점이 없기에 수군으로 공격하기도 힘들고, 공격할 수 있는 전면은 산과 합천천으로 길이 극히 좁고 양쪽으로 협공도 당할 수 있죠. 공격은 어렵고 방어는 쉬우면서 말려죽이기도 힘들고 대병력의 자급자족도 가능한 성, 그것이 대야성인 거죠.
거기에 북쪽으로는 후삼국시대 대표적인 전투 지역인 조물성 및 문경, 즉 조령과 죽령으로 병력을 투사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거창, 동쪽으로는 대구, 밀성 등 신라를 압박할 수 있는 지역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낙동강을 끊으면서 강주를 압박할 수 있는 땅이죠. 견훤이 공격할 때 누가 성을 지키고 있었는지는 당최 알 수 없네요 -_-; 일단 태조 왕건 등에서는 신라 최후의 방어 거점으로 최후의 자존심 김효종이 지키고 있었다... 뭐 이렇게 나옵니다만. 확실한 신라 편도 아니고 일개 호족에게 막힌 거면 정말 열 많이 받았겠어요. -_-; 다만 견훤이 힘으로만 밀었을 리가 없는데 끝까지 항전한 걸 보면 친신라였던 건 확실한 것 같네요.
아무튼 대야성을 포기하고 그 이남 낙동강 중류, 지금의 일선 지역을 차지하기도 한 견훤이었지만 대야성 없이 이 곳을 지키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위에서 말한 가설대로 웅주 부근에서는 방어만 하고 동쪽을 치는 게 견훤의 작전이었다면 대야성은 그럴 가치가 충분한 성이었고, 대야성을 차지하지 못 한 것은 결국 견훤 최대의 패인이었을 겁니다.

920년. 견훤은 대야성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야망을 드러냅니다. 대야성 북쪽으로 상주, 남쪽으로 강주, 동쪽으로 양주가 기다리고 있었죠.

4. 화전양면전술
왕건의 역성혁명은 견훤에게도 큰 기회였습니다. 이흔암이 맡았던 웅주는 견훤에게 붙었고, 매곡성의 공직도 견훤에게 가면서 공주 지역도 탈환했죠. 이후 유검필이 연산진을 치고 왕건이 운주를 점령하고 다시 웅주를 치는 와중에도 웅주 전체는 그리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친백제여서 그렇든 궁예가 떠난 충격 때문이었든 웅주는 934년 운주성 전투까지 절대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방어벽이 되어 주었죠. 견훤 역시 926년에 10여개 군현을 공격한 것 이외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구요. 이걸 봐도 견훤은 딱히 고려와의 결전을 생각하지 않은 듯 합니다. 양웅의 대결은 위에서 언급한 전투들 이외에는 모두 경상도에서 벌어졌죠.

여기서 보여 준 견훤의 전술 또한 주목해 볼 만 합니다. 읊어 볼까요.

우선 왕건이 즉위하자마자 축하 사절을 보내며 공작선과 죽전을 선물합니다. 이 때가 9월, 다음 달에 견훤은 곧바로 대야성을 함락시키며 현재의 창원, 김해 방면까지 진격합니다. 대야성이 뚫린 여파이고, 견훤이 얼마나 기동전을 펼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이 때 신라가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견훤은 물러갑니다.
925년. 조물성 전투에서 양웅은 맞대결을 펼치는데 이 때 견훤은 고려의 삼군 중 상중군을 격퇴, 박수경의 분전으로 하군만이 겨우 고려군이 버틸 정도로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하필' 유검필이 충청도 서쪽에서부터 달려와서 구원하죠. -_-; 유검필 하나로 전력은 백중세. 하지만 그 유검필이 견훤을 고려 진영으로 불러들이는 것조차 반대할 정도로 견훤이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견훤이 한 것은 화친을 맺는 거였죠. 왕건은 견훤을 상보라고 부르는 굴욕을 감내하고 화친을 맺습니다. 이 때의 화친은 신라에서도 "저 놈은 화친할 놈이 못 됨"이라고 반대했지만 왕건은 감내했고, 그 대가는 거창 20여군현의 점령, 웅주 10여 군현의 점령이었습니다.
+) 현재 원주 근처에 견훤은 둔전을 했다고 하는데 아마 이 때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양길이 아직 무너지기 전에 미리 설치했겠죠. 그냥 비장 벼슬 내린 건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기록에 제대로 안 나왔을 뿐 견훤이 이 수준까지 진출해 있었다고 봐도 되겠구요.

공산 전투 이후에도 왕건이 살아 돌아가자 견훤은 신나게 왕건을 놀리면서도 화친을 청했고, 운주성 전투에서도 (이건 뭔가 목표가 달랐겠지만) 견훤은 화친을 청하죠.

군대에서 많이 들어 본 말이죠? 화전양면전술. 견훤은 왕건과 최대한 싸우지 않으면서 신라를 공격한 겁니다. 사서들에는 견훤의 병사가 날래고 용맹하다고 적혀 있죠. 이게 의도적인 띄우기가 아닌 이상 이 시점에서 군사적인 우세를 차지한 건 견훤이었고, 결국 이런 화친들은 견훤이 왕건과의 결전보다 신라를 치는 데 더 집중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926년 고려에 인질로 보낸 진호가 죽었을 때 견훤은 대노하여 고려의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주로 진격하는 데, 이 때 왕건이 성을 지키기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걸 보면 견훤의 병력이 그만큼 강했으며, 유일하게 견훤이 웅주로 출진한 이 기록은 견훤이 고려 본토를 칠 수도 있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으로 생각해야겠죠.

동시에 견훤은 강주를 본격적으로 공격합니다. 강주도독 왕봉규가 친백제로 돌아가면서 백제 본군과 왕봉규 세력, 강주 바로 서쪽에 있는 승주(순천)의 박영규 세력이 강주를 압박했겠죠. 거기에 북쪽에는 대야성이 있었습니다.

5. 왕건의 반격
하지만 왕건은 국내를 정비하면서 이런 견훤에게 큰 딴지를 걸죠. 이제부터, 다음 글인 왕건 편에서, 마지막 편 놈놈놈 편에서 쭉 얘기하겠지만 애초에 이것은 견훤의 한계로 보입니다. 신라가 고려에 계속 도움을 청하고 호족들의 귀부가 왕건 쪽에서 계속 늘어나듯 ( 왕건이니까 과장될 수도 있었겠지만요) 전체적인 인식은 왕건 > 견훤이었던 거죠. 군사적인 우세는 견훤이 쥐었겠습니다만...
927년. 왕건은 경북 예천 지역인 용주성을 침공, 함락합니다. 조령, 죽령을 뺏기 위한 시도였죠. 이어서 운주성을 직접 공격해서 긍준의 항복을 받아냅니다만 그 이상의 진전은 하지 못 합니다. 한편 동쪽에서는 근품성을 침공, 함락시키죠. 남쪽의 조물성, 서남쪽의 아자개가 왕건의 영역이었고 견훤의 영역은 현재 문경에 있는 문소성 정도였습니다.
용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견훤은 왕신의 시체를 돌려보내며 다시 화친을 청합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때 자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친백제로 돌아섰다지만 강주는 친고려적인 성향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나주에서의 일이 다시 시작되죠. 왕건은 927년 4월 운주에 이어 직접 웅주를 공격합니다만 별 전과를 보지 못 하고 돌아갑니다. 이게 백제 본토로 가기 위한 공격이었을까요? 아니면 이후의 공격을 위한 훼이크였을까요? 아마 훼이크였을 겁니다. 동쪽에서 고려군의 엄청난 공세가 시작되었거든요.
같은 달 고려 수군은 강주 남쪽의 항구들을 점령하고 (이 때 순천항도 점령됐다는군요) 북진, 강주를 점거합니다. 고려의 반격이며, 강주 내 친고려 세력의 반격이었겠죠. 동시에 상주에서 육군이 출격, 대야성으로 남진합니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장수는 추허조. 대야성의 중요성만큼 상당한 병력과 용맹한 장수들이 주둔했을 것인데, 세 방면(육군, 수군, 강주 호족연합군)에서 쳐들어 오는 고려군에게 결국 당하고 만 거죠. 이 때 사로잡은 백제군이 겨우 30명이고 성을 점령하지 않고 부수고 돌아갔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혈전이었을지 알 수 있습니다.

4월부터 7월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견훤이 신라로 가는 길이 차단된 것과 동시에 견훤이 노리던 강주가 넘어갔습니다.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먼 길을 돌아 강주를 순행하기에 이릅니다. 가는 길에 고사갈이성의 흥달까지 투항하며 계속 독립을 유지하던 김순식이 이 때 비로소 아들을 보내 귀부합니다.
두 영웅의 배경의 차이였을까요? 그릇의 차이였을까요? 자세한 평가는 마지막 편에서 하겠습니다. 이 때 견훤은 이상하리만치 침묵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을까요?

6. 신의 한 수

"멍이야! 장이야!" - 계백
"외통수여." - 거시기

왕건이 신나게 강주를 순행하고 돌아가던 9월, 견훤은 근암성을 공격, 함락시킵니다. 이 때까지 왕건이나 신라나 조령, 죽령 일대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했겠죠. 대야성이 먹히고 강주가 먹힌 판에 거기를 다시 탈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을 테니까요. 근암성을 점령한 백제군은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그런데... 그 방향은 강주가 아닌 서라벌이었죠.

10월, 견훤은 서라벌에 도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고 신라를 신나게 약탈하며 개선합니다. 왕건은 급히 일만 오천에 이르는 병력을 파병하지만, 이미 견훤은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죠. 상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상주, 강주에서도 견훤은 밀리고 있었고 서라벌까지 가는 길에 친백제 호족이 있었을 리 없으니까요. 태조 왕건에서는 신라 내부의 친백제계 신하들이 백제를 이용해 박씨 왕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했지만, 전 부정적입니다. 왕이 박씨일 뿐 실권은 김씨에게 있었고, 도움을 청하더라도 한창 밀리던 백제보단 고려가 나았겠죠. 견훤도 대소신료들을 몰살시켰다고 했구요. 견훤의 목표는 신라 내 친고려계 신하들의 제압, 신라에 대한 강력한 압박으로 주변 호족들에게 강력한 어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죠. 용 사냥.

왕건은 공훤에게 일만을 주어 먼저 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오천 기병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 공훤의 일만 병력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때문에 미리 격파되었다는 게 통설이죠. 다만 길공구님은 백제군이 공훤의 병력을 먼저 격파히기 힘든 위치에 있었다는 것과 당시 고려의 군사 동원 시스템을 보아 왕건과 합류했다고 주장하시더군요.

장소는 현재 대구의 팔공산. 여기서 거대한 용 사냥이 시작됩니다.

왕건군을 처음 막은 건 동화사의 승병. 이 절은 진표율사와 관련이 있는 친백제계 사찰이었죠. 견훤이 미리 이 곳을 전장으로 삼았다는 근거가 될 겁니다. 규모야 적어서 금방 격퇴되었겠지만, 싸우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있었겠죠. 왕건군의 진로를 파악하는 겁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크게 패합니다. 보통 견훤이 먼저 매복을 한 걸로 돼 있는데, 사료에는 오히려 왕건이 매복을 했고 견훤이 이걸 깨뜨렸다고 하네요. 어느 쪽이든 견훤은 자기가 원하는 전장에서 싸웠고, 왕건의 진로를 파악하며 작전을 완전히 깨드린 것으로 봐야겠죠. 왕건은 현재의 살내천으로(화살이 강에 잔뜩 쌓였다네요) 후퇴했고 여기서 3차 교전이 벌어집니다. 이번에 후퇴한 건 견훤이었죠. 왕건은 승기를 타고 계속 추격하죠. 장소는 현 대구국제공항의 남쪽, 견훤이 매복했다 해서 이름이 붙은 '복현동'입니다.
여기서 견훤의 유인에 걸린 왕건은 크게 패배하고, 왕건을 탈출시킨 묘안을 짠 곳, 지묘동에 포위됩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신숭겸과 김락의 분사가 나오죠. 그 두 장수가 왕의 갑옷을 입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동안 왕건은 단신으로 산을 돌아 도망갑니다. 바로 도망가지 않고 독암이라는 곳에서 아군의 최후를 지켜봤다고 하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견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왕건을 어떻게든 잡기 위해 이 일대에서 계속된 수색작전을 펼칩니다. 근처 군들의 벼들을 불태운 게 바로 왕건을 찾는 수색작전으로 보이며 왕건이 왕굴, 은적사 등에서 몇 달간 숨어 지냈다는 것을 보면 몇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인 듯 하네요. 길공구님은 왕건이 고려로 돌아간 걸 11월 초로 보시는데, 이 때쯤에 백제군도 후퇴한 듯 하네요. 어쨌든 적지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까요.

일만 오천에 달하는 중앙군이 전멸하고, 왕건 자신도 한 달 가까이 도망다녔으며 (신숭겸 등의 수색을 한 건 12월입니다. 이 때에 가서야 고려가 다시 정상화 된 거죠) 견훤은 그 강대함을 사방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천운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요. 다 잡은 왕건을 놓치고 말았죠.
대신 견훤은 왕건을 놀리는 국서를 보내 조롱하면서 다시 화친할 움직임을 보입니다. 왕건은 말로나마 당당하게 맞서죠. 하지만... 견훤의 움직임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930년까지 견훤은 강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주를 탈환했으며, 웅주에선 청주까지 진격했고 상주 역시 대부분 장악했습니다. 왕건이 반격하려 했어도 튕겨낼 뿐 손도 못 썼죠. 명주는 아직 반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 곧 견훤은 신라를 안마당에 둘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상주가 먹히면 양주의 신라가 먹힐 것이고, 신라가 먹히면 그 다음에는 왕건의 영토인 한주, 삭주가 노려지겠죠.

929년 12월. 견훤은 이 모든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곳으로 진격합니다. 현재의 안동, 고창입니다.

7. 견훤의 전략
뭔 10년 정도밖에 안 되는 기간 쓰는데 글이 이렇게 길어졌네요. -_-;
결국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북쪽은 막고 신라를 친다."
장난 삼아 신라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견훤이 보여 준 모습은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궁예 시절에도 그랬고 왕건 시절에도 견훤은 고려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던 거죠. 화친하고 동쪽으로, 화친하고 동쪽으로...
글을 시작할 때부터 둘 중에 하나라고 한 건, 이런 견훤의 모습에서 궁예, 왕건처럼 삼한일통을 하려는 의지를 찾기 힘들죠. 그냥 현재 가진 걸 지키기에 급급한, 그러면서 신라만 무리해서 치는 모습이죠.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견훤은 승주와 무진주에 사위 박영규와 지훤을 두었고, 아들들이 장성하자 무주와 강주 도독에 임명합니다. 고려시대에도 왕족이 송악 이외의 식읍을 받는 건 찾기 힘들죠. (일단 제가 못 찾아서 ㅠ_-;) 이런 점에서 견훤은 궁예와는 달리 자기 지역인 전주, 무주에서의 왕권 강화에 힘 쓴 게 아닌가 합니다. 그것도 기존의 인식처럼 힘으로 윽박지르는 게 아닌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설득하는 방법으로요. 백제 부활이라는 명분을 최대한 이용해서 강력한 결속을 이끌어냈고, 다른 지방 역시 힘으로 바로 억누르는 게 아닌 자기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식이었겠죠. 둔전을 통해 호족들의 병력보단 중앙군을 신속하게 파견하는 데 힘 썼으며, 고려에 대해서도 싸울 때는 강하게 싸우고, 그렇지 않을 땐 화친하면서 신라만 압박하고 호족들을 구슬린 거죠. 웅주 이북으로 진출하지 않은 건 이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다만 신라에 대해서는 백제 부활인만큼 (매소성 편을 보면 알겠지만 신라는 고구려 유민은 받아들인 반면 백제는 신나게 욕 했죠 -_-; ) 신라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때문에 신라계 호족들을 설득하기 어려웠고, 강주 역시 왕건보다는 호족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겠죠. 이렇게 보면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왕건과 대등하게 싸운 게 더 대단할지도요. 왕건이 승리한 건 그가 호족 출신으로 호족들을 이해했던 게 정말 크죠. 반면 견훤은 그와 반대로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그런데도 (나주 빼고 -_-; ) 전주, 무주가 안정적이었다는 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가능합니다. 신검이 정변을 일으키고 백제가 어지러워도 확실하게 귀부한 사람은 사위 박영규 하나. 지역 단위의 이탈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 전투는 견훤이 축적해 놓은 힘과 전략을 한꺼번에 분출한, 신라 압박과 왕건 저격이라는, 견훤의 생애를 화려하게 장식할 만한 대승이었습니다. 적진을 마구 활보하는 자신감, 그 일대 지리 및 승병을 끌어들이는 치밀함,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고 강요하는 군사적 능력까지... 만약 이 때 왕건이 전사했다면 고려는 크게 동요했을 겁니다. 아들 왕 무는 아직 어렸고, 고려 역시 호족 연합체에 불과했죠.

이렇게, 견훤은 궁예처럼 호족을 압박하고 사방을 공격하는 정복형 군주가 아닌 내부의 안정을 꾀하고 호족에게 유화책을 쓰며 필요한 요소만 공 들여 공격하는 수비형 군주였다는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대신라 정책에 대한 아쉬움, 그 시대에 왕권 강화를 꾀한 것 등에 대한 여러 문제점은 드러나지만 그 시대의 한계 안에서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았나 하네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견훤이 자기 영토만 지켜도 될 거라 생각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기사를 올려 봅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입니다.
병신(丙申; 936)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가수(假手)하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 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주목해야 될 건 "군사가 배나 되는데도" 라는 부분입니다. 일부러 왕건의 적인 견훤을 높게 본 게 아닌 이상 견훤과 왕건의 실 전력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생각할 만 하죠. 이 부분의 신뢰성을 절반으로 잡아도 백제는 고려와 전력이 대등했던 게 됩니다. 이 시기는 신라도 고려에 거의 넘어 갔고, 운주성의 패배로 웅주도 거의 넘어간 상태였는데도 말이죠. 전라도의 풍부한 곡창 지대, 이것이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고 "본진 플레이"만으로도 고려와 맞설 수 있다는 견훤의 자신감의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진훤이라 불러다오'의 이도학 씨는 이걸로 "진훤은 휴머니스트였을까?" 하는 코멘트를 다셨지만 ^^; 글쎄요. 아무튼 이 글 때문에 신검의 정변은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도 있겠지만 백제 내의 주전파 vs 주화파의 싸움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 끝내기 전에 하나 더. 한 가지 더 가능성이 보이긴 합니다.
견훤이 웅주에서 패배했던 전투. 혹은 견훤이 패배한 주요 전투 중에 절대 빠지지 않는 이름이 있습니다. 유.검.필.
유검필은 때로는 정서대장군으로 충청도에, 때로는 정남대장군으로 경상도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견훤은 단 한 명의 장수 때문에 영토 확장이 힘들었던 걸까요? ^^;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그럼 정말 마무리 짓겠습니다. 다음은 고창에서 일리천 전투까지 이르는, 왕건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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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이 글에 집중하다 보니 pgr 내의 다른 글에는 거의 신경을 못 쓰네요.
이번 대지진과 쓰나미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어서 복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일본인들과 일본 거주 한국 분들 무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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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독이
11/03/12 09:17
수정 아이콘
설마가 사람 잡는...
무리수마자용
11/03/12 10:34
수정 아이콘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우구스투스
11/03/12 10:52
수정 아이콘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견훤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가 않았죠. 태조왕건에서도 궁예에 묻혔던... 하지만 뭐랄까... 상당히 유능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위치에서 해왔다고 봅니다. 궁예가 여러 세력의 조정자 역할이라면 견훤은 상당한 자신의 세력으로 천천히 백제 땅을 잠심해오는 교묘한 군주라 생각됩니다.
아우구스투스
11/03/12 10:56
수정 아이콘
전 글에도 쓴 댓글이지만 견훤 관련된 거라서 한번 더 쓰겠습니다.

그렇죠. 제가 생각나는게 삼국지의 원소입니다. 원소 역시도 하북 4주에 대해서 완벽히 자신이 있기에 각 주마다 아들들을, 원담은 청주로, 원희는 유주로, 조카 고건은 병주로, 삼남은 원상에게 알짜배기 기주를 주었죠. 그리고 원가가 조조에게 패하고 나서도 하북 4주를 가지고 겨룬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견훤은 내부를 어느정도 단속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견훤은 자신의 기반 세력에 대해서 자신감도 있었고 궁예나 왕건등과는 달리 중앙 집권화, 그리고 확고한 세력 기반으로 서서히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루크레티아
11/03/12 13:25
수정 아이콘
어떻게 본다면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서 자신의 세력을 다진 것은 후에 정변을 불러온 양날의 검이었다고 봅니다.
박영규를 제외한 호족들의 이탈이 없었던 이유도 정변의 성공을 위해 이미 호족들 스스로가 신검을 위시한 정변파와 손을 잡았을 터이니 이탈이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물론 놀라우리만치 적은 수이긴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이러한 아들들, 피붙이들에게 지방을 맡겨 장악하는 방식은 위의 아우구스투스님께서 말씀하신 원소도 그렇고 멀리 주나라 봉건제도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언제나 뒤끝은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는 후백제도 그렇고 명나라의 홍무제와 영락제도 그렇고 불과 몇 십년을 못 버티고 믿었던 피붙이들이 오히려 뒤집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하죠. 하지만 사람이란 것이 언제나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피붙이 뿐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고 말이죠. 이렇게 계속적으로 몇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지만 항상 반복되는 것을 보는 모습이 역사를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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